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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교의 지배 - 종교는 왜 만들어졌을까

역사에서 배우는 투자의 지혜

by 김시바

진화와 농업이 인류의 역사와 비즈니스에 시사하는 바를 살펴본 지난 글들에 이어, 이번에는 인류 문명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나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종교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란 단순히 특정 신을 믿고 따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종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형화된 종교에서부터 시작해서 특정한 교리와 형식은 없지만 우리가 무조건/무비판적으로 믿고 따르는 생각까지 포함한 범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믿음이 만들어낸 군중과 종교가 지배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에서 우리는 종교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거기서 우리는 어떤 것을 배울 수 있을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종교가 왜 탄생하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우리 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우리는 여기서 어떤 투자의 지혜를 배울 수 있을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종교는 왜 만들어졌을까?


앞선 글에서 설명했듯이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전 동아프리카 지역에 처음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20만 년 전 아프리카 원시 밀림에서 살아가던 이름 모를 한 인간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지금과 구체적인 모습에선 많이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은 성격의 활동을 했을 것입니다. 하루에 몇 시간은 먹이를 찾아 수렵채집 활동을 벌이고, 나머지 시간은 무리 내 다른 인간들과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나름의 여가를 즐기기도 했을 것입니다. 대부분 평화로운 날들이었겠지만, 간혹 운수가 좋지 못한 날에는 맹수에게 습격을 당하기도 하고, 병에 걸려 고생을 하기도 하고, 갑자기 발생한 태풍이나 지진 같은 천재지변으로 몹시 놀라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거친 환경에서 살아야만 했던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날처럼 투자를 잘하거나, 어려운 수학 공식을 잘 푸는 능력이었을까요? 물론 이런 능력들도 필요했겠지만, 그보다 더 핵심적인 능력은 바로 빠른 판단력과 타인과의 결속력이었습니다.


앞선 글에서 신경과학자 이대열 교수의 설명을 빌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목표가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자기복제기계와 같다는 설명을 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진화를 거듭해 왔다는 것 또한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는 완전히 차별되는 복잡한 생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지난 1만 년 동안 급속히 구축한 문명이라는 장막을 걷어내고 근원적인 목표만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물학적 목표는 다른 생명체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장을 갖는 것도, 사람들 사이에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것도, 아이를 더 좋은 환경에서 기르고 싶어 하는 것도 결국 최대한 좋은 환경에서 자신이 생존하고 더 많은 유전자를 남기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을 수립하여 내재화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빠른 판단력과 타인과의 결속력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인간의 차별화된 능력은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사고, 문명을 만들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이 아니냐는 반문을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통상적인 과거의 생각과는 달리 현대의 과학자들은 우리가 자랑하는 이성적인 사고라는 느린 판단 체계는 우리가 가진 빠른 판단 체계를 돕는 보조 체계에 불과하며,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만들어낸 허상에 가깝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낸 문명은 분명 자랑할만한 것이긴 하지만 앞선 글에서 설명했듯이 농업혁명을 통해 식량 생산성이 증가하고 잉여 식량이 증가하면서 만들어진 인간 사회의 거대화/전문화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명을 만들어낸 초기의 도시, 초기의 언어와 문자, 초기의 상업거래 등은 결국 농사가 시작되고 많은 사람들이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결국 문명이라는 것은 더 많은 인간이 뭉칠수록 생존에 유리하다는 전략이라는 뼈대 바깥의 화려한 포장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뇌가 동작하는 방법과 우리가 판단을 내리는 과정을 연구한 과학자들(이하 인지과학자들)은 최근 반세기 사이 깜짝 놀랄만한 발견을 해냈습니다. 과거의 많은 철학자/심리학자들은 우리의 판단 체계가 감정과 이성으로 나눠져 있고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이성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인지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은 이와 달랐습니다. 우리의 판단 체계는 주로 최대한 빠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느낌/감정/사전에 답을 미리 준비해두는 방법(편향, 편견, 이미지)/어림짐작 등을 주로 활용하고 있고, 우리가 이성이라고 말하는 느린 판단 체계는 빠른 판단 체계의 보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던 것입니다.


