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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an 11. 2024

처녀비행 또는 총각비행

   막내딸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었다. 하여 비행기 타 보는 게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지난 주말 그 소원을 이뤘다.

   서울에서 이종사촌오빠 결혼식이 있어 엄마, 언니와 함께 기차 타고 상경을 했다가 부산 내려오는 길은 하늘길을 택했다. 눈 내리는 김포공항 활주로 전경, 비행기가 이륙하는 장면, 하늘에서 내려다 본 도시 야경을 동영상으로 찍어 아비에게 보낸 것만 봐도 난생처음 비행기를 탄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리라.

   막내딸한테 난생처음이었던 처녀비행(이 글의 주제어이면서 문제어)이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사뭇 궁금하다. 절실하게 바라는 무언가가 이루어졌을 때 느끼는 벅찬 감동과 환희가 우리를 우선 압도하지만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 예외가 없다면 그 희열감도 차차 상쇄되어 종국에는 무심해지는 지경에 이를지 모른다. 그럴 바에야 자력으로 충분히 이룰 수 있음에도 차라리 그 성취를 고의로 지연시키는, 절실하게 바라고 갈구하는 상태를 주욱 유지하는 게 어쩌면 꿈을 잃지 않는 낙관주의자로서 건강하고 유익한 삶을 이어가는 미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비행기 타는 소원을 성취했다고 해서 비행기만 탈 순 없다. 아비에게 자랑삼아 동영상을 보냈을 때 들었던 비상飛翔의 환희가 영원할 순 없지만 체감의 속도를 지연시키기 위해서라도 막내딸은 기차도 타고 자동차도 타야 한다. 비행을 지연시켜야만 한다.    

   여기까지는 막내딸 비행기 탄 이야기이다. 덧붙이고자 하는 바는 위 글을 대표하는 제목으로 '처녀비행'이 적합한가 하는 거다. '처녀비행處女飛行​'의 사전적 의미는 '새로 만든 비행기를 처음으로 조종하는 비행. 또는 처음으로 비행기를 조종하는 비행사가 하는 비행'으로 막내딸이 난생처음 비행기를 탔다는 내용을 비유하는 데 부적절하지는 않다고 여겼다. 요는 '처녀處女'라는 낱말이 뭇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느냐는 의문이고 어제글에서 밝혔듯 자기검열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 

   '처녀'를 사전에서 찾으면, 


   결혼하지 아니한 성년 여자/남자와 성적 관계가 한 번도 없는 여자/일이나 행동을 처음으로 함/아무도 손대지 아니하고 그대로임​


   이란 뜻풀이지만,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성년 남자/여자와 성적 관계가 한 번도 없는 남자


   로 '처녀' 뜻풀이와 좀 다르다. (이상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더럽혀지지 않아 깨끗하다는 '동정童貞'이란 뜻이 '처녀'와 '총각'에 공히 들어있으니 그 뜻에서 파생된 '일이나 행동을 처음으로 함/아무도 손대지 아니하고 그대로임' 이라는 뜻도 '처녀'뿐 아니라 '총각'에도 달려야 마땅하다. 하여 '처녀비행'이 있으면 '총각비행'도 있어야 공평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뭔가를 최초로 하거나 손대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지칭하는 낱말로 '처녀'를 쓰면서 '총각'은 안 쓴다. 국어사전 '총각' 뜻풀이에는 아예 그런 뜻조차 달려 있지 않다. 

   언중들간에 만들어진 사회적 약속이면서 개인이 임의로 언어를 바꿀 수 없다는 언어의 사회성에서 보자면 '최초'라는 뜻으로 고착화된 지 오래인 '처녀'나 '처녀비행'을 쓰는 데 큰 무리는 없다. '처녀비행'을 '총각비행'으로 갈음한다면 얘기가 달라질 게다. 언중은 어리둥절해하면서 미친 놈이라고 손가락질해대겠지. 그럼에도 막내딸이 처음 비행기를 탔다는 내용으로 쓴 글을 대표하는 제목으로 '처녀비행'이라는 낱말을 갖다붙이자니 왠지 불편해 못마땅하다.

   각성한 페미니스트인 양 웅장한 논쟁을 하려는 게 아니다. 제기된 불만을 뭉개 버리고 타성적으로 갖다 쓰려고 해도 자꾸 마음에 걸리는 걸 어쩌랴. 언어세계에서 젠더 불평등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걸 가리는 자기검열은 바람직하다고 확신한다. 사회성 말고도 언어의 본질에는 자의성이란 것도 있다. 형태와 내용이 본질적으로 관련이 없다면 새로운 시니피앙을 자의적으로 생성시키면 된다. 공평하고 공정한 언어세계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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