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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농업, 인류 최초의 파괴적 혁신

역사에서 배우는 투자의 지혜

by 김시바

생명의 탄생과 진화가 투자와 비즈니스에 시사하는 점은 무엇인지 알아본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인류 문명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농업의 시작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이고,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수렵채집의 한계


인류는 자신들이 자연의 지배자라고 자각을 하기 시작한 이래로, 아주 먼 옛날부터 생명에 대한 생각의 기록을 많이 남겨왔습니다. 고대부터 많은 학자들이 생명 탄생 과정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뛰어들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지구 상에 존재하는 생물들을 분류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제안되었다가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흔히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알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생물학 연구에 뛰어들어 동물의 구분에 대해 연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생물 분류법은 스웨덴의 생물학자인 칼 폰 린네(Carl von Linne, 1707~1778)가 기존 학자들의 성과를 모아 수립한 체계입니다. 그는 생물을 크게 동물과 식물로 나눈 후 동일한 형질을 가진 생물끼리 묶어 분류하여 생물 분류 단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생물의 학명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속명과 종명을 이어 쓰는 라틴어 이명법을 고안해냈습니다. 우리가 현생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르는 것 또한 린네의 라틴어 이명법(호모 → 속명, 사피엔스 → 종명)을 따른 결과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에서 '호모'라는 속명 의미는 라틴어에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호모' 속의 등장은 약 250만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호모' 속이라 할 수 있는 '호모 하빌리스(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뜻)'가 약 250만 년 전에 등장하였으나 그 후로 약 100만 년 후 멸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호모 하빌리스'는 세계 곳곳으로 진출하여 다양한 인간종들로 진화했습니다. 유럽 쪽과 중동 쪽에는 우리가 흔히 네안데르탈인으로 부르는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가 있었고, 아시아 쪽에는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데니소반스', 그리고 인도네시아 쪽에는 가장 최근(약 1만 7천 년 전) 멸종한 것으로 보이는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등이 있었습니다.


현대인과 생물학적으로 같은 종인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사람이라는 뜻)'는 네안데르탈인과 동일한 조상인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로 부터 진화하여 약 20만 년 전 동아프리카 지역에 처음 나타났습니다. 한동안 동아프리카 지역에서만 활동하던 '호모 사피엔스'는 현재로써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 알 순 없지만, 약 7만 년 전 동아프리카 지역을 떠나 중동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동 지역 진출을 기점으로 약 6만 년 전에는 아시아 지역으로, 5만 5천 년 전에는 유럽과 호주 지역으로, 1만 6천 년 전에는 북아메리카로 진출했고, 마침내 1만 2천 년 전에는 남아메리카까지 진출하여 지구 전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간 현생 인류는 그곳에 이미 존재하던 다른 고인류들과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현생 인류와 접촉이 있었던 고인류들은 더 이상 지구에서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과연 7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현재로써는 구체적인 사실을 알 수 없지만 유력해 보이는 가설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구 증가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진 현생 인류가 지구 곳곳으로 퍼져나가자, 그곳에서 다른 고인류들과 식량을 두고 경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현생 인류를 제외한 나머지 고인류들이 멸종을 당한 것입니다.


도구와 불을 사용할 수 있었던 현생 인류에게는 개별 활동을 하다가 맹수에게 습격을 당하는 일 외에는 크게 위협이 되는 상황이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때때로 수렵채집 활동을 하다가 사자나 호랑이, 곰이나 늑대, 뱀에게 습격을 당하기도 했겠지만 불이 존재하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몰려 있는 거주지에서는 그리 큰 위협은 없었을 것입니다. 때때로 가혹한 자연환경의 변화가 발생하여 위기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적응력이 뛰어났던 현생 인류는 이 또한 적응하여 버텨냈습니다.


이처럼 현생 인류가 자연의 먹이사슬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이후로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지만 인류가 기존에 사용하던 수렵채집 방법은 같은 토지 면적에서 항상 비슷비슷한 양의 식량만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거주지와 일정한 토지 면적에서 부양할 수 있는 인구는 한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인구가 증가할수록 일부 사람들은 기존 거주지에서 나와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나서야만 했습니다.


현생 인류가 동아프리카 지역을 떠나 아시아에 진출하기까지는 약 1만 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계산했듯이 한 수렵채집인 무리가 40년마다 한 번씩 둘로 나뉘고, 갈라져 나온 집단이 원래 있던 곳보다 100km 동쪽에 있는 새로운 영토로 이주한다고 가정하면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중국까지 이동하는 데는 약 1만 년 정도의 시간이 걸립니다. 이렇게 현생 인류는 인구가 증가할수록 새로운 거주지와 식량을 찾아 서서히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인구와 식량 이외에 다른 이유 때문에 현생 인류가 퍼져 나갔던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존과 관련된 불확실성에 극도로 예민한 인간의 특성상 생존과 관련되지 않은 이유로 거주지를 옮겼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뇌는 환경의 변화나 불확실성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안정된 생활과 거주 환경을 버리고 이동한다는 것은 뇌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피하고 싶은 위험한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안정된 생활과 거주 환경에서 벗어나 도전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현재와는 달리 우리의 미래가 안정되지 않을 것이라는 위협이 느껴질 때입니다. 약 7만 년 전 현생 인류가 처한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증가하는 인구와 부족한 식량, 그로 인해 급증하는 갈등과 분쟁으로 인해 우리의 조상들은 생존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기에 갈등과 분쟁이 거듭되는 아프리카 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터전에는 이미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다른 고인류 종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또한 현생 인류와 의존하는 식량 자원이 유사하여 충돌이 불가피했으나, 이들은 현생 인류 무리에 비해 규모가 작아 현생 인류 무리 입장에서는 훨씬 더 상대하기 편했을 것입니다.


의존하는 식량도 유사하고, 외모와 풍습이 다른 인간 종들 간에 경쟁이 생긴다면 결국 그 경쟁은 무력 충돌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현생 인류와 고인류들의 생활권이 겹치는 곳곳에서 무력 충돌이 있었을 것이고, 충돌의 결과 다른 고인류들에 비해 더 큰 규모의 사회 조직을 구성할 수 있었던 호모 사피엔스가 나머지 고인류들을 정복/멸종시켰을 것입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더 큰 사회 조직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이전 글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충돌 양상은 현대인들에게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우리 인류는 필요한 자원 또는 이권이 겹치거나, 단순히 외모와 풍습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인간이 인간을 학살하는 현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현대인들마저도 이렇게 충돌과 학살이 발생하는데, 서로 말이 안 통하는 수만 년 전 인간 종들 간에 충돌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무력 충돌 이외에 어떤 질병이나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현생 인류를 제외한 나머지 고인류들이 멸종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에 옮긴 천연두로 인해 현지 원주민들이 대규모로 희생되었던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 고인류 한 종류만이 아니라 현생 인류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고인류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이러한 질병이나 환경적 요인보다는 지속적인 무력 충돌에 의한 결과일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입니다.


이렇게 다른 고인류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현생 인류는 더 넓은 땅에서 수렵채집 활동을 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고인류들을 멸종시켰다고 해서 인구의 증가가 멈추진 않았기 때문에 어느덧 지구 상에서 수렵채집 생활을 할만한 모든 땅에 인간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농업이 시작되기 이전의 인류 전체의 인구는 약 500만에서 800만 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재규의 저서 <역사에서 경영을 만나다>에 따르면 수렵채집인 1인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면적이 약 10평방 킬로미터라고 하니, 수렵채집인이 최대 800만 명이라 가정하면 전체 인구를 부양하는데 8000만 평방 킬로미터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는 대략 아프리카와 유라시아를 합친 면적과 유사한 수준입니다. 그 정도면 적당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을 제외하면, 사실상 인간이 살만한 땅에는 이미 수렵채집인들이 넘쳐났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현생 인류가 지구 곳곳으로 이동을 시작한 7만 년 전부터 농업이 시작되기 이전까지 이미 수많은 동물들이 멸종당했던 것도 이를 증명합니다.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에 따르면 현생 인류가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지 2천 년도 지나지 않아 북아메리카의 대형동물 47속 중 34속이 사라졌고, 남아메리카에선 60속 중 50속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현생 인류가 지구 곳곳에 퍼지기 시작한 뒤로 지구 전체적으로 몸무게 45kg 이상의 동물 200속 중 100속이 사라졌습니다. 흔적이 잘 남지 않은 소형 동물들은 이보다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과거 인디언들은 미래를 대비하여 들소의 숫자를 조절해가며 사냥했다는 낭만적인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실상 식량 부족에 직면한 인류에게 미래를 대비해가며 사냥을 조절할 여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반대로 공유지의 비극이 발생하여 그나마 남은 소수의 동물들을 다른 부족이 사냥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사냥해야겠다고 서둘렀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수렵채집을 통한 식량 확보가 한계에 봉착하자 인류에게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자연환경 또한 변화하여 새로운 방법의 생각해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습니다.




2. 농업의 시작


현생 인류는 다른 고인류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했지만 수렵채집을 통한 식량 확보에 있어서는 다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다시 다른 해결책을 찾는 패턴은 앞선 <생명과 진화는 붕괴를 야기한다>에서도 언급한 진화의 프로세스입니다. 혁신 > 성장 > 거품 > 붕괴 > 혁신으로 이어지는 패턴은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가능한 한 더 많은 욕심을 내라’는 프로그램으로 인해 이후에도 인간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패턴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처럼 새로운 식량 확보 방법에 목말라하던 인류에게 약 1만 3천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 기후가 온난해지는 간빙기가 시작되자 새로운 해결책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지구에게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빙하기라는 단어는 마치 공룡시대라는 단어 같은 느낌으로 아주 머나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겠지만, 빙하기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최근까지 존재했습니다.

과거 지구에는 크게 4차례의 빙하기가 존재했습니다. 그중 현재는 약 4천만 년 전에 시작된 4번째 빙하기를 거치는 중이라고 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4번째 빙하기 중에는 10~20만 년 정도의 빙기와 1만~3만 년 정도의 간빙기가 번갈아가며 찾아왔습니다. 현재는 1만 3천 년 전 시작된 간빙기가 유지되고 있는 중입니다.