1982년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우리의 전두엽에서 본능적인 감정을 행동 결정 과정에 참여시키는 안와전두피질이라는 부분이 손상된 환자들을 관찰한 결과, 우리에게 감정이 사라지면 사소한 결정조차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안와전두피질이 손상된 환자들은 글씨를 쓸 때 파란색 펜을 쓸지, 검은색 펜을 쓸지 와 같은 단순한 결정조차 내리지 못했고, 어느 한쪽을 선택하면 어떤 결과가 예상되는지 끊임없이 설명을 늘어놓으며 무의미한 비교를 반복했습니다.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이라는 판단 체계는 비교는 할 수 있어도 결정을 내리진 못한다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우리의 뇌는 긍정적인 감정이 느껴지는 것을 선택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것을 회피하는 등의 방식으로 감정을 이용해 비교하고 선택을 내리기 때문에 감정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선택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심사숙고하는 느린 판단 체계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판단을 내릴 때 우선 기존에 갖고 있던 이미지, 편견, 직관적 추론 등을 이용해 판단을 내리려고 시도합니다. 대다수의 문제들은 이런 방법들로도 충분히 결론을 내릴 수 있지만, 어떤 문제들은 빠른 판단 체계가 사용하는 방법들로도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빠른 판단 체계는 느린 판단 체계를 소환하여 판단을 내리는데 동참시킵니다. 기존에 사용하지 않았던 방법을 모색해보거나, 더 많은 기억을 더듬어보고,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시도해보기도 합니다. 이처럼 느린 판단 체계는 빠른 판단 체계가 결론을 내릴 없는 문제에 당면했을 등장하거나, 아니면 빠른 판단 체계가 내린 판단에 대해 이유를 설명하거나 합리화하고, 숫자 계산과 같이 특정한 문제를 풀어야 사용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밖에 입고 나갈 옷을 고른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신이 가진 옷들을 둘러보는 순간 단번에 '오늘은 이걸 입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선택이 우리가 그걸 왜 골랐는지 생각할 시간도 없이 끝나게 됩니다. 이때 만약 누군가 나타나 그 선택의 이유를 묻는다면 우리는 급하게 느린 판단 체계를 호출하여 그 선택에 대한 이유를 찾아냅니다.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오늘 날씨에 적합해 보여서’, ‘그게 더 예뻐 보여서’, ‘귀찮아서 대충 골랐다’와 같은 이유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중요한 자리에 참석을 하거나, 맘에 드는 옷이 동시에 두세 가지 있을 때라면 우리는 어떤 옷이 어떤 이유 때문에 더 적합할지 조목조목 따져가며 비교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느린 판단 체계가 등장하여 옷의 상태, 모양, 색상, 적합한 분위기 등을 하나씩 비교해가며 어떤 것이 더 좋을지 비교하는 것입니다. 물론 앞서 설명했듯이 느린 판단 체계가 이렇게 열심히 비교를 하면 결론은 감정과 느낌을 이용해 내립니다.


다시 20만 년 전 원시 밀림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 앞 수풀 사이로 뭔가 수상쩍은 움직임과 소리가 '느껴진다면', 그것이 진짜 맹수일 확률과 아닐 확률을 계산하고 있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까요? 아니면 일단 공포가 느껴지자 마자 즉시 숨거나 도망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일까요? 후자 쪽이 훨씬 더 생존 확률이 높았을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살펴보면 결론은 더 분명해집니다. 장기적 계획을 세우는 능력은 진화의 과정상 가장 최근에 인지능력이 발달한 동물들에게나 미약하게 보이는 것일 뿐, 대부분의 동물들에게 발달한 능력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는 ' 주변에서 발생할 있는 위험' 빠르게 포착하고 피할 있는 능력입니다. 마찬가지로 현생 인류가 나타난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내 주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빠르게 포착하고,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만약 내 앞 수풀 사이에 있던 것이 진짜 맹수라면 내가 혼자 있는 것이 더 좋을까요? 아니면 여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을까요? 굳이 물어보지 않더라도 여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있는 상황이 생존 확률을 높이는데 훨씬 유리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인간을 별도로 놓고 본다면 힘도 약하고 변변찮은 발톱이나 이빨도 없지만, 수십 명의 집단을 이룬다면 자신보다 크고 강한 동물들도 사냥할 있습니다. 앞선 글에서 설명했듯 고대부터 인간이 지구 곳곳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해당 지역에 있던 많은 동물들이 멸종당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고 함께 한다는 것의 장점은 단순히 물리적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의 더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배울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타인으로부터 물리적인 도움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인의 지식과 경험을 배울 있다는 것은 이상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무언가를 배워 우리의 행동 전략을 바꾸는 것은 다양한 행동 전략을 사용하여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고자 하는 생물에게는 필수 불가결한 입니다. 학습이 없었다면 우리는 유전자에 미리 프로그래밍되어있는 생존 전략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 갑자기 환경이나 상황이 바뀌었을 때 그것에 맞춰 행동을 수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유전자가 접해보지 못했던 환경이나 상황을 모두 다 준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학습을 이용한 행동 전략의 수립은 생명체가 단세포 생명체에서 다세포 생명체가 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기존 단세포 생명체일 때는 단일 세포가 혼자 식량을 획득하고, 그것을 소화해 에너지를 만들고, 지금이 생존에 유리한 환경인지 불리한 환경인지를 판단하여 움직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세포 생명체가 되면서 각 세포 별로 맡은 역할을 분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어떤 세포들은 소화기관과 신경기관(뇌)이 되었고, 어떤 세포들은 뼈와 근육이 되어 움직임이 좀 더 빠르고 다양해졌습니다. 이처럼 다세포 생명체가 되면서 신체는 전문화/분업화의 길이 열렸습니다.


