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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Dec 22. 2023

이런 일도 했었다

   김은 전병과자 만드는 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최 회장은 회사 사무실과 공장이 들앉은 9층짜리 건물주이다. 또 일본에서 요리를 전공한 외아들이 회사 대표임에도 판로 개척이라는 미명 하에 서울에 상주하다시피 해 부산에서 회사 경영을 도맡은 실질적인 오너이기도 했다. 그런 최 회장이 며칠 전서부터 돌아오는 토요일에 건물 전체 바닥을 청소할 거라고 누누이 예고했다. 최 회장과 안면이 있던 고교 선배가 실직해 지지리 궁상을 떠는 후배가 안쓰러워 다리를 놨다. 그 선배보다 고교 윗기수인 최 회장은 따라서 김에겐 까마득한 고선배인 셈이다. 입사 전 면접 자리, 자수성가한 사업가이면서 고교 선배라는 아우라가 예사롭지 않았음에도 고고한 풍채와 넉넉한 미소로 구직자를 대하는 쇼에 그만 긴장이 눈 녹듯 사라졌었다. 거기에 더해 앞길이 탄탄대로일 것만 같은 회사 전망, 적응하는 기간을 충분히 밟으면 관리 전반을 맡길 예정이라는 사탕발림에 그만 넘어가고야 말았다. 

   입사하고 이틀 간 최 회장 분신이나 다름없는 이 실장을 졸졸 따라다니며 회사 업무를 익혔다. 김보다 연배는 밑이지만 이 실장은 노련했다. 최 회장 수하로 들어간 지 3년째. 여전히 서툰 것 투성이라고 겸손을 떨어댔지만 회장 소유 건물 관리는 물론이고 건물에 얹힌 전병회사의 잡다한 업무들, 이를테면 돈이 오가는 업무를 뺀 과자 생산, 운송, 매장 및 거래처 관리, 재고 관리, 공장 설비 관리에 이르기까지 안 미치는 데가 없을 만큼 다 꿰고 앉았다. 이 실장이 최 회장에게 없어서는 안 될 코어 직원으로 자리매김한 까닭이 그 사람 자체가 역량이 출중해서겠지만 일꾼 백 명이 안 부러운 일당백 집사를 길러 모든 걸 아우르게 해 불요불급한 인건비 지출을 최소화하려는 최 회장 심산이 크게 작용해서였다. 

   부산, 창원 등지 이름 대면 알 만한 백화점에 매장이 어김없이 들어가 있고 직영 매장도 두 군데나 성업 중인 알짜 회사에 정규직원이라고 해봐야 지하 1층 과자 만드는 공장 한 구석 조붓한 골방에서 온종일 재료 준비를 하고 그걸로 과자 만드는 게 일의 전부인 공장장(여)과 이 실장, 그리고 갓 들어간 김이 전부였다. 과자를 만들 때 일손이 딸린다 싶으면 투입되는 중년 아주머니와 직영 매장 두 곳을 오전 오후 번차례로 맡는 직원 4명은 아르바이트였다. 백화점에 입점한 매장을 관리하는 직원들은 전병회사가 급여를 지급하지만 백화점에서 업무 지침을 하달받고 통제를 받기 때문에 차라리 판매 대리인이라 부르는 게 더 정확했다.

   성수기가 아니면 재고 물량에 맞춰 생산일을 안배하기 때문에 그나마 덜하지만 명절이나 신학기를 앞둔 대목이면 물량을 대량으로 뽑아내야 해서 짧게는 보름, 길게는 한 달 내내 쉬지않고 기계를 가동시켜야 했다. 김이 입사한 시점이 마침 신학기가 코앞이어선지 선물용 세트 주문이 폭주하는 바람에 김도 마스크에 위생 빵모자를 눌러쓰고 곧장 생산 라인에 투입되었다. 전병과자를 만드는 날이면 새벽 별 보고 출근해 저녁 별 보고 퇴근하기 일쑤였다. 똑같은 설비에서 똑같은 재료로 생산되는 하루치 물량은 일정해서 목표량을 채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체로 열 시간 남짓이었다. 하지만 가동 전 기계 점검, 가동 후 뒷청소, 주재료인 반죽을 최 회장이 최종 승인하는 절차까지 포함한다면 작업시간은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일단 기계가 돌아가면 반죽이 소진되기 전까지는 기계를 멈추지 않는다는 생산 원칙이 여간 고약한 게 아니어서 이 실장, 김, 공장장 그리고 아르바이트 아줌마까지 4명은 생산량이 채워질 때까지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기계 앞에서 꼼짝달싹할 수가 없다. 그게 며칠씩 이어지니 진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겪을 일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손에 익어 나쁠 게 없다며 고생을 자처하는 무한 긍정을 뿜어내던 김이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건 최 회장의 지독한 독선과 저열한 용인술이 그 본색을 점점 드러내면서였다. 본인 재가를 득하지 않은 업무라면 결코 재량권을 부여하지 않았고 설령 불가피하게 진행시킬 수밖에 없다 해도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를 월권 행위로 간주해 끊임없이 상대를 매도하고 자아비판을 강요하는 집요함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런 최 회장 곁에서 기생하는 이 실장도 목불인견인 마찬가지였다. ​별일 아닌 일에도 힐난을 퍼붓는 최 회장을 향해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탓이로소이다 머리를 찧으며 석고대죄를 하다가도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실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최 회장에게 넉살 좋게 농을 걸고 비위를 맞추는 이 실장의 처세에 질렸다. 