상대적으로 따뜻하고 안정적인 기후가 시작되자, 춥고 건조했던 빙기 동안 잠들어 있던 식물들이 활짝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식물들이 지구의 더 넓은 범위에서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식물들이 번창하기 시작하자 인간들 중 일부는 관찰을 통해 식물의 특정 부분이 땅에 떨어지면 그곳에서 다시 식물이 자라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고, 특히 특정한 지역에서는 식물이 아주 왕성하게 자라날 수 있다는 것 또한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약 1만 년 전, 우리가 흔히 메소포타미아 지방이라 부르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인근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현재의 터키와 이라크 지역)을 필두로, 이집트 나일강 유역, 중국 , 남아시아, 지중해, 아메리카 지역 등등 큰 강이 위치한 세계 여기저기서 동시 다발적으로 초기 농업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png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도시들을 표시한 지도, 지금은 사막화되어 과거의 영광을 찾아보기 어렵다


농업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발견이 필요했습니다. 우선 어떤 식물이 농업에 적합할 것인지 찾아야만 했습니다. 농업의 대상으로 적합한 식물은 인간이 먹고 소화할 수 있어야만 했고, 투입되는 노동력 대비 많은 수확량을 거둘 수 있어야 하고, 가능한 한 적은 공간에서 최대한 많이 기를 수 있어야 하며, 인간 외에 다른 동물들이 쉽사리 먹이로 노리지 않는 식물이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까탈스러운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 수천 년 간 실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의 식탁에 오를 수 있는 식물은 고작 100여 종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농부들이 선택한 최초의 작물은 바로 야생 밀이었습니다. 밀은 식량이 되는 씨앗 부분이 바람에 날리지 않아 수확하기가 편했고, 단위 면적당 생산성이 높은 편이라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다른 작물들에 비해 농업에 적합해 보였을 것입니다.

또한, 어디에서 기르는 것이 적합할지도 발견해야만 했습니다. 현대 도시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매년 같은 땅에서 같은 작물이 자라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 현대적인 인공비료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매년 같은 땅에서 같은 작물의 농사가 이뤄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토지 안에 농작물이 생장하는데 필요한 영양소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생장하는데 여러 가지 영양소가 필요한 것처럼 식물 또한 생장하기 위해서는 토지 속에 여러 영양소가 충분히 있어야 합니다. 그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바로 ‘질소’와 ‘’이라는 두 가지 성분입니다.


이 두 성분은 식물이 한번 생장하면서 토지 속에 있던 이 두 성분을 잔뜩 흡수해버리고 나면 자연 상태에서는 쉽사리 보충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질소는 공기 중에 굉장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성분이지만, 공기 중에 질소가 토지에 흡수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우선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번개가 쳐서 공기 중에 질소가 빗물에 녹아 토지로 흡수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는 질소의 공급이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유럽의 농부들은 근대에 들어서 공기 중에서 질소를 흡수하여 땅으로 보낼 수 있는 작물을 심어서 질소를 보충하는 방법을 사용하였고, 아시아에서는 사람이 흡수했던 질소를 인분()으로 배출하면 이것을 수거하여 땅에 뿌려 보충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아시아의 농업 생산력이 유럽보다 좋았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인분(똥)을 이용한 질소 공급 방법이 일찍 발견되었던 것도 이유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같은 땅에서 다시 같은 작물의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질소와 인의 보충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지력(地力)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질소와 인 등 식물의 생장에 필요한 포함한 여러 성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농업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이나 나일강 등과 같이 큰 강 유역에서 시작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매년 주기적으로 큰 비가 내려 홍수가 발생할 때면 농사를 짓지 않는 곳에서 질소와 인을 포함하고 있던 비옥한 토지가 빗물에 휩쓸려 내려와 강 유역을 덮어버리곤 했고, 이렇게 토지가 한번 뒤섞이게 되면 그 지역의 지력이 자연스럽게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큰 강 유역에서는 매년 농사를 지어도 농사가 성공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농업의 시작도 큰 강 유역에서 이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농업이 성공적으로 시작되면서 수렵채집을 통한 식량 생산의 한계에 돌파구가 마련되었습니다. 자의 또는 타의로 수렵채집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농업을 통해 식량 생산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수렵채집에 비해 식량 생산성이 더 높은 농업이 정착되자, 이에 맞춰 인구 또한 다시 한번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3. 농업의 나비효과


아마도 처음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인간들은 처음부터 농업에 전념하기보다는 수렵채집과 농업을 겸하는 식으로 농사를 시작을 했을 것입니다. 큰 강 유역에서는 땅에 씨앗만 뿌려두어도 식물이 알아서 잘 컸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봄이면 씨앗을 심어 두고 수렵채집 생활을 하다가 가을이 되면 씨앗을 심어둔 지역을 찾아 식량을 챙겨서 저장해두는 식으로 농업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수확을 거두고 나면 한 번의 수확으로도 오랫동안 일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남는 시간에 농업에 대해 더욱 탐구를 하기 시작했고, 환경을 잘 조성해주면 식물이 더 잘 자란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점차 더 많은 시간을 농업에 할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수렵채집 활동에 투자하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점차 수렵채집을 잘하는 방법보다는 농사를 잘 짓는 방법에 더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등에서는 수렵채집 활동이 농업으로 인해 잊혀졌기 때문에 수렵채집이 사라졌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근대까지도 농부가 수렵채집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는 점에서 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우리도 알다시피 농한기나 농사가 망해 기근이 발생했을 때는 모든 농부들이 수렵채집인으로 변해 수렵채집 활동에도 매진하곤 했습니다. 그보다는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 전문성과 주된 관심사가 옮겨갔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농업이 시작된 초기에는 농업의 장점이 수렵채집의 장점보다 더 커 보였습니다. 수렵채집은 다양한 음식을 섭취할 수 있다는 것과 농업보다 육체적인 노동이 덜 필요하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반면, 농업은 수렵채집보다 더 안전했고, (농민에 대한 조직적인 수탈이 있기 전까지는) 한 번에 더 많은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토지 면적당 식량 생산성은 아주 큰 차이가 났습니다. 수렵채집 인구 1인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토지의 면적은 약 10평방 킬로미터였지만, 농업인구 1인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토지의 면적은 1평방 킬로미터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농업의 장점으로 인해 농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점점 더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농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점점 더 증가하고, 식량 생산량 증가로 인구가 덩달아 증가하면서 처음에는 알 수 없었던 단점과 파급효과가 수천 년에 걸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농업이 시작되면서 완전한 정착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존 수렵채집 시절에도 계속해서 방랑하는 삶이 이뤄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근처에 구할만한 식량이 없을 경우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업이 시작되면서 기껏 열심히 일궈놓은 농경지를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정착생활이 시작되고, 식량 생산량이 증가하자 한 가정당 부양가족수가 증가했습니다. 인간의 여성을 둘러싼 환경이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업 사회로 변하자 아이를 갖는 간격이 짧아졌고, 집집마다 아이가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에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인간이 기존 영장류와 다르게 이족 보행을 시작하면서 여성들이 아기를 낳는 신체적 기관이 출산에 불리하게 좁아졌습니다. 그 결과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유사한 수준으로 성숙한 상태의 아기를 낳으려 한다면 출산 공간이 협소하여 산모와 아기 모두 생명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이족 보행을 시작하면서 손이 자유로워진 대신, 자연선택 과정에 의해 다른 동물들에 비해 미성숙한 아기를 낳는 쪽으로 진화했습니다. 다른 동물의 경우 갓 태어나자마자 걷거나 헤엄을 칠 수 있는 것에 비해 인간의 아기는 갓 태어났을 때 눈도 뜨지 못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수렵채집 사회는 여러 면에서 여성과 영유아에게 위험한 점이 많았습니다. 농업 사회에 비해 주거지가 일정하지 않았고, 거주지 사방에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사회 구조는 문명국가의 모습보다는 동물의 집단에 가까웠기 때문에 같은 무리의 남성들도 위험했을 것입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인간의 여성과 아기는 언제든 이동의 가능성을 염두해야만 했기 때문에, 동시에 여러 아이를 돌보거나 자주 임신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농업 사회로 전환되고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위와 같이 수렵채집 사회에서 아이를 기를 때 발생할 수 있는 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해소되었습니다. 거주는 일정한 구역 안에서만 이루어지자 거주의 이동이 제한적인 아이들과 임산부가 안전해졌고, 집 주변으로 숲이나 황야가 아닌 농경지와 다른 인간들의 집이 늘어나면서 동물과 자연환경에 의한 위험도 많이 감소했습니다. 농업으로 사회가 크고 체계적으로 발달하면서 치안과 국방의 개념도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영유아 생존율이 상승하는 상황에서 식량 생산량까지 증가하자 각 가정마다 기존보다 더 많은 아이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양가족이 증가하자 농부들은 더 많은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부양가족이 증가한 만큼 각 가정마다 더 많은 식량이 필요했지만 사람이 늘었다고 알아서 식물이 더 잘 자라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해낼 수 있는 방법은 더 넓은 땅을 경작하고 더 많은 노동을 투입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은 다시 더 많은 아이를 낳는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더 많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더 많은 아이를 낳는 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방법은 지금도 많은 후진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악순환입니다. 입에 풀칠을 하기 어려우니 일단 아이를 많이 낳아 더 많은 일을 시키거나 그중에 하나라도 잘 되면 된다는 발상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도리어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노동자의 과잉공급으로 이어져 빈곤이 반복되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보통 경제발전을 이룬 국가들은 이와 반대의 선순환이 동작합니다. 출산율이 낮아지면서 더 적은 아이들이 집중적인 양질의 교육을 받게 되고, 이렇게 교육을 잘 받은 고급 노동자들이 저렴한 급여를 받고 일하게 되면 세계적인 기업들의 많은 공장과 일자리, 자본이 몰려와서 경제 발전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되는 상황에서 엎친데 덮친 격으로 수렵채집 생활에서는 없었던 영양 결핍까지 찾아오게 됩니다. 수렵채집 시에는 다양한 음식물을 섭취하게 되지만, 농업 생활 시에는 제한된 종류의 곡식으로만 식사를 해결해야 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마저도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자 영양 결핍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식량 생산을 늘리기 위해 더 많은 노동을 하자 신체에 과부하도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신체 구조는 20만 년 전 수렵채집 생활에 맞춰진 채로 농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고, 농업이 시작된 이래로 (그리고 마찬가지로 수렵채집 생활을 하지 않는 지금까지도) 인간은 줄곧 허리와 목에 통증을 달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한편, 농업이 시작되자 사회의 구조도 크고 체계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식량을 얻더라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모두 그때그때 필요한 양만큼만 얻어서 소비하였고, 잉여 식량 생산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부족민들에게 상납을 받는 부족의 우두머리라 하더라도 식량을 보관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딱 소비할 수 있을 정도로만 상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농업이 시작되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농업의 대상이 되는 일부 농작물의 결실은 아주 장기간 보관이 가능했기 때문에 잉여 식량 생산물을 부족의 우두머리가 부족민들에게 식량 상납을 많이 받아두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부족의 우두머리는 이렇게 상납받은 식량을 이용하여 부족민들 중 일부를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도록 만들어서 거느렸습니다. 이들은 전문적인 폭력을 휘두르거나, 부족이 더 잘 운영될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고대 사회의 치안과 국방, 행정을 담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더 넓은 땅과 더 많은 부족민을 다스리면 더 많은 식량을 거둬드릴 수 있게 되자 부족 간에 분쟁은 점차 규모가 커졌고, 국가 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기원전 3,000년 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우루크와 같이 인구수가 5만 명이 넘는 대도시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렵채집 시절에는 기껏해야 수백 명을 다스리는 부족의 장 정도가 있었을 뿐이지만, 농경 사회로 넘어오면서 수천, 수만을 다스리는 왕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 구조가 커지고 체계화되면서 농민들에 대한 수탈도 체계화되고, 확대되었습니다. 부족장에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무릇 인간 사회를 이끄는 우두머리 또한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가능한 한 더 많은 욕심을 내라’는 프로그램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에 그들은 더 넓은 땅과 더 강한 힘을 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큰 규모의 군대를 조직해야만 했는데, 이것을 단시간 내에 이루는 방법은 오로지 자신이 다스리는 인간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걷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국가는 체계적으로 그리고 점차 더 큰 규모로 농민들의 잉여 식량 생산물을 수탈해가기 시작했습니다. 농민들은 점차 한 해 농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도 남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고, 어쩌다 농사가 망하기라도 할 때면 비축해둔 식량이 부족하여 부자에게 빚을 지거나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렸습니다. 이처럼 농민들이 병들고 가난한 처지가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농업혁명이 너무나도 성공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농업의 발달로 잉여 식량 생산량이 증가하자 점차 농업에 종사하지 않고 전문적인 직업을 갖는 사람이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모두 동일한 노동을 하여 식량을 생산했고, 서로 같은 물건들을 만들고, 같은 생활을 영위했지만 농업 사회가 되면서부터는 잉여 식량 생산이 가능해지자 모든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누군가는 농사를 짓는 대신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재화를 만들어내고, 그 대가로 농민이 생산한 잉여 식량 생산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재화와 서비스를 사줄 사람이 더 많아야만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사는 도시로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기 시작하자 여기에 더 먼 곳까지 재화를 교환하러 다니는 상인이 모여들고, 왕의 지시를 받는 관료, 군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문명을 나타내는 영단어인 Civilization의 어원이 라틴어로 시민을 뜻하는 Civis에 있듯이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살기 시작하자 문명이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루스 디프리스의 저서 <문명과 식량>에 따르면 현재까지 인류 최초의 도시로 알려진 곳은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근처에 위치한 예리코(Jericho, 성경 속에서 '여리고'라고 부르는 곳)라고 합니다. 기원전 8천 년 경 이 고대 도시에는 약 2,000명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대 도시의 기준으로 보았을 땐 보잘것없는 수준이지만, 수렵채집 사회에서 인간의 집단이 최대 100~150명을 넘지 않았었던 것에 비춰봤을 땐 큰 규모로 성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리코 사람들은 근처 오아시스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고, 여기서 거둬 드리는 식량 생산량이 예리코 사람들을 다 먹여 살리고도 남을 정도가 되자 예리코 사람들 중 일부는 도자기를 굽거나, 보석을 세공하고, 종교 활동을 하는 등 식량 생산과 상관없는 일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전문적인 상업과 교역도 생겨났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수렵채집 사회에는 잉여 식량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전문화된 재화의 생산도 거의 없었기에 수렵채집인 집단 간에 교환할 재화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농업 사회로 전환이 이뤄지고, 잉여 식량이나 전문화를 통한 각종 재화들이 생산되기 시작하자 사람들 간에 식량과 재화의 교환이 이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교환은 점차 규모가 커지고 국제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철기가 만들어지기 이전 시대에 날카로운 무기를 만드는데 요긴하게 사용된 흑요석(화산으로 형성된 유리의 일종)을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 간에도 거래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행위를 두고 훗날 애덤 스미스는 사람들 간에 교환 거래는 인간의 본능이라고까지 평가했으나 사실 그것보다는 사람들이 풍족한 재화를 소유하고 싶은 욕심, 더 나은 삶의 질을 원하는 욕심이 본능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평가일 것입니다.


