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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Dec 09. 2023

성탄 클리셰

   내 어릴 적 단풍이 물들 무렵부터 부친은 여기저기서 땔감을 모으곤 했다. 한겨울 내내 이발소 화목난로를 피우기 위해서였다. 오래전 이발소는 여름보다 겨울이 훨씬 훈훈했다. 이발사, 면도사, 머리 감기는 시다까지 이발소 일꾼들이 난로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밥을 데워 먹고 고구마도 구워 먹는 풍경은 식구처럼 정겨웠다. 

   또 오래전 이발소엔 밀레 <만종> 그림 아니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하는 푸슈킨 시 구절이 박힌 액자가 걸려 있곤 했는데 그것들이 왜 하필 이발소에 걸려 있어야 했는지 지금까지도 그 연유는 잘 모르겠다. 희한한 건 평소에는 꼭꼭 격납되었던 유년 시절 풍경, 즉 화목난로와 묘한 조화를 이뤘던 밀레나 푸슈킨이 유독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었다 하면 망각의 수납장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와 무심한 마음에서 한바탕 법석을 떤다는 거다. 


내가 어렸을 때 이발소에서

처음 읽었던 푸슈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지 말라던

허름한 액자에 걸려 있던 시


​삶은 끝내 가난한 그들을 속이고

나도 속였지만

나는 조그만 마을의 이발사가 되고 싶다

세평 좁은 이발소에

난로를 피우고

주전자에 물을 끓이며,

수증기 뽀얀 유리창 너머

자작나무처럼 하얀 성탄절의 눈을

기다리겠다​

(이준관, <조그만 마을의 이발사>에서)


​   '클리셰'는 프랑스말이다. 미리 만들어 놓은 기성품처럼 진부한 표현을 가리키는데 우리말로 바꾸면 '틀에 박혔다'쯤 되겠다. 크리스마스하면 떠오르는 클리셰는 수두룩하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으레 딸려 나오는 것들이 식상하지만 크리스마스라서 그나마 용인할 수 있다. 

   속이 좀 보이긴 하는 까닭이 깎새로 전향한 뒤라 그런 것일 테지만, 아무튼 주전자 물이 끓어 수증기 뽀얀 이발소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이발사와 크리스마스는 클리셰가 전혀 아니고 차라리 신박하다. 거기에 푸슈킨, 난로, 성탄목 따위 조합은 은근 잘 어울리면서 크리스마스를 한층 낭만스럽게 연출하는 효과가 분명 있다. '앙상블'은 전체적인 어울림을 뜻하는 프랑스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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