동물의 신체가 전문화/분업화되면서 기능이 다양하게 발달한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행동 전략을 구사하여 다양한 환경에 적응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곰이지만 숲 속에 사는 곰은 나무에서 꿀을 찾기도 하고, 강에서 연어를 잡아먹고, 북극에 사는 곰은 빙하에서 바다사자를 잡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환경에서 쓸 수 있는 다양한 행동 전략을 모두 유전자가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어떤 행동 전략을 유전자에 각인시키는 방법도 없을뿐더러, 현재와 같은 진화 메커니즘에서는 유전자를 변형하여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방식 밖에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유전자가 만들어낸 방법은 우리의 세포들을 대표하여 행동 전략을 수립하고 (신경계) 만들고 여기에 그때그때 필요한 행동 전략을 학습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체 각 부분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조합하여 행동에 대한 전략을 수립하고, 다시 이것을 신체 각 부분으로 전달하여 행동을 결정하는 컨트롤 타워로써 뇌(신경계)라는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뇌가 생겨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동물의 움직임을 컨트롤하기 위한 용도로 탄생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동물 중에서도 멍게와 같은 일부 동물들은 움직임이 있는 유충 시절에는 뇌(신경계)가 존재를 하다가, 성체로써 자리를 잡고 나면 뇌(신경계)를 소화하여 에너지로 흡수해버립니다. 뇌(신경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세포들에 비해 훨씬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움직임이 불필요해지자 필요가 없는 기관을 자발적으로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움직임을 갖지 않는 일부 동물들을 제외한 동물들은 뇌(신경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과학자들은 우리의 (신경계)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하드웨어를 준비해도 좋은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듯이, 단순히 뇌가 만들어지고, 신체기관들이 전문화/분업화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신체기관과 뇌를 상황에 맞춰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은 좋은 소프트웨어가 필요했습니다. 예를 들어 정글에 살던 인간이 대초원으로 이동해야 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에 맞춰 행동 전략 또한 바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구의 생명체들은 다양한 환경에 적응해야만 하는 동물일수록 사전에 준비된 행동 전략을 사용하는 것보다 후천적인 학습을 통해 스스로 행동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내는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뇌라는 하드웨어가 발달하면서, 동시에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도 직접 만들어서 업그레이드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하드웨어를 잘 활용하기 위한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한 방법으로는 직간접적인 다양한 학습이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만지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통해 학습을 할 수 있고, 한편으로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경험을 통해서도 학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학습을 통해 다양한 상황, 다양한 환경,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하는 상황에서 어떤 것이 궁극적으로 나에게 이득인지 전략을 수립할 있습니다.