이상 지급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농업은 그 시작이 미미했으나 결과는 처음 농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결과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더 나은 환경을 만들고, 더 많은 유전자를 복제하고 싶다는 유전자에 새겨진 욕망에 따랐을 뿐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창발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새로운 것을 떠올리는 능력)'과 '되먹임 (어떤 한 가지 사건이 다시 다른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라는 복잡계의 메커니즘이 동작하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문명이라는 수레바퀴가 모습을 드러내고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4. 농업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을까?


이와 같이 농업을 시작할 당시 사람들이 떠올리지 못했던 농업의 부작용을 두고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농업혁명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고 평했습니다.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는 농경 사회 이전의 수렵채집 사회를 '애초에 풍요로웠던 사회'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농업의 시작은 정말 우리가 밀과 쌀 등 농작물에게 당한 사기인 걸까요? 우리의 기억 속에 수렵채집의 방법이 잊혀져서 다시 되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걸까요?


제 의견은 조금 다릅니다. 농업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생물학적 변이가 아닌) 일종의 사회학적 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존과 번식, 더 나은 환경을 바라는 인간의 욕구가 수렵채집의 한계에 도달한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내도록 만들었고, 그것이 인간의 생존 방법에 변이를 일으킨 것입니다. 생물에게 다양한 변이가 발생하여 종이 나뉘듯이 수렵채집이라는 생존 방법에 변이가 발생하여 농업이라는 방법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변이가 발생하여 종이 나눠져도 여러 가지 종들이 서로 공존할 수 있듯이, 수렵채집과 농업 또한 공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환경이 바뀌면 여러 생물 종들 중 적합한 종만이 살아남는 자연선택이 이루어지듯, 인류의 생활양식과 사회 체계가 바뀌면서 자연선택에 의해 수렵채집과 농업 중 바뀐 환경에 더 적합한 방법이 확산되고, 적응하지 못하는 방법이 위축되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은 누군가에 의한 사기도 아니었고, 되돌아갈 길이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후 고대에도, 중세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수렵채집으로 생활을 하는 인간이 남아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합니다.


앞선 글 <생명과 진화는 붕괴를 야기한다>에서도 설명했듯이 [변이 + 자연선택 + 공진화]로 이루어진 진화의 프로세스는 생물학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등 우리가 사는 세상 전반에 걸쳐 계속해서 동작하고 있습니다.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도 사람들의 수요에 의해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방법이 생겨나고(변이),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양한 방법이 공존하거나 가장 적합한 한 가지 방법만이 살아남고(자연선택), 어떤 한 가지가 변하면 연쇄적으로 주변의 모든 것이 함께 변하게 됩니다(공진화)


예를 한 가지 들어보면, 세계 2차 대전 이후 비약적인 경제 발전으로 전 세계적으로 중산층이 증가하고 각 가정에 컬러 TV가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집에서도 방송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거나 지나간 방송을 보고 싶다는 수요가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수요가 생겨나자 1970년대 여러 전자제품 회사들은 기존의 영상 촬영용 필름을 TV에서 볼 수 있게 만든 홈 비디오 제품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수요가 기존에 존재하던 자원과 이용 방법에 변이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처음 만들어진 홈 비디오 표준으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VHS 방식과 소니에서 개발하였으나 결국 시장 점유에 실패한 베타맥스 방식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베타맥스 방식이 화질이나 기술적으로 더 좋고, 출시도 빨라서 VHS 방식에 비해 앞서 나가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홈 비디오 시장 자체가 영화를 집에서도 볼 수 있게 한다는 수요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VHS가 하나의 테이프로 한 편의 영화를 온전히 담을 수 있다는 점(VHS는 최대 3시간, 베타맥스는 최대 1시간 40분)과 기술 표준이 공개되어 더 많은 업체가 참여할 수 있었던 점 등의 장점에 힘입어 표준 경쟁에서 앞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어떤 기술적 우열에 의한 결정이 아닌, 소비자들과 전자제품 생산자들에게 더 적합한 방식이었던 VHS가 일종의 자연선택에 의해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홈 비디오 시장이 형성되면서 영화나 TV 프로그램의 2차 판권 시장이 생겨나고, 비디오 대여점이라는 새로운 산업이 부각되며, 영화관이 살아남기 위해 시설이 더 크고 좋아지는 등 관련 산업 및 인간 사회 전반에 걸쳐 공진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위의 사례와 같이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의 전환 또한 인간의 필요에 의해 변이가 발생하여 새로운 방법이 만들어지고, 자연선택에 의해 더 적합한 방식이 더 크게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농업이 수렵채집보다 인간에게 더 적합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앞서 설명했듯이 농업이 수렵채집보다 식량 생산성이 훨씬 좋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던 것일까요?


<문명과 식량>의 저자 루스 디프리스는 인류가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 전환한 이유에 대해 세 가지의 가설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빙하기가 끝나며 농업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고 식물이 번창하자 인류가 자연스럽게 농업으로 전환을 했다는 가설이고, 두 번째는 다른 고인류가 사라진 상황에서 현생 인류의 인구증가로 인해 수렵 채집의 대상이 되는 동식물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는 가설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농업 생산물의 저장성으로 인해 사회 공동체에 변화가 생겨 사회 지배층에 의해 농업이 강요되었을 수 있다는 가설입니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는 인간이 농업을 발명하게 된 계기에 대해 루스 디프리스의 두 가지 추측 - 간빙기의 시작으로 인한 환경 조성과 인구 증가로 인한 수렵채집의 한계 발생 - 을 중심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식량 생산성 위주의 설명 외에도 인지과학적 측면에서도 농업이 수렵채집에 비해 인간에게 더 적합한 방식이었습니다.


먼저, 우리 인류의 뇌는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불확실성을 극도로 싫어하고, 회피하도록 진화했던 것이 농업으로 전환하게 된 이유일 수 있습니다. 단세포 생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본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가장 최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생존'입니다. 우리의 판단과 행동은 항상 '생존'을 최우선에 두고 이뤄지기 때문에, 우리의 뇌는 무엇보다 편안하고, 안정적이며, 늘 익숙한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지금 현재 충분히 등 따시고 배 부르다면 굳이 모험을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우리의 뇌는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것을 접하거나 낯설고 불확실한 상태에 처할 때 불편한 느낌이 들게 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공포를 느끼게 만들어 가급적이면 그것이나 그 상태를 회피하도록 만듭니다. 예를 들어, 공포 영화를 보면 무서운 느낌을 만들기 위한 효과로 ① 음악과 공간, 사람들의 행동에서 뭔가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이거나, ② 사람의 눈/코/입 등이 우리가 늘 접하는 모습과는 달리 기괴하게 만들어 낯선 느낌이 들고, 조화/균형이 심하게 맞지 않게 하거나, ③ 일상적으로 접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출연시키거나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이와 같이 단순히 눈 앞에 보이는 위험과 불확실성만 싫어하는 것만 아닙니다. 허구적 이야기를 들을 때조차도 원인과 결과가 명확한 이야기를 선호하고,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과 관계가 명확하게 이어지지 않거나 결과가 명확하지 않게 끝나는 이야기를 접할 때면 '에이 이게 뭐야~' 하면서 흥미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2005년 신경과학자들은 상황이 조금만 애매해지거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인간의 뇌에서 편도체(amygdalae)의 활동이 증가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편도체는 뇌의 양쪽 측두엽에 자리 잡고 있는 신경세포다발인데, 위협 수준을 판별하고 공포를 관장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뇌의 보상 반응을 담당하는 배측선조체(ventral striatum)라는 영역의 활동은 줄어든다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의 뇌가 불확실성에 직면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며, 어쩔 수 없이 직면하게 될 때는 심리적 불편함이나 공포를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경과학자 로버트 버턴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확실성 편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와 같은 뇌의 특성이 우리가 수렵채집보다 농업을 더 선호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식량을 얻기 위해 1만 년 전 고대의 숲과 정글 속을 다닌다고 상상해봅시다. 맹독성 벌레와 뱀, 야수들이 언제 어디서 나타나 생명의 위협을 가할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수렵채집 활동을 한다는 건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농업은 뙤약볕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 된다는 단점은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불확실성이 적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근대 이전까지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농사를 짓던 농부들도 수렵채집에 뛰어들 수도 있었습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농업의 식량 저장성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 수렵채집은 아무리 식량을 많이 생산해도 식량을 오랫동안 저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 일을 해야 될 유인이 없었습니다. 수렵채집인은 그날그날 주어진 식량에 만족을 해야만 했고, 이렇게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상황은 가능한 한 최대한 욕심을 내고 싶은 인간에게 불만족스러운 일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농업이라는 새로운 방법이 개발되자 상황이 변하였습니다. 농업으로 식량 생산성이 대폭 개선되고, 이렇게 생산한 식량의 장기 저장이 가능해지면서 내가 일을 더 많이 해서 더 많은 수확을 거두면 더 많은 식량 확보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좀 더 일하면 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다는 특성이 가능하다면 더 큰 욕심을 내고 싶은 인간의 생물학적 욕구에 더 부합했기 때문에 농업으로의 전환이 촉진됐을 수도 있습니다.


