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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an 04. 2024

닭대가리

   잠결에 느닷없이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 이름은 달달 외는데 정작 영화 제목이 잡힐 듯 말듯 감감했다. 이러면 잠은 다 잔 게다. 그깟 영화 제목 알아맞추려고 벌떡 일어나 스마트폰 액정화면을 열나게 스크롤해대다 다행히 원하는 답을 찾자 뿌듯해하는 자신이 그렇게 빙충맞아 보일 수가 없다. 원하는 걸 얻었으니 숙면에 돌입하면 만사형통이겠으나 불현듯 그것 하나 기억해내지 못해 자다가 봉창을 두드렸나 하는 허탈감이 머리맡을 떠나지 않는다. 아, 하루가 다르게 끔찍해지는 이 빌어먹을 건망증이란!

   사람 이름은 한두 번 들어서는 기억해내기란 좀체 힘들다. 이름 떠올리려고 끙끙 앓다가 하던 일조차 까먹어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애시당초 외우는 데 젬병이긴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 이름만 골라서 지우는 지우개가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듯해 기분까지 다랍다. 기억력 감퇴가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임을 모르지 않지만 요즘 50대는 이전 세대 동년배에 비해 팔팔하고 창창하다는데도 속수무책이니 당황스럽고 속상하다. 

   폰에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를 일일이 들춰본 적이 있었다. 이름자는 낯이 익는데 얼굴이 안 떠오르거나 이름까지 생경한 연락처가 수두룩했다. 교분을 맺었으니 다음을 기약하려고 연락처를 나눴겠으나 격조한 사이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화석같은 흔적(연락처)만 남은 격이라. 분명 예사롭지 않았을 인연이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마저 잊어버린 건 노화를 빙자한 기억력 감퇴가 아니라 혹시 쌓아둘 줄만 알았지 그 관계를 계속 잇고 다질 줄 모르는 무능과 무관심에서 비롯된 건 아닐는지.

   당혹스러운 건 점방에서도 연출된다. "서너 번 왔으니 내 머리 스타일 대충 알겠지요?" 살갑게 물어오는 손님일수록 모르겠다. 꼬박꼬박 들르는 단골인 줄은 알겠는데 그의 옆머리를 어느 선까지 깎아야 할지 기억나지 않는다. 전에 깎았던 자국을 보고 어림짐작할 뿐이다. 그러니 그럴 때는 염화미소가 답이다. 

   개업한 지 2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이 단골이 커트만 하고 말지 염색까지 곁들일지 여직 가늠조차 못 한다. 커트를 끝내고 커트보를 거두면서 "샴푸하시겠어요? 아니면 털어드릴까요?" 물으면 "이제 딱 보면 알 법도 한데 아직도 물어보는 거 보면 사장도 어지간하요 참." 혀를 차면서 냉큼 염색보를 씌우라고 역정을 내는 단골이 하나둘이 아니다. 

   불특정 다수가 찾는 점방에서 손님 이름을 물어보는 건 이상하고 무례한 짓이다. 대신 얼굴을 기억해내는 것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점방을 성취하기 위해선 사활이 걸린 장사치의 중요한 덕목이자 영업력이다. "지난 달 중순께 짧은 상고머리 깎아 달라고 했던 분 맞으시죠?"라고 아는 체를 하는 게 그 어떤 고급진 친절 스킬보다 손님의 마음을 얻는 데는 직방이다. 그걸 잘 아는 녀석이 다달이 찾아주는 손님 특징을 번번이 망각하니 치명적이다. 언제나 새로운 손님을 맞는 느낌?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괜히 무안해질까봐 응대하는 모든 손님한테 사무적으로 대한다면 무정해 보여서 더욱 곤란하다. 하여 살짝 불안해진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건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이자 관계를 계속 잇겠다는 열의의 다른 표현일진대 그 빌어먹을 건망증 탓에 그저 돈벌이 대상으로만 손님을 취급함으로써 스스로 근시안적인 발상에 갇히고 마는 게 아닌지 하고 말이다.​


   건망증에는 3단계가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전화벨이 울린 다음의 대사다.

   1단계 : 여보세요. 거기 성말구 선생 계십니까. 본인이신가요?  예, 그런데 내가 뭐 때문에 전화를 했더라? 혹시 아시겠습니까?

   2단계 : 여보세요. 저는 성억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거기 전화 받는 분이 누구신가요? 제가 누구한테 전화를 했는지 헷갈려서…

   3단계 : 여보세요. 저 성말구 선생 계신가요. 예, 저요? 저는, 저는, 저는…(소리가 멀어지며) 여보! 내 이름이 뭐였지? (성석제, 「즐겁게 춤을 추다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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