이세돌 9단을 꺾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놀라게 한 알파고 또한 이와 같이 학습을 통해 전략을 수립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알파고는 처음에 인간의 기보(바둑 경기 기록)을 가지고 학습을 하다가 종국에는 스스로 여러 전략을 수립해 자신이 만든 전략끼리 가상의 대결을 하여 더 좋은 전략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사용했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애초에 알파고가 나오게 된 배경이 컴퓨터가 게임에서 인간을 이기기 위해서는 인간과 같이 학습을 해서 개선하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이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인공지능은 사람이 사용하는 방법을 유사하게 재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하드웨어를 준비하고 소프트웨어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만으로는 2% 부족했습니다. 우리가 학습을 하지 않고 현재 상황에 안주한다면 기껏 값비싼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뇌를 만들어둔 것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유전자가 찾아낸 방법은 우리의 뇌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 또는 타인의 경험과 지식으로부터 학습을 수행할 경우 보상으로 뇌에서 도파민을 분비하여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도록 보상책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유독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는 또한 바로 이렇게 학습을 통한 보상을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성인도 호기심이나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학습을 수행할 경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만, 성인의 경우 이미 갖고 있는 지식과 경험이 많기 때문에 어떤 질문이나 호기심이 생기더라도 앞서 설명한 빠른 판단 체계가 이미 갖고 있던 지식과 경험으로 쉽게 답을 만들어버려서 무언가를 배울 때 느끼는 즐거움을 느끼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인들도 전에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분야를 배울 때면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즐거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새로운 분야를 접한 어른은 어린아이처럼 학습을 통한 도파민 분비가 쉽게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호기심과 학습 또한 궁극적으로 우리의 생물학적 목표인 '생존' '번식' 초점이 맞춰져 있는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매력적인 이성, 아주 맛있는 음식에 대한 정보는 쉽게 궁금해하고, 잠깐 스치듯 접한 정보도 쉽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수학 문제나 물리학 문제에는 관심이 생기지도 않고 아무리 쳐다봐도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난 이래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수학이나 물리학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성을 만나지 못하거나 음식을 먹지 못하면 살 수 없지만, 곱하기/나누기는 몰라도 세상을 사는데 전혀 문제가 없는 환경에서 살아왔습니다.




우리의 유전자는 우리의 뇌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건 타인의 경험을 통해서 건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학습하는 것을 학습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이때 우리가 학습에 사용하는 방법은 단순히 글자와 언어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직접 경험이나 상황의 주인공으로 가정하여 상상을 하는 방식으로 학습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했던바와 같이 우리의 판단과 기억 체계가 감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 하게 됩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우리는 감정을 이용하여 어떤 것을 판단하거나 기억을 할지 말지 정하게 되는데, 우리가 자신을 타인의 경험 속에 주인공으로 가정을 하고 학습을 하면 훨씬 더 깊고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동물의 세계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면서도 우리가 그 동물 중 하나라면 어떻게 행동할지, 저 동물의 세계에 내가 떨어진다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를 끊임없이 상상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심정적으로 끌리는 작고 귀여운 동물이 슬픈 결말을 맡는다면 마치 우리 주변의 인물이 그런 일을 당한 것처럼 같이 슬퍼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스스로 주인공으로 상상해볼 수 있는 이야기에서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반대로 감정 이입이 되지 않는 이야기는 우리의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인지과학을 이용한 스토리텔링을 연구하는 할리우드 스토리텔링 컨설턴트인 리사 크론은 자신의 저서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에서 이와 같은 인간의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뇌는 유입되는 모든 정보로부터 끊임없이 의미를 찾고, 생존을 위해 중요한 정보들을 뽑아낸다. 그리고 과거에 겪었던 경험, 지금 느껴지는 감정, 우리에게 미칠 영향을 토대로 해서 그 정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뇌는 단순히 모든 것을 선착순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다음 자신의 경험을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편집하여 재구성한다. 기억과 생각과 사건 사이에 논리적 상관관계를 만들고 지도를 그려, 미래에 언제든 다시 참고할 수 있도록 남겨두는 것이다."


저명한 인지과학자인 스티븐 핑커 교수 또한 이와 같은 설명을 지지합니다.