앞선 글 <생명과 진화는 붕괴를 야기한다>에서도 설명했듯이 우리는 스스로를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특별한’ 생명체로 생각하지만, 사실 인간 또한 다른 동물과 다르지 않은 유전과 진화를 거듭하는 자기복제기계입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궁극적으로 본인의 생존과 번식, 그리고 더 나은 환경을 확보하는 것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에는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개체들과 비교하고 경쟁하며, 더 많은/더 나은 것을 추구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있습니다. 이 기본적인 프로그래밍 덕분에 각 생물 종들은 궁극적으로 더 적합한 유전자가 더 많이 번식하고, 진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이유에서 우리 인간에게는 더 큰 욕심을 부릴 수 없는 수렵채집 방법보다는 노력하면 더 큰 욕심을 채울 수 있는 농업이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글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주제입니다만,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번영하는 인간 사회에는 공통적으로 사유재산의 보장과 공정한 경쟁이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물론 농업이 시작된 이후 농민들은 점차 가난해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농업의 단점이었다기보다는 앞서 설명했듯이 농업으로 인해 파급된 효과로 인해 농민들에 대한 수탈이 가혹해졌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자신이 살던 국가에 의해, 때로는 다른 국가의 침략으로 인해 수탈이 가혹해질 때면 농민들은 아예 농사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고, 농업 생산성도 극히 낮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견실한 농민도 열심히 일해도 먹고살기가 힘들 정도로 수탈이 심해지면 농업을 포기하고 다시 수렵채집인으로 돌아가거나 유랑민 또는 도적이 되곤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수탈이 없었다면 농민들은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은 것을 얻어 더 행복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이 수렵채집에서 벗어나 농업으로 전환했던 것은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한 것도 아니었고, 되돌아갈 길이 없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선택했던 길이었고, 더 나은 방법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기를 당한 것이다”라는 표현이 쓰일 정도로 부정적인 파급효과 또한 클 것이라고 예상했던 인간은 한 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결국 인간의 장기 예측 능력이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였습니다. 앞선 글 <생명과 진화는 붕괴를 야기한다>에서도 설명했듯이 인간의 생물학적 기능은 조금씩 변하긴 했지만, 크게 보았을 땐 20만 년 전 현생 인류가 처음 등장했을 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본능과 능력은 아직도 20만 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0만 년 전 위험이 가득한 숲과 정글, 들판에서 수렵채집을 하며 살던 인간에게는 장기적인 비전을 세우고 10년 후 미래를 예측하며 사는 것이 중요했을까요? 아니면 당장 눈 앞에 위험을 피하고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찾는 것이 더 중요했을까요? 고대인에게도 장기적인 미래는 중요했겠지만, 그보다는 당장 눈 앞에 위험을 감지하고 먹을 것을 찾는 것이 더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지능력에서 무언가를 심사숙고하고 장기적인 예측을 하는 능력은 크게 발달하지 못하고, 감정과 직관에 의해 빠른 추리와 결정을 내리는 능력은 크게 발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감정과 직관에 기반을 둔 ‘빠른 추리와 결정’은 우리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한편,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장기적인 예측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 또한 인간의 장기적인 예측 능력이 발달하지 못한 한 가지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20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뿐만 아니라 수많은 생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가고, 동시에 수십억 가지 사건이 벌어지는 아주 복잡한 시스템입니다. 어떤 한 개체의 행동이 다른 수많은 개체들에게 영향을 미치면, 이 개체들이 다시 또 다른 개체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고, 이런 식으로 파급이 퍼져나가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뉴욕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했더니 중국에 태풍이 오는' 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파급 효과를 일일이 생각하다가는 우리는 예측만 하느라 몇 날 며칠을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해야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어려운 목적에 부합되는 생물학적 변이가 발생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5.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


사실 저를 포함하여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알고 싶은 것은 인간은 장기 예측 능력이 부족하다는 한탄에서 끝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뻔한 이야기지만 투자라는 행위는 결국 장기 예측 능력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으므로,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인간이 장기 예측 능력이 부족하다는 건 나 자신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 일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까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예측하는 완벽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완벽한 방법은커녕 유용한 방법조차도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일기예보, 의학 등 고려해봐야 되는 변수의 ‘종류’가 많지 않고(변수가 적다는 것이 아닌 종류가 적다는 것), 수치적 계산 방법이 어느 정도 정립이 되어있는 일부 영역에서는 수치적 계산 능력이 인간보다 월등히 앞서는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예측 능력에 아주 큰 진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아직까지도 어떤 변수의 종류가 있는지도 파악이 안 되고, 수치화하기 어려운 영역에 있어서는 예측 능력이 좀처럼 향상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머신러닝 방법으로 도약을 꿈꾸는 인공지능 기술이 그 어마어마해 보이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아직까지 게임에서나 간신히 뭔가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결국 컴퓨터가 수치적 계산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게임 이외의 분야에서는 예측을 위해 어디서 어떤 걸 봐야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임은 그 목적과 승패 조건, 이기기 위한 규칙, 수치화 등이 명확하게 정리되어있기 때문에 계산능력이 향상될수록 예측 능력 또한 향상될 수 있는 영역이었습니다.


사실 예측이 어려운 것은 우리가 소위 전문가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예측에 대해 장기간 연구한 와튼 스쿨의 필립 E. 테틀록 교수는 전문가들의 예측 능력이 다트를 던지는 침팬지보다도 못한 수준이지만 예측에 대해 일일이 검증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이러한 결과가 단지 전문가들만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단지 복잡한 세상에 대해 예측을 한다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예측과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에 대해 1978년 제한된 상황에서의 의사 결정 모델에 관한 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경제학자 허버트 사이먼은 완벽하게 '합리적 선택'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이 완벽히 갖춰줘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설명했습니다.


① 선택 가능한 모든 대안이 완전히 파악되어야 한다.


② 각 대안의 결과를 완벽히 알거나 완벽히 계산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③ 의사결정자가 각 결과의 현재 및 미래 가치를 확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④ 그 결과들이 잡다하고 이질적이더라도 효용이란 일관된 기준에서 비교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현생 인류가 지구에 출현하여 오늘날에 이르는 동안 인류는 달에 사람을 보냈고, 우주 공간에 정거장을 지었으며, 한 번에 도시 하나를 없앨 수 있는 무기를 만들기도 했지만 아직까지도 위 네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허버트 사이먼은 인간이 완벽하게 합리적인 선택을 추구하는 대신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을 발휘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인간보다 더 완벽한 예측과 선택을 할 것이라 기대를 하는 인공지능도 이러한 제한된 합리성 개념을 활용합니다. 2016년 3월 이세돌 9단과의 승부에서 승리를 거둔 딥마인드 사의 알파고는 바둑의 모든 경우의 수를 한 번에 살펴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한 수를 두기 전에, 단 12수 앞만을 내다보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12개의 인공신경망 계층 사용, 이후 업그레이드로 최대 40개 인공신경망 계층까지 사용)


알파고 인공신경망.jpg 알파고가 인공신경망을 통해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본 구조도 예시


그렇다면 이렇게 어려운 미래 예측과 선택을 조금이라도 더 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간혹, 어려운 예측과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의 순간적인 직관과 통찰력을 믿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문가가 현장에서 내리는 결정에 대해 연구하는 심리학자인 개리 클라인과 행동 경제학의 대부인 대니얼 카너먼은 순간적인 직관과 통찰력에 대해 논쟁을 벌인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직관'이란 '패턴'을 인지하는 작업이며, 소방수, 응급 구조 요원, 전투기 조종사 등 규칙적인 패턴이 발생하는 특정 업무에만 국한되어 판단을 내리는 경우에는 이러한 과거의 패턴 인식 작업 즉, 직관이 효과적으로 동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에 규칙적인 패턴이 존재하지 않고, 범위를 한정 지어 좁힐 수 없으며,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참고하여야 하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경우에는 순간적인 직관과 통찰력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심사숙고'라는 프로세스를 통해 결론을 내려야만 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예측과 선택을 위해 테틀록 교수는 자신의 저서 <슈퍼 예측>을 통해 다음의 10가지 규칙을 지킬 것을 권고합니다.


① 질문을 선별해라 - 힘들인 만큼 보상이 뒤따를 것 같은 질문에 초점을 맞춰라. 시계처럼 바라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질문과 지금으로써는 전혀 알 수 없는 질문을 피해야 한다. 예를 들어 현재 2028년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가? 와 같은 질문은 지금으로써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2027년쯤이 되면 2028년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가?를 예측하는 것은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을 수 있는 질문이 된다.


② 다루기 까다로운 문제는 다룰 수 있는 작은 문제로 분해하라 - '우주에는 얼마나 많은 외계 문명이 존재할까?'와 같은 난감한 질문을 받을 경우, 알 수 있는 부분과 알 수 없는 부분으로 문제를 분해해야만 한다. 그 후 알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큰 수치적 접근으로 답변의 범위를 좁혀나간다. 예를 들어, 런던에 사는 독신남이 주변에서 자신의 짝이 될만한 사람의 수를 계산해보는 문제를 살펴보자. 우선, 런던의 인구는 약 600만 명이다. 그중 여성의 비율은 약 50% 며, 독신자의 비율도 약 50%이다. 그중 자신과 맞는 연령대의 비율이 약 20%이고, 대학 졸업자의 비율은 약 26%라고 할 때, 그가 매력을 느낄만한 여성의 비율은 약 5%밖에 안되고, 그 여성들이 독신남에게 매력을 느낄 비율 또한 5% 밖에 안된다고 가정하면, 그중 그 독신남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의 비율은 약 10%이다. 결론적으로 그가 파트너로 삼을 수 있는 여성은 대충 26명이 된다.