   이렇게 먹어도 되나 싶게 과하고 후한 점심 혹은 저녁 식사를 직원들과 자주 갖는 최 회장이었다. 처음에는 직원들 노고를 치하하는 차원이겠거니 여겼지만 한 끼 식사치고는 적잖이 부담스러운 비용을 들이는 까닭이 혹시 직원들 생산력을 모조리 뽑아내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지게 한번이라도 더 매게 하려고 머슴한테 고봉밥 더 먹이는 심보랑 뭐가 다른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하던 일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끊임없이 일감을 얹어대는 과욕을 부리곤 하는 게 최 회장 일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니 혹시 모를 직원들 반발을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무마시키겠다는 발상이야말로 얼마나 저속한가. 그런 최 회장 행태를 이 실장은 덩달아 즐기는 것 같았다. '뭐 먹을래?'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부산 맛집 목록을 쉴 새 없이 나부대는 이 실장이 신기했다.

   "김 과장은 일머리가 좋아 금방 업무를 꿰찰 겁니다. 한두 가지만 더 익히면 과자 쪽은 김 과장한테 맡기셔도 됩니다. 그리만 되면 앞으로 저는 건물 관리에 더 신경쓰겠습니다."

   회장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하는 이 실장. 그런 그가 안쓰러워 보였던 건 아울렛에 입점한 매장에 들어갈 물량을 조사하려고 동행하면서 들었던 이 실장 딸 때문이었다. 스타렉스 운전대를 잡고 담배를 꼬나문 이 실장은 여덟 살 연상인 여자친구가 초등학교 2학년짜리 자기 딸과 제법 잘 어울린다며 밀양 본가에 맡긴 딸을 부산 거처로 데려올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했다.

   "김 과장님이 얼른 과자 쪽에 통달해야 회장님이 구상 중인 사업에 내가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습니다. 회장님 건물 2층 해물탕 가게 봤죠? 몇 달 뒤 그 가게 나가면 아마 직접 런칭하실 겝니다. 뭐가 들어서면 좋을지 아이템을 계속 숙고 중이시지만요. 결론이 나면 이후로는 내가 주도적으로 진행할 겁니다. 뭐가 됐든 점방 경영은 나한테 위임하신댔죠. 아마 그때부터는 이 실장이 아니라 이 지배인으로 불러야 합니다."

   ​점심 시간을 훌쩍 넘겼는데도 건물 바닥 청소가 끝이 없어서 끼니나 때우고 마저 하재서 맛집으로 소문난 김치전골 가게로 모두들 부리나케 달려갔다. 토요일 낮 시간임에도 식당은 손님들로 붐볐다. 오전 근무를 마친 직영점 판매 아르바이트까지 합석해 4명이서 음식 익기만을 기다리는 중에 간경화로 술을 끊은 최 회장이 습관적으로 소주 4병을 우선 주문했다. 애주가인 이 실장과 김을 배려했다지만 그날만은 술이 영 당기지 않았던 김이었다. 집요하게 술을 권하는 최 회장한테 오늘은 술이 안 받을 것 같다고 거절했지만 취기가 돌아야 일에 능률이 오르는 법이라고 이 실장이 껴드는 바람에 잔을 거푸 꺾어댔다. 코 박고 밥만 먹는 김한테 최 회장, 이 실장, 아르바이트가 계속 수작을 붙였지만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김 과장이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은가 봅니다. 아까 청소할 때부터 버거워하던데. 정 불편하면 식사 마치고 먼저 퇴근하세요. 괜찮겠죠 회장님?"

   "바닥 청소기 줄은 누가 잡아줘? 여자인 은희가 할래 내가 하랴? 하던 사람들이 마저 마무리지어야지, 쯧쯧." 

   김을 쳐다보는 최 회장 눈빛은 식당에 들어올 때부터 썩 곱지가 않았다. 최 회장은 김 심경에 불온한 동요가 일고 있음을 진작에 감지했다. 이 실장이나 여자 공장장처럼 순순히 따르는 타입이 아니다.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김이 영 부담스러웠던 최 회장. 그렇다고 당장 내칠 상황은 또 아니라서 더 어긋나기 전에 즐기는 술이나 받아주면서 봉합하려는 꼼수. 뻔히 알면서도 부러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자기 앞에 놓인 소주 두 병을 순식간에 깐 김.

   "죄송하지만 식사가 끝나는 대로 먼저 퇴근했음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공손한데 급히 마신 술로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에 쌍심지까지 돋은 김을 뺀 셋은 소화 불량으로 애 좀 먹었을 게다.

   입사한 지 거의 한 달쯤 됐을 무렵. 새로 뚫은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열 판촉 행사 준비로 한창이었다. 오전에 이 실장이 매대 준비를 마치면 폐장 시간까지 김이 판매를 맡기로 했다. 창원 시내 백화점 매장에 있어야 할 이 실장이 교대한 지 두 시간도 채 안 돼 매대로 되돌아왔다.

   "회장님이 당장 사무실로 오시랍니다."

   낌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입사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직원을 설마. 내 발로 나가면 나갔지. 

   "입장 바꿔 자네가 오너라도 회사하고 궁합이 맞는 인재를 원하기 마련일세. 길게 말하지 않겠네. 내 말뜻을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 믿고, 오늘치까지 쳐서 갑근세 무시하고 봉투에 담았네."

   백만 원 조금 넘는 현찰이 담긴 봉투를 적선하듯 건네자 의례적으로 늘어놓아야 할 사의마저 싹 달아나 버렸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일어서겠습니다."

   상투적인 악수를 나누고 건물을 나섰다. 욕지기가 치밀어 가래를 퉤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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