"허구적 서사는 언젠가 우리가 맞닥뜨릴 수도 있는 운명적 난관들에 대한 일종의 정신적 카탈로그를 제공해주며, 그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결정의 결과도 알려준다. 삼촌이 내 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자리를 빼앗아 어머니와 결혼했다고 의심되는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불운한 형이 도무지 가족들의 존중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형은 나를 배신할 수도 있을까? 아내와 딸이 집을 비운 주말에 고객이 나를 유혹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골 의사의 아내라는 지루한 일상에 자극을 주기 위해 누군가와 바람을 피운다면? 내 땅을 노리는 침입자들에 맞서 자살도 하지 않고 겁쟁이처럼 보이지도 않으면서 땅을 내주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아무 서점이나 DVD 대여점에 가면 찾을 수 있다. '삶은 예술을 모방한다'라는 진부한 표현은 진실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예술의 기능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궁금한 것이 생기고, 자신의 경험이나 타인의 경험을 기초로 이야기를 만들어 상상을 하려고 할 때 그 이야기의 발생 원인을 모르거나 결과를 모른다면 어떤 현상이 발생할까요? 이처럼 궁금한 것이 생겼지만 그에 대한 답을 명쾌하게 얻지 못한 경우에는 즐거움은 사라지고 부정적이고 불쾌한 감정이 만들어집니다. 무언가를 학습하고 싶을 때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모르거나 논리적 흐름이 우리가 생각한 것과 맞지 않다면 흥미를 잃어버리거나 어떤 경우에는 스트레스로 다가오기까지 합니다.


때로 우리는 충격적인 사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큰 사건들을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사건의 원인이 명확하지 못한 경우 우리는 원인이 다양하게 얽히고설켜 결정적인 원인이 없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2008년 세계 금융계를 침몰시킬 뻔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금융회사들의 탐욕으로 모든 원인을 돌리고 싶어 합니다만, 사실 그 이면에는 주택 구매자, 정부/정치인, 금융감독기관, 금융회사 등 사회를 이루는 거의 모든 주체들의 탐욕이 뒤섞여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에너지가 더해지고 얽히면서 뚜렷한 결정적 원인이 없는 대형 사건이 되는 현상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존재해왔으나 인간 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더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들이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의 뇌가 단순히 호기심이 생길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여 그것을 이해하고 학습으로 이어질 있을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원인과 결과가 확실하지 않다면 그것이 불확실성으로 다가와 우리의 뇌는 이를 불편하게 느낍니다. 우리의 뇌는 불확실성을 극도로 싫어하며, 불확실성을 최대한 피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뇌는 평화롭고, 안정적이며, 무엇이든 다 알 수 있는(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우리가 원인과 결과가 불확실한 이야기 또는 사건을 접하게 되면 우리의 뇌는 그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감춰버리는 방법을 써서라도 불확실성과 마주하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2005년 신경과학자들은 상황이 조금만 애매해지거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인간의 뇌에서 편도체(amygdalae)의 활동이 증가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편도체는 뇌의 양쪽 측두엽에 자리 잡고 있는 신경세포 다발로써, 위협 수준을 판별하고 공포를 관장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뇌의 보상 반응을 담당하는 배측선조체(ventral striatum)라는 영역의 활동은 줄어든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뇌의 반응은 우리가 불확실성에 직면했을 때 굉장히 불편하고, 때로는 공포를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경과학자 로버트 버턴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확실성 편향'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같은 확실성 편향으로 인해 우리는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고, 논리적 흐름이 명쾌한 이야기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의 생존이 걸려있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지만, 자신 또는 타인의 경험/관찰/지식으로 없는 것이 지금도 너무도 많다는 입니다. 지금은 그나마 과학이라는 도구가 많은 해석을 도와주고 있지만,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등장했을 20만 년 전을 상상해보면 인간이 갖고 있는 지식이 너무너무 미약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의 대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0만 년 전 인간들은 태양과 달이 왜 뜨고 지는지,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대지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갑작스러운 기근이나 천재지변은 왜 발생하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지만, 그들이 알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문제이지만 답을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단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묻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사회 구성원들에게까지 문제의 답을 찾게 됩니다. 여기저기 문제의 답을 수소문한 끝에 누군가 우리의 뇌가 만족할만한 '논리적으로 느껴지는' 해답을 제시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즉시 편안함을 느끼면서 즐거움 감정을 느낄 있습니다.