③ 내부 관점과 외부 관점의 균형을 맞춰라 -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내가 어느 정도의 시간을 투자하면 해낼 수 있을까? 를 스스로 추리해낸다면 그것은 내부적 관점이다. 이때, 보통 그러한 일이 주어진 사람들이 얼마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서 해내는 것일까를 질문하는 것은 외부적 관점이다.


④ 증거에 대해서는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게 반응하라


⑤ 모든 문제에서 반목하는 원인을 찾아라


⑥ 의심의 정도를 구분하되 그 이상은 구분하려고 하지 말라


⑦ 자신감은 부족해도, 넘쳐도 안 된다. 성급하거나 우유부단하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라


⑧ 실패의 원인을 찾아내되 사후확신편향을 조심하라


⑨ 팀으로 일할 경우, 다른 사람의 장점을 취하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장점을 취하게 만들어라


⑩ 실수의 균형을 잡는 자전거 타기를 터득하라


사회과학 저널리스트인 스티븐 존슨은 위에서 소개한 필립 E. 테틀록 교수의 연구 결과를 포함하여 다양한 예측과 선택에 대한 연구 결과를 종합하여 저서 <미래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를 집필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스티븐 존슨은 예측과 선택이 결국 다음의 3단계 프로세스로 이루어지며, 이때 각 프로세스를 더 훌륭히 수행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생각의 도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①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모든 변수와 가능한 모든 방향에 대한 완전하고 정확한 '지도'를 작성하는 단계입니다.(Mapping)


우리는 어떤 한 결정에 앞서서 알게 모르게 결정과 관련된 변수와 결정 가능한 방향에 대해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뇌가 이 첫 번째 프로세스를 너무도 순식간에 수행하여 마치 첫 단계가 수행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순식간에 어떤 선택을 내렸다고 해서 이 첫 번째 프로세스를 건너뛴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뇌가 스스로 이것을 처리해버린 것입니다.


어렵고 복잡한 예측과 선택일수록 우리의 뇌가 이처럼 자동으로 어떤 한 가지 방안만을 떠올리고 그것을 별 다른 고민 없이 즉시 선택하는 자동화를 중단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뇌는 에너지를 최대한 절약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빠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다양한 상황을 가정하기보다는 무언가 정답처럼 '느껴지는' 방안이 떠오르면 감정의 힘을 이용하여 그것을 즉시 선택한 후 더 이상 다른 대안을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인지적 편향에 휘둘리지 않도록 우리는 의식적으로 최대한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생각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스티븐 존슨은 이러한 방법을 풀 스펙트럼(Full Spectrum)을 확보한다고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은 도구들의 사용을 권하고 있습니다.


영향도(Influence Diagram) 작성 : 단순히 비유적 측면에서 지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림을 그려서 결정에 따른 영향도를 예상해보는 방법입니다.


미중 무역전쟁에 대해 작성해본 영향도


공동 심의(Collaborative Deliberation) 제도 운영 :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해당 사안에 이해관계가 걸리지 않은 독립적인 입장을 가진 전문가들로 이뤄진 협의체를 운영하여 다양한 관점의 다양한 생각을 확보하는 방법입니다.


불확실성에 집중하여 최대한 줄이되, 인정하고 수용할 것 : 결정에 앞서 100% 확실한 예상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너무 늦을 수 있기 때문에 기간을 정해놓고 불확실성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노력하되 그것이 불확실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조심하는 방법입니다. 아마존의 CEO 제프 베조스는 불확실성과 씨름하며 결정을 내려야 할 때 70%의 법칙을 적용한다고 합니다.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100% 확신이 들 때까지는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불확실성의 수준이 30%까지 내려간다면 주저하지 않고 결정을 내리는 방법입니다.


기존 가정과 상반되는 증거를 수집할 것 : 기존의 가정과 상반되는 증거를 찾으려고 할 때 오히려 그 해석을 더욱 강화되는 증거가 도출될 수 있습니다. 어느 쪽 방향이든 해석을 거듭할수록 상황을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방안에 대한 찬반 투표를 피할 것 : 1980년대 오하이오 경영 대학원의 폴 너트는 미국과 캐나다에 존재하는 공공 조직과 민간 조직에서 내린 78가지 결정을 분석한 결과, 연구 대상 중 15%의 경우에만 의사결정자들이 처음에 제시된 방안들 외에 새로운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구했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폴 너트는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대부분의 조직들에서 의사 결정을 할 때 29%의 경우 만이 한 가지 이상의 대안을 숙고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고도화된 조직들의 의사 결정에서 조차도 3개 중 2개의 빈도로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 같은 의사 결정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최대한 많은 방향을 떠올려보는 것이 목표이므로 이와 같은 한 가지 방안에 대해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식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반직관적인 사고 실험을 사용해 볼 것 : 칩 히스/댄 히스 형제는 저서 <자신있게 결정하라>를 통해 위와 같은 1가지 방안에 대한 찬반투표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반직관적 사고 실험'을 제안합니다. "가령 당신의 조직이 유일하게 결정할 수 있는 방향이 A라고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면 A가 온갖 장애물로 봉쇄된 세계를 상상해보자. 당신이라면 그런 경우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식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면, 우리가 매우 많은 선택지 중에서 작은 부분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극단적인 주장도 고려해 볼 것 : '흑인과 백인,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 세상', '모든 종교의 자유', '인간을 제외한 동식물까지 배려한 친환경적 개발' 등등은 모두 한때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공격을 받았던 주장이었으나 이제는 많은 국가에서 보편타당한 이야기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당장은 극단적으로 보이는 주장도 생각을 달리 보면 극단적이지 않은 방향일 수 있습니다.


외부자의 의견을 경청할 것 : 결정 과정에 동참하던 기존 사람들은 특정 방안에만 국한되어 고민하는 프레임에 갇힐 가능성이 높으므로 우리는 때때로 외부 인물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파악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 개방적으로 받아들일 것 : 우리는 어떤 의사 결정이나 예측을 하다가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한 지식이 나올 때는 그 부분의 중요성을 축소하거나 아예 무시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② 예측과 선택의 두 번째 단계는 관련된 도출된 변수를 고려하여 그 하나하나의 방향이 지향하는 결과를 '예측'하는 단계입니다.(Prediction) 다양한 관점의 생각과 방안들을 모아 지도를 그렸다면, 이번에는 그것들이 어떤 파급효과를 낳을지 시뮬레이션해보는 단계입니다. 다음은 예측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입니다.


뇌의 '디폴트 네트워크' : 우리는 흔히 우리의 몸이 아무런 일을 하지 않을 때나, 멍 때리고 있을 때, 아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 때는 뇌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우리가 아무런 일이나 생각을 하지 않을 때조차 스스로 기존에 수집된 정보를 활용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도 어떤 문제에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을 하다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딴짓을 하거나 멍 때리던 중 불현듯 어떤 아이디어가 결론이 도출되는 경험을 해보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창의성과 집중에 관한 인지심리학으로 유명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그의 책 '창의성의 즐거움'에서 창의성이 발휘되는 과정을 호기심 - 아이디어 잠복기 - 깨달음 - 여과과정 - 완성의 5단계로 설명하였는데, 바로 산책과 샤워, 잠, 명상 등의 행동이 아이디어 잠복기와 깨달음 단계에서 정보들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몇 해 전 교토 여행 시 '철학의 길'이라는 장소를 둘러본 적 있었는데, 일본의 대표적 철학자이자 교토대 교수였던 니시다 기타로와 1981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후쿠이 겐이치 교수가 바로 이 '철학의 길'에서 산책을 하던 중 아이디어를 많이 떠올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후쿠이 겐이치 교수는 노벨상 수상의 비결로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혹은 산책하면서 드는 생각을 메모해라. 사색하기 좋은 경사가 약간 있는 곳을 걸어라."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무작위 대조 실험 : 대조군을 설정하여 실험하는 것은 어떤 방법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내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무작위 대조 실험의 도입으로 현대 의학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투입할 수 있는 자원의 한계로 모든 의사 결정에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수 있습니다.


앙상블 시뮬레이션(다중 시뮬레이션) : 기상예보의 예측력을 획기적으로 높여준 방식으로, 현재 기상의 초기 조건을 측정한 후, 수백 혹은 수천 가지 방향으로 예측하고 각 예측에서 초기 조건을 약간 변형한 결과, 예컨대 기압을 몇 단계 낮추거나 기온을 몇 도쯤 올린 결과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는 방법입니다. 시뮬레이션의 90% 이상에서 허리케인이 속도를 올리며 북동쪽으로 이동한다는 결과가 나오면 기상 전문가는 허리케인이 속도를 올리며 북동쪽으로 이동할 확률이 높다고 예보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일정한 수치화 계산 방법이 도출된다면 이 방법이 대세가 될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워 게임 / 게임이론 :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전쟁 양상을 시뮬레이션해보기 위해 만들어진 방식으로, 앙상블 시뮬레이션과 같이 수치화된 계산 능력은 없지만 앙상블 시뮬레이션과 같이 매번 다른 전략을 사용하는 다양한 결정들을 반복해서 시뮬레이션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시나리오 플래닝(스토리텔링) : 복잡한 결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불확실성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방법으로, 불확실한 미래가 전개될 방향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서구 문화권에서 물질주의가 확대되면 고급 원예 도구 시장도 커질 것이다.', '파키스탄이 미국의 헬리콥터가 몰래 침입한 것을 눈치채면 미국의 헬리콥터를 파키스탄 영공에서 쫓아낼 것이다.'와 같은 이야기가 바로 간단한 시나리오 플래닝의 예시입니다. 이 또한 앙상블 시뮬레이션과 같은 수치화된 계산은 불가능하지만 워 게임과 같이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사전부검 : 우리는 흔히 어떤 일이 발생하고 나면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찾아보는 사후부검을 수행하곤 합니다. 사전부검은 위에서 소개한 개리 클라인이 고안하고, 대니엘 카너먼이 알린 방법으로 사후부검과 반대로 어떤 한 사건의 결과를 미리 정해두고, 그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계획을 세울 때 계획이 이미 실패했다고 가정하면서 그 계획이 왜 실패했는지 설명을 해보면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어떤 어려움이 존재하는지 알아보고, 이를 극복하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레드팀 운영 : 레드팀은 워 게임에서 적군의 역할을 부여받은 팀에서 유래한 것으로 워 게임과 시나리오 플래닝이 혼합된 기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은 먼저 몇몇 선택 가능성을 생각해내고, 각 선택 안에 따른 결과까지 상상해본 후 동료들에게 그들이 시장에서 적이나 경쟁자라면 어떻게 반응하겠느냐고 물어보는 방법입니다. 미군에서는 9/11 테러 발생 이후 2003년 국방과학위원회의 특별조사단의 권고로 레드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소설 : 거짓이라도 무엇인가를 추측해보는 재주, 특정한 방향을 선택할 때 그 결과가 어떨지 이야기를 꾸미는 재주는 현생 인류의 특기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이야기의 종합인 소설은 역사적인, 또는 가상의 사례를 참고할 수 있게 해주고,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미래에 대해 함으로써 미래를 예측할 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스티븐 존슨은 뇌의 '디폴트 네트워크'가 멀지 않은 미래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계와 같다면, 소설은 아주 먼 우주를 바라보는 허블 망원경이라고 비유를 합니다.