때로 투자시장에서 갑작스러운 가격 변동이 발생할 때면 사람들이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찾아 발생 원인을 묻는 것 또한 바로 이러한 욕구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과거 예측/해석 성적이 뛰어났던 전문가' 보다, '인과관계가 확실하고 논리적 흐름이 명쾌한 해석을 제공하는 전문가' 인기를 끄는 또한 바로 이런 이유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대규모 가격 변동에 놀란 우리의 뇌가 전문가가 제공하는 명쾌한 해석을 접하는 순간 편안함과 만족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논리적으로 느껴지는 해답이란 현대의 과학자들이 수행하듯 엄밀한 과학적 사고/실험 결과로 찾아낸 답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뇌가 논리적으로 느끼는 해답은 (우리가 보기에) 원인과 결과가 확실하면서,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지식으로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원인이 초자연적인 힘이라거나 상상 속의 존재로부터 발생했다는 것은 우리가 논리적으로 느끼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신이 그랬다거나 천사, 악마, 괴물이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랬냐는 것입니다.


어떤 궁금증이나 문제에 대해 과학적인 해석도 할 수 없고, 그것을 불확실하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상황에서 원시 인간들은 결국 해답을 찾아냈습니다. 아니 찾았다기보다는 만들어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 이상의 어떤 '초자연적 힘'이라는 존재가 바로 그 해답이었습니다.


과학이라는 도구가 없는 상황에서 초자연적 힘의 존재는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을 단번에 엄청나게 향상시켜줄 있는 놀라운 발명이라고도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기존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거의 모든 것들을 다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때때로 극단적으로 선하거나 악해질 수 있는 이유, 낮과 밤이 바뀌는 이유, 이 세상이 만들어진 원리 등등 이 모든 것이 초자연적 힘 하나면 다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이때 단순히 초자연적인 힘이 그랬다 라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앞서 설명했듯 우리가 원하는 논리적 흐름을 갖춘 이야기가 되려면 초자연적 힘이 '왜' 그랬는지에 대한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초자연적인 힘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타난 대부분의 종교들에서 신과 초자연적인 존재들은 '인간이 상상할 있는' 이유를 가지고 행동합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에 나타나는 신과 초자연적인 존재들은 인간이 궁금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계를 염탐하고, 인간의 속마음을 알지 못해 시련을 내려 시험에 들게 만들고, 심지어 인간과 계약을 맺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다는 믿음에도 부합하는 설명이었기 때문에 인기를 있었습니다. 인간은 신은 닮은, 신의 형상을 한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동물과는 차별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통해 진화 과정을 밝혀낸 지 15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우리가 다른 동물에 비해 특별히 차별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타인에게 답을 구하고, 타인의 의견을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면 타인의 의견에 대해서 논박을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옳은지 틀린 지 따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너무너무 궁금해하는 초자연적인 힘이 펼치는 미지의 영역(사후 세계, 천재지변, 자연현상)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펼치는 해석에 쉽게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해석일지라도 그것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20만 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이제 우리는 종교가 어떤 이유로 탄생하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학은커녕 변변한 지식도 없는 원시 인간들에겐 위험한 것과 불확실한 것, 알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뇌는 이 모든 것들을 명쾌하게 설명하여 궁금증과 불안함을 없앨 수 있는 해답을 절실히 갈구했습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힘의 전문가가 나타나 우리의 뇌가 납득할 있는 논리적 인과관계를 갖춘 이야기를 제시하자 그것을 쉽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궁금증과 불안함은 전 세계 모든 원시 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으므로, 당연히 종교 또한 특정 지역/인종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진 인간사회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형성되고 발달했습니다. 등장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들의 특징이나 숫자 정도가 다를 뿐, 세계 각지의 종교들은 ①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고 흘러가는가' 대한 해설과 ②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 대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함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는 오로지 우리 호모 사피엔스 만의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하기 이전의 고인류들 또한 죽은 사람과 함께 그들이 사용하던 도구들을 의도적으로 매장한 흔적이 발견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있는 도구를 죽은 사람과 같이 매장한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사후세계의 개념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증거입니다. 고대 국가들의 왕과 귀족들을 매장할 때도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도구와 재화 등 부장품을 같이 묻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도구를 같이 매장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후세계를 상상한다는 것은 지금의 종교와 같이 아주 복잡하고 체계화된 종교는 아니더라도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기초적인 종교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종교는 과학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과학을 대신하여 인간의 궁금증과 불안함을 달래줄 수 있는 존재로써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우리는 종교를 통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었고, 어떻게 삶을 살아야만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필연적 존재로 등장한 종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과정을 통해 처음 종교를 창시한 사람들조차도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결과를 만들게 됩니다. 인류라는 대지 아래에 그 끝을 알 수 없는 씨앗이 심어졌던 것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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