또한,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저서 <어떻게 미래를 예측할 것인가>를 통해 과거의 문학들이 이미 현대 사회를 예측했던 바와 같이 현재의 문학들이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해당 저서에서 그는 문학과 더불어 음악 또한 미래 예측 기술을 배우는 학습기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흥미로운 제안을 하기도 합니다.


▶ 비록 이 책에 제시하고 있는 방법은 아니지만 미래에 대한 예측 기법으로 델파이 기법, 퓨처스 휠 기법, 교차영향분석 기법, 환경 스캐닝 기법 등도 등도 있습니다.



③ 예측과 선택의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를 기준으로 다양한 결과를 비교하고 검토하여 하나의 방향을 '결정'하는 단계입니다.(Decision Making) 앞선 두 단계에서 우리가 많은 선택 안을 찾아내고, 각 선택 안의 결과를 최대한 시뮬레이션해보았다고 하더라도 선택을 내리는 것은 자동으로 이루어지거나 누군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방향들을 생각해보고, 그 방향이 어떤 파급효과를 일으킬지 예측해 보았다면 결국 나만의 기준으로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를 판단하여 선택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것이 공적인 선택이라면 정치철학자 제러미 벤담의 이야기대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기준으로 판단하여 선택을 내려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스티븐 존슨은 크게 '가치'와 '위험' 두 가지를 꼽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우리의 생존에 가시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경우에는 '위험'에 무게를 두고 판단을 내려야 하고, 우리의 생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예상되는 미래 모습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가치'가 우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 어떤 가치에 우선순위를 두고 가중치를 더 부여할 것인지, 어떤 위험이 더 중요하고 가장 먼저 피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결정해야 될 문제가 '가치'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 '위험'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에 따라 다음의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선형적 가치 모형(Linear Value Modeling) : 앞선 단계에서 진행한 모든 가능성에 대한 지도를 작성하고, 그 방향이 지향하는 결과를 정리한 후, 각 선택 안들과 그 선택에 따라 예측되는 결과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여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에 따라 가중치를 부여하여 계산한 결과, 결국 가장 높은 점수를 얻는 선택 안을 고르는 방법입니다.


선형적가치모델 예시.png 결혼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를 두고 따져본 간단한 선형적 가치 모형의 예


불편한 사건표 : '위험'에 중점을 두고 위험의 규모와 확률을 파악하여 점수를 매기는 방식입니다. 아래의 예시는 구글이 만든 자율주행차의 불편한 사건표를 흉내 내 본 것입니다. 마주 오는 자동차와의 충돌은 확률이 극히 낮지만 위험 규모가 아주 큰 탓에 위험값이 높으며, 갑작스러운 끼어들기는 확률이 높은 대신 위험 규모가 작아 위험값이 작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표를 통해 우리는 어떤 한 가지 결정에 놓여있을 때 어떤 것이 최악의 결정인지 막연한 감을 통한 판단이 아닌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불편한사건값 예시.png 자율주행차의 선택에 대한 기준 수립을 위해 작성한 간단한 불편한 사건표의 예


이상 미래 예측과 선택을 위해 참고할만한 서적들의 내용을 아주 간략히 소개해보았습니다. 위와 같은 도구들도 중요하겠지만, 사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쩌면 자크 아탈리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이야기한 '일단 미래를 한번 예측해보는 것' 일지도 모릅니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이다"라는 앨빈 토플러의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저는 위에 소개된 미래 예측 / 선택 방법론이나 도구는 아니지만 투자에 대한 미래 예측 / 선택 시 고려하는 저만의 몇 가지 생각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① 적당히 먼 미래를 예측한다.


주식 투자 경험이 많으신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신 이야기겠지만 주식 투자를 할 때 매일매일의 주가를 예측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어떤 날은 좋은 소식에 가격이 상승하고, 어떤 날은 좋은 소식에도 가격이 떨어지는 일들이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 발생하는 곳이 바로 주식시장입니다. 기술적 분석 투자가들이나 퀀트 투자자들은 주식 가격의 움직임만으로 단기간 내 상승 확률이 높은 경우를 찾아 투자를 하기도 하지만, 그 확률은 그리 높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반대로 너무 먼 기간을 예측하는 것 또한 불가능합니다. 비즈니스 환경과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지나치게 누적될 경우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변화가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처음 애니악이 발명되던 순간에는 10년 후 더 좋은 컴퓨터가 발명될 것이라는 것은 기대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이 지금의 스마트폰과 같은 형상으로 발전하여 우리 삶의 모든 면을 디지털화할 것이라고는 쉽게 상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너무 가깝거나 너무 먼 미래를 예상하기보다는 적당한 수준의 미래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건설적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구체적인 예측을 한다면 가깝게는 몇 개월 이상을, 멀게는 10년 이내를 예상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직 규모가 큰 곳의 선택과 행동은 아무리 빨라도 최소한 며칠에서 몇 주 단위의 시간이 필요하며, 10년 이상의 먼 미래에는 너무 많은 변화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으로 돌아가 10년 후인 오늘날을 예측한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기업과 산업, 국가, 글로벌 측면에서 각각 한 두 가지 정도의 큰 사건과 변화가 있었지만 흐름이 완전히 바뀔 정도로 큰 사건이나 변화가 몇십 가지나 발생하지는 않았습니다. 1980년에 1990년을 예측하고, 1990년에 2000년을 예측하는 식의 예측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범위 안에 들어올 수 있겠지만, 1980년에 2010년을 예상하는 건 미래 학자라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예측을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앞서 소개한 스티븐 존슨은 저서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에서 10/10의 법칙으로 소개한 바 있습니다. 10/10 법칙이란 새로운 플랫폼이 만들어지는데 1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고, 그 방식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데 또 10년이 걸린다는 이론입니다. 20세기 이후 인간 사회에서 대부분의 신기술/신제품/신플랫폼은 이처럼 10/10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너무 조급하게 바로 코앞을 내다보려고 할 필요도, 너무 먼 미래까지 미리 예측해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렴풋하게나마 우리가 볼 수 있는 범위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당장 눈 앞에 투자자산의 가격 변화는 알 수 없습니다. 그 투자자산이 먼 미래에 어떻게 될지 알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투자자산의 '가치'를 정확하게 읽었다면 아주 멀지 않은 미래에 가격이 가치에 수렴하리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② 변하지 않는 것에 집중한다.


일본의 성공한 스타트업 창업자 사토 가츠아키는 저서 <내가 미래를 앞서가는 이유>를 통해 인류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테크놀로지를 종합해보면 그 본질은 (1) 인간을 확장하는 것, (2) 인간을 교육하기 위한 것, (3) 손바닥에서 시작해서 우주로 넓혀 가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테크놀로지의 본질이 이 3가지라는 것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확실히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정신없이 바뀌는 세상의 이면에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필요와 욕구가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흔히 '앞으로 10년간 무엇이 바뀌게 될 것인가?'를 질문하지만 그보다는 '앞으로 10년간 무엇이 바뀌지 않을 것인가?'를 질문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아마존은 '저렴한 가격', '폭넓은 선택', '빠른 배송' 등 시간이 얼마가 지나든 변하지 않는 고객들의 요구사항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아마존이 왜 그렇게 사업을 확장해나가는지, 인공지능과 무인화, 자동화, 드론 등을 연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효과적으로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변할 것인가?' 보다 '어떤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인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인류는 10년 후에도 변함없이 생존과 번식, 더 나은 환경을 갖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이를 위해 더 값싼, 더 쉬운, 더 편한, 더 빠른 방법과 재화를 원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더 값싼 재화를 만들기 위해 공장은 점차 자동화되어 생산비용이 절감되고, 1인당 생산성이 높아지지만, 점점 제조업 일자리가 감소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감소되는 제조업 일자리로 인해 유휴 인력이 점차 서비스업으로 유입되고 덕분에 서비스업에서는 더 저렴한 비용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③ 가능한 한 많은 패턴을 익혀둔다.


2016년 3월에 있었던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결은 컴퓨터 기술의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대결이었지만, 의사결정 방법이라는 측면에서도 무척 흥미로운 대결이었습니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이 사용한 방법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알파고는 우선적으로 바둑 기사들이 펼쳤던 기보 데이터를 이용하여 학습을 하고,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여러 가지 전략을 수행하는 알파고들을 만들어낸 후 스스로 대결하게 만들어 쌓인 기보 데이터까지 이용하여 한 수 한 수 진행이 될 때마다 어디에 두는 것이 승률이 가장 높은 방법인지 계산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세돌 9단 또한 그간 공부해온 바둑의 정석 데이터와 여러 경기들을 통해 쌓아 온 경험 데이터를 이용하여 다음 수를 어디에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지를 최단시간 안에 계산해내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기보를 사용하든, 정석을 사용하든 이것은 결국 기존에 있었던 패턴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둑의 정석을 많이 익혀둔다는 것은 결국 패턴을 많이 익혀둔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바둑의 기사들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러한 패턴들을 통해 내가 한 수를 두면, 상대가 다음에 어디에 둘 가능성이 높고, 그러면 다시 나는 어디에 두는 것이 가장 최적인가를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러한 패턴을 익혀두는 사전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2007 -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시 연방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벤 버냉키는 대학에서 1929년 발생한 미국 대공황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쳤던 학자였습니다. 덕분에 2007년 하반기부터 미국에 엄청난 금융위기의 조짐이 임박하자, 그는 그간 연구해두었던 방법들을 토대로 금융위기를 막아보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를 아주 빠른 속도로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정치권의 압력과 금융권에 대한 미국민들의 분노로 인해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결국 금융위기의 쓰나미로 이어졌지만, 벤 버냉키가 눈치를 보지 않고 연방준비위원회의 권한을 마음껏 사용하여 리먼 브라더스까지 구제금융으로 구할 수 있었다면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2008년의 금융위기는 그저 조금 거친 파도 정도로 끝났을 것입니다.


기상예보 또한 과거에는 패턴 분석을 활용했었습니다. 초기의 기상예보는 기록과 패턴보다 사람들의 경험을 통한 예측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노인의 신경통이 도지면 곧 비가 올 것 같다" 라거나 "항상 요 맘때쯤이 가장 더웠던 것 같다" 수준의 인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근대에 들어서 날씨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겨지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조금씩 개선되었습니다. "최근 며칠간 온도와 습도, 풍향이 이러저러한 상황인데, 이러한 조건들에 해당할 때 내일 비가 온 경우는 10번 중에 2번이다"는 식으로 역사적 패턴을 활용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지구와 기상에 대한 여러 수리적 예측 공식과 모델이 만들어지면서 단순한 패턴 활용에서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이제는 현재 기상 수치들을 측정하여 과학자들에 의해 수립된 수리적 예측 공식과 모델에 적용한 후 조건들을 조금씩 바꿔보며(예를 들어 온도를 높여보거나 기압을 낮춰보는 등) 수백, 수천 가지 방향으로 기상 상황을 시뮬레이션한 후 이 정보들을 취합하여 최종 확률을 계산하는 소위 앙상블 시뮬레이션이라는 방식의 예측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의 현실 세계를 엄밀히 예측할 수 있는 수리적 예측 공식이나 모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 상황에서는 역사적 패턴을 이용하는 방법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나타나여 곧 투자방법론의 대세가 된 퀀트 투자 또한 이러한 역사적 패턴을 수치화하여 이용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④ 투자를 하기 전에는 최악을 더 많이 생각해본다.


영화 <본 울티메이텀>을 보면 극 중 CIA 국장은 제이슨 본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최선을 희망하며, 최악을 대비합니다" 이러한 정신은 국민을 보호하는 안보 책임자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를 표현한 대사이지만 저는 이러한 준비자세가 투자라는 미래 예측에 있어서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투자자들이 투자를 결정하기 전에는 장밋빛 환상을 꾸곤 합니다. 사실 투자라는 행위 자체가 긍정적인 미래를 믿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행동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미래를 상상하다 보면 장밋빛 환상이 온통 머릿속을 지배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투자를 시작해보면 어떤 때는 이런 장밋빛 환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이도 저도 아닌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최악의 상황으로 흐를 수도 있습니다. 투자 결과가 긍정적이거나 현상 유지가 되면 우리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투자 결과가 최악의 상황으로 흐를 경우에는 냉정한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면서, 그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머릿속은 온통 자괴감과 후회만으로 가득해집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이런 상황이 되면 아무리 경험과 지식이 많은 투자자일지라도 원래의 판단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투자라는 미래 예측을 할 때만큼은 다양한 관점의 의견을 듣는 것과 함께 최악의 상황을 많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미래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전부검' 방법과 '레드팀 운영' 방법과 같은 맥락에 있는 방법으로, 우리의 인지적 편향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입니다. 투자를 하기 전 '만일 회사의 기술 개발이 내 뜻대로 안 된다면?', '다음 분기 실적이 내 예상했던 것만큼 좋아졌음에도 주가가 떨어진다면?', '중국과 미국이 무역협상에서 결국 진전이 없어 결국 미국이 중국산 제품에 대해 관세를 더 많이 부과한다면?' 등의 상상을 해본다면 투자를 하기 전 긍정적인 면만 바라보는 확증 편향을 피하면서 실제 그러한 일들이 발생했을 때 미리 머릿속으로 준비하고 있던 행동들을 빠르게 실행할 수 있습니다.




6. 존속적 혁신과 파괴적 혁신


한편, 농업의 시작은 인류 역사상 발생한 최초의 파괴적 혁신으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혁신(革新)이라는 단어를 자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혁신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상황에서 필요하고,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볼 시간 없이 그저 새로운 것, 새로운 방식이 좋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입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혁신이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되는 것인지를 명쾌하게 설명한 책으로는 클레이튼 M. 크리스텐슨과 마이클 E. 레이너가 지은 <성장과 혁신(The Innovator's Solutio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비즈니스 세계에서 일어나는 혁신은 크게 존속적(sustaining) 혁신과 파괴적(disruptive) 혁신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존속적 혁신은 쉽게 설명하자면 기존에 하고 있던 일들을 더 잘하기 위해 기술을 개발하고, 새로운 방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기존 사업 영역에서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를 더 강화하고, 기존 고객들 중 더 좋은 제품이 나오면 기꺼이 지출을 더 할 의향이 있는 고객들을 타깃으로 하여 더 높은 이윤을 받고 팔 수 있는 향상된 제품 생산에 집중하는 전략입니다. 예를 들면 컴퓨터 부품 회사에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더 비싼 제품을 팔기 위해 고사양의 제품을 만들어내거나, 서비스업 회사에서 품질을 높이고 더 비싸 값을 받는 프리미엄 서비스를 내놓는 등의 혁신이 바로 존속적 혁신의 예입니다.


이에 반해 파괴적 혁신은 기존의 시장에서 이미 시장을 리드하고 있는 기업들과 경쟁하고, 그들보다 더 나은 제품을 제공하려는 시도를 하는 대신, ① 기존 시장에 존재하던 제품/서비스를 사용하지 않던 사람들(비소비 고객층)을 끌어들이거나 ② 성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가격이 훨씬 저렴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전략입니다. 파괴적 혁신을 시도하는 기업들은 기존 시장을 이끌어가던 선도적 기업들과의 경쟁을 피하면서 새로운 카테고리를 창조하거나, 그들이 놓치고 있는 고객을 사로잡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존 기업들이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고객층부터 차근차근 뺏어옵니다. 기존 시장 선도 기업들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 점차 시장의 흐름은 혁신 기업으로 넘어갑니다. 그제야 시장 선도 기업들은 혁신 기업들과 건곤일척의 승부에 휩쓸리고 말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비소비 고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기존 중대형 워크스테이션 컴퓨터에 비해 성능은 낮지만 개인이 집에서도 쓸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든 IBM PC나 성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훨씬 저렴한 제품으로 시장 점유율을 늘려간 미국 시장의 현대자동차와 같은 기업들이 바로 파괴적 혁신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식량을 생산하는 '산업'에서 최초로 사용한 방법은 수렵채집이었습니다. 처음 수렵채집을 시작했을 때는 인구가 적어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땅이 넓었고, 경쟁이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인구가 증가하면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땅이 부족해지자 경쟁이 심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수렵채집 생활을 위해서는 1인당 약 10평방 킬로미터의 땅이 필요했기 때문에 인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식량이 많이 산출되면서 안전한 땅은 육체적으로 힘이 강한 사람들에게 넘어갔을 것이고, 육체적으로 약한 사람들은 더 먼 곳까지 가서 식량을 구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이때, 다른 사람들을 무력으로 이겨서 수렵채집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신체를 더 강하게 만들거나,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수렵채집이 용이한 장소를 찾아내거나 하는 노력은 존속적 혁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렵채집이라는 방법에 국한해서 기존에 하던 것을 더 잘하기 위한 혁신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농업은 기존에 수렵채집과 경쟁을 하지 않는 새로운 방법이었습니다. 농업은 더 적은 땅에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해낼 수 있었고, 수렵채집에 적합하지 못한 신체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도 기존 수렵채집인들과 경쟁하지 않으면서 식량 생산이 가능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졌고,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야말로 농업이 인류가 식량을 생산하는 산업에 파괴적 혁신으로 동작하여 인류의 문명이라는 시장에 점유율을 높여나갔던 것입니다. <사피엔스>에 따르면 농업으로 이행이 일어나기 전인 기원전 1만 년 경 지구에는 5백만 ~ 8백만 명의 방랑하는 수렵채집인이 살고 있었지만, 기원후 1세기가 되자 수렵채집인은 1백만 ~ 2백만 명 밖에 남지 않고 농부들의 숫자는 2억 5천만 명 정도로 증가했습니다.


수렵채집인들 입장에서 농업은 자신들의 식량을 뺏어가는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별다른 위기를 느끼진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농업의 식량 생산력이 빛을 발하자 농업 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증가했고, 농업 사회와 국가는 거대해져 기존 수렵채집인들의 사회를 압도하기에 이르자 수렵채집인들은 큰 위협감을 느껴야만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파괴적 혁신은 기존에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들이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사이 점유율을 늘리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존 시장 선도 기업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시장의 판도가 달라져 있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결국 지구는 점차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뒤덮여갔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렵채집인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명맥이 끊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육체가 더 강하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 중 일부는 수렵채집 생활을 하다가도 추수 철이 될 때면 농업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습격하여 식량을 빼앗아오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농업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도시 주변에 높은 성벽을 쌓고 외부의 침입이 있을 때는 도시로 모여 외부의 적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이러한 도시가 세계 곳곳에 등장하여 그 범위를 넓혀가자, 수렵채집인들은 점차 도시와 농업 국가에 밀려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땅으로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결국 수렵채집인들은 아예 외부와 세계가 단절된 거대한 밀림 또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유목과 같이 농업 이외의 방식으로 생활을 하면서 언제든지 농업 국가의 식량을 빼앗아오는 식으로 변했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역사에서 농업 사회와 농업 사회를 넘보는 세력 간의 충돌은 근대 이전까지 끊임없이 발생하게 됩니다.




7. 인류 사회의 자기조직화 임계성


인류는 농업의 탄생과 함께 문명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시작하여 오늘날 현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시피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식량 부족과 영양 결핍, 전염병의 문제는 인류에게 있어서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고질병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현대 이전까지는 사회가 안정되고 몇 년 간 풍년이 이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많은 아이를 낳았습니다. 농사에는 많은 일손이 필요했고, 근대 이전까지는 영유아 생존율도 낮았기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농업 사회에서는 다산이 미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름진 땅은 한정되어 있었고, 인구가 정확하게 식량 생산량이 늘어난 만큼만 늘어나지는 않다 보니 인구는 식량 생산 한계치보다 더 많이 증가하기 일쑤였습니다. 인구가 많아진 상태에서 어쩌다 농사가 망하기라도 하면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들이 기아와 전염병에 시달리기 일쑤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아와 전염병으로 인구가 감소하면 노동력의 부족으로 임금은 높아지고, 지대와 식량의 가격은 낮아지면서 환경이 개선되어 사람들이 다시 아이를 많이 낳는 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국의 경제학자겸 목사였던 토머스 멜서스가 1798년 <인구론>이라는 저서를 통해 주장하여 당대 유럽 사회에 큰 파장을 끼친 이른바 '멜서스 트랩(함정)'이었습니다. 멜서스는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1, 2, 3, 4, 5, 6...)에 비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경향(1, 2, 4, 8, 16, 32...) 이 있으므로 인간이 종족번식 본능을 억누르고 인구 증가를 억제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때마침 멜서스의 예언이 현실화된 것 같았던 아일랜드 대기근(1847 ~ 1852)이 발생하자 당대 정치/지식인들 사이에 멜서스의 주장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렇게 영향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찰스 다윈은 "우리 후손들은 제한된 양의 식량을 두고 싸우게 될 것이다"는 <인구론>의 주장에서 영감을 받아 <진화론>의 '자연선택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맬서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마블 스튜디오는 타노스라는 철학자(?)를 만들어내게 되는데... (출처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꾸준히 기술을 개발하고,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여 식량 생산량을 늘려갔습니다. 수렵채집의 한계에 도달하자 농업을 발명해냈고, 농업이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품종을 개량하고, 새로운 작물을 기르기 시작했으며, 인공비료를 만들어 비옥한 토지를 만드는 방법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19세기 이후 녹색혁명이라 불리는 질소고정법과 품종 개량 등이 발명되자 식량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오형규의 저서 <보이는 세계 경제사>에 따르면 미국의 농업 생산성은 180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150년간 밀은 20배, 옥수수가 30배 이상 증가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인구 증가는 멜서스의 걱정만큼 극적이진 않아서 1600년 5억 명에서 1800년대 10억 명, 1920년에 20억 명, 1930년대에는 30억 명 현재에는 약 70억 명의 인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인류가 계속해서 혁신 → 성장 → 거품 → 붕괴 → 혁신으로 이어지는 챗바퀴를 굴리는 것을 두고 루스 디프리스는 <문명과 식량>를 통해 인류 문명은 지속적으로 거대한 톱니바퀴(성장)와 도끼(붕괴)가 작동하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인류의 성장이라는 톱니바퀴가 동작하다가도 한계에 도달하면 주기적으로 거대한 도끼가 내려쳐지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은 사람들이 다시 톱니바퀴를 굴린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복잡계 과학에서 설명하는 자기조직화 임계성 현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가 흔히 '나비 효과'라고 부르는 현상으로 대표되는 복잡계 과학은 간단하게 말해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인간과 생물, 지구 환경이 복잡하게 얽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곳이다 보니 세상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어떤 간단한 방정식이나 이론대로 흘러가지 않고 쉽사리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연구하고 있는 학문입니다.


복잡계 과학에서는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융합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보통 복잡계 연구라고 하면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심리학, 통계학, 기상학,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 경영학 등등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학문들을 융합하여 연구하는 방법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왜 '뉴욕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했더니 중국에 태풍이 오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건지, 자동차가 많은 도로에서 사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체 현상이 발생하는 것인지, 주식시장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급격한 가격 변동은 왜 발생하는지 등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덴마크의 이론 물리학자 페르 박은 복잡계에서 작은 사건들이 모여 눈사태와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자기조직화 임계성(Self-organized Criticality)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페르 박에 따르면 수백만 개의 상호작용하는 부분들로 구성된 대규모 복잡계는 어떤 거대한 사건으로 무너질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작은 사건들의 연쇄 반응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는데, 그는 모래더미 은유를 사용하여 이와 같은 현상을 설명했습니다.


자기조직화 임계성 현상을 묘사한 모래더미


평평한 큰 탁자에 모래 알갱이를 하나씩 떨어뜨리고 있다고 상상해보겠습니다. 처음에는 모래가 탁자에 퍼지다가 점차 모래더미를 만들기 시작할 것입니다. 점차 모래더미는 계속 높아지고 사방으로 완만한 경사를 만들게 됩니다. 이때 누군가가 모래 알갱이들을 특정 위치에 일부러 배치하지 않았음에도 모래 알갱이는 서로 맞물리며 모래더미를 만듭니다. 이때 이 모래더미를 자기조직화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래더미가 더 이상 높아지지 못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모래더미는 임계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모래 알갱이가 모래더미에 떨어지면 그 알갱이 하나만 경사면을 타고 흘러내릴 수도 있고, 하나의 알갱이가 불안정한 상태의 다른 알갱이들과 부딪히며 더 많은 알갱이들이 흘러내리게 만들어 모래더미가 무너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결국 모래더미는 불안정한 상태의 모래 알갱이가 모두 흘러내리고 난 후 넓게 평평해집니다. 그 모래더미는 다시 임계치 이하로 내려간 상태가 되고, 다시 모래 알갱이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다시 더 큰 규모의 모래더미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현재까지 인류가 쌓은 지식으로는 모래더미가 언제, 어느 정도 높이에, 그리고 어떤 모래 알갱이로 인해 붕괴가 발생할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붕괴가 발생하더라도 다시 모래더미가 그 전보다 더 커질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에게 수많은 위기가 있었음에도 결국 인류가 살아남는 한 인류의 모래더미는 꾸준히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투자자산이라도 장기적으로, 아주아주 오랫동안 보유하면 언젠가는 수익이 날 수 있다는 이야기에는 바로 이러한 메커니즘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29년 발생한 대공황으로 인해 이후 3년간 미국 주식 시장의 시가총액은 90% 가까이 하락했습니다.(다우존스 지수 기준, 1929년 9월 3일 381.17에서 1932년 7월 8일 41.22로 하락) 세상은 곧 종말을 맞이할 것만 같았고, 유럽의 혼란스러운 상태는 독일에서 히틀러가 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1945년 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고, 2차 대전을 기점으로 미국의 경제도 살아나기 시작해 대공황으로부터 25년이 지난 1954년에는 다시 1929년의 고점을 다시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미국 주식 시장은 계속해서 성장과 붕괴를 반복했지만 결과적으로 최근 다우 존스 지수는 무려 27,000 이상으로 상승했습니다. 제레미 시겔의 저서 <주식에 장기투자하라>에 따르면 1802년부터 2012년까지 주식시장은 그토록 많은 붕괴를 거듭했지만, 그럼에도 다른 투자 자산들보다 높은 연간 수익률을 기록했습니다. (주식 6.6%, 미국 장기 국채 3.6%, 미국 단기 국채 2.7%, 금 0.7%, 미국 달러 -1.4% 순)


이와 같은 사실을 근거로 워렌 버핏을 비롯한 많은 투자의 구루들은 투자를 생업으로 삼는 전문 투자자가 아닌 일반 투자자가 주식 투자를 할 때는 가급적 전체적인 주식 시장에 투자하는 인덱스 투자를 할 것과 시장의 중단기적인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고 인류의 장기적인 발전을 믿을 것을 권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주식 시장이 무너져서 더 이상 회복이 안된다면 그것은 이미 인류 전체가 대 위기를 맞이한 순간인 것이니 어떤 투자 자산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인류가 존속 가능한 이상 인류의 축적된 자산은 모래더미처럼 지속적으로 커지겠지만 중간중간 붕괴는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붕괴는 언젠가 회복되겠지만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불확실성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인류의 발전을 믿는 것이 투자의 시작이자 끝일 수도 있습니다. (후에 기회가 되는대로 성장과 붕괴에 대해서는 다시 자세히 논해보겠습니다.)




8. 농업의 미래


지금까지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통해 미래 예측 방법과 파괴적 혁신, 복잡계의 자기조직화 임계성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우리 인류는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발전되고, 많은 이들이 풍족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아프리카나 가난한 제3세계 국가들이 존재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식량은 이미 전 인류를 배불리 먹일 수 있을 정도로 생산이 되고 있습니다. 다만, 분배 과정의 문제와 전 세계적인 육식의 증가로 인해 인간에게 돌아가야 할 식량이 육류 생산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전히 존재하는 비효율성과 점차 커지고 있는 새로운 문제들로 인해 우리의 앞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여전히 녹녹지 않아 보이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다음은 농업과 관련되어 있고, 장차 멀지 않은 미래에 닥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어려움들입니다.


① 수자원의 부족 -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녹고, 수압파쇄법으로 물을 이용하여 기름을 캐는 셰일오일 혁명으로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담수(바닷물이 아닌 물)의 규모는 꾸준히 감소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까지는 셰일 혁명의 좋은 모습만 볼 수 있었습니다만 수자원 부족이 가시화되면 그때는 수자원 확보가 새로운 이슈로 떠오를 수 있습니다.


수압파쇄법.jpg 셰일 오일을 채굴하는 수압파쇄법에 대한 설명, 수압파쇄법은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많은 물이 필요한 것이 특징이다.


② 육식의 증가로 인한 부작용 - 세계적인 경제성장이 진행되고, 중산층이 증가할수록 육류 소비가 급격히 상승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중국의 성장과 함께 육류 소비가 증가하여 전 세계 곡물 생산량의 30%는 고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브라질과 같은 열대우림을 소유한 개발도상국에서 축산에 사용할 곡물 생산을 위해 밀림을 없애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육류를 소비할수록 우리는 조만간 큰 곤경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③ 기후 변화 - 앞서 빙하기에 대해 잠깐 언급했듯이, 우리가 사는 지구는 사실 기후가 항상 동일했던 것은 아닙니다. 태양을 비롯한 많은 요인들에 따라 지구의 기후는 수시로 요동을 치곤 했습니다.(여기서 말하는 수시는 단 몇 년 정도의 움직임이 아닌 수백, 수천 년 단위를 뜻합니다. 지구의 나이 45억 년 앞에서 수천 년은 수시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지구의 기후는 일정하게 움직이지 않지만 인류의 인위적 행동들로 인해 그 움직임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 더 어려운 상태로 흐르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는 온실가스 효과가 사실이라면 육식의 증가로 온실가스 배출의 50% 정도를 차지하는 소와 돼지들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서 온실효과가 가속화될 것이고, 이 같은 온실효과로 인해 빙하가 녹으면서 빙하 속에 녹아 있던 온실가스 등이 뿜어져 나온다면 지구의 기후는 과거의 기록으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영역으로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장기적 미래 예측 능력이 매우 부족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를 인정하고 우리의 행동이 기후 변화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충분한 논의와 준비를 해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들이 우리의 앞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래 왔듯이 이번에도 다시 한번 인류의 문제 해결 능력이 발휘된다면 어떤 새로운 방법이 나타나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의 문명이 진일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위기는 기회의 반대말이라는 조금은 식상한 이야기도 있듯이 바로 이런 문제 해결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투자 기회를 엿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자신만의 통찰력을 발휘하여 위기에서 기회를 찾아 성공적인 투자를 하실 수 있기를 기원하며 글을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글에서 찾아뵙겠습니다.




# 참고서적 또는 영감을 준 서적


경영학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 석승훈 지음

경제사 오디세이 / 최영순 지음

리스크 판단력 / 존 코츠 지음

매혹하는 식물의 뇌 / 스테파노 만쿠소, 알레산드라 비올라 지음

무역의 세계사 / 윌리엄 번스타인 지음

문명과 식량 / 루스 디프리스 지음

미래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 스티븐 존슨 지음

보이는 경제 세계사 / 오형규 지음

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 지음

생각을 확장하다 / 슐로모 브레즈니츠, 콜린스 헤밍웨이 지음

성장과 혁신 /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지음

스토리 세계사 / 임영태 지음

어떻게 미래를 예측할 것인가 / 자크 아탈리 지음

역사에서 경영을 만나다 / 이재규 지음

왜 상인이 지배하는가 / 데이비드 프리스틀랜드 지음

육식의 종말 / 제레미 리프킨 지음

자신 있게 결정하라 / 칩 히스, 댄 히스 지음

자연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 요제프 H. 라이히홀프 지음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 / 스티븐 존슨 지음

통섭과 투자 / 마이클 모부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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