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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턍 Apr 25. 2024

기다림을 알다

 자신을 믿고 기다렸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뤘다.

“엄마~ 나 학교 안 가면 안 돼?” 

강릉에 이사 온 후 딸은 입을 닫았다. 밥 하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하루 있었던 일을 쉼 없이 이야기하던 딸이 묻는 말에 대답이 없다. 어느 날 학원이 끝난 딸을 태우고 오는데 들릴 듯 말 듯 뱉은 말이다. 고등학생이 학교에 가기 싫다는 말은 엄마에겐 사건이다. 긴 침묵이 흐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남항진 해변으로 차를 돌렸다. 따뜻한 차를 건네며 그네에 앉았다. 깜깜한 바다를 보고 나란히 앉았다. 밤 11시 바다는 멀리 등대와 유도등이 어수선하고 파도 소리는 심란했다. 발로 모래를 지지해 그네를 밀어도 딸의 발은 그냥 멈춰있었다. 나의 발이 홀로 힘겹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갈림길에서 집이 아닌 남항진 해변을 선택했다. 


어느새 밤바다의 불빛이 예쁘고 파도 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딸의 발이 나의 발과 함께 그네를 밀고 있었다. 파도 소리에 맞춰 그네도, 딸과 나의 호흡도 함께 평온해졌다. 딸이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짝꿍이 누군지 물어본다. “손현지.” 반장은 누군지 물어본다. “형선이.” 대답해 주는 것만도 고맙다. 이젠 몇몇 친구들의 이름은 익숙해졌다. 친구들과 오해로 인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랬구나, 엄마가 살아보니 오해를 풀려고 자꾸 설명하면 그 설명이 도리어 또 다른 오해를 낳게 되는 경우가 있더라. 때로는 시간에 맡기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시간?”

“응~ 세월, 기다림”


남항진 해변의 밤 데이트는 주말 낮으로 이어졌다. 함께 그네를 밀던 발은 나란히 안목항을 향해 걸었다. 남항진은 강릉시 동쪽 남대천 하구의 섬석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위치한 포구다. 섬석천을 사이에 두고 커피거리로 유명한 안목항이 있다. 두 곳을 잇는 다리를 놓았는데 이름이 ‘솔바람 다리’다. 솔바람 다리는 대관령에서 내려오는 섬석천과 함께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 어종이 풍부하여 투망과 낚시로 물고기를 잡는 사람이 많다. 펄떡이는 물고기를 보며 잡은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신났다.

 “우와! 도다리예요?” 


두 곳을 잇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아라나비’라는 집라인이다. ‘아라’는 바다의 순수 우리말로 ‘아라나비’는 바다 위를 나비처럼 훨훨 날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집라인을 타며 간간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는데 보는 사람들에게 재미를 준다. 딸과 눈이 마주치며 웃음이 터진다. 남편의 지인 중 체격이 좋은 분이 집라인을 타러 갔다. 보내는 쪽에서 무전기로 물었다. 

“110kg 가능합니까?”

“야~ 한꺼번에 두 사람은 안돼! 한 사람씩 보내!” 

그 이야기를 하며 서로 끌어안고 어찌나 웃었는지 허리를 꺾고 몇 걸음 걷지 못했다. 


가자미를 널어놓은 안목회센터를 지나 커피거리 입구에 있는 카페 앞 의자에 앉는다. 짝꿍인 현지네 빵집의 숙성된 빵이 얼마나 촉촉하고 맛있는지, 반장인 형선이의 리더 십이 얼마나 멋진지 이야기한다. 참 신기한 일이 생겼는데 오해했던 친구의 사과를 들었다고 한다. 친구들이 너무 좋고 학교가 재미있단다. 나도 온 세상이 재미있고 즐거워졌다.


2014년 그해 봄, 딸과 나는 양간지풍의 사나운 봄바람이 시원한 여름 바닷바람으로 바뀔 때까지 남항진 해변에 있었다. 둘이 바다만 보다가, 나 홀로 딸을 보다가,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손을 잡고 걷다가, 끌어안고 웃었다. 거친 풍랑 속에서도 고요한 파도가 있음을 알고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배웠다. 


2023년 딸은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도서관에 가서 밤 12시가 넘어 집에 왔다. 분홍의 꽃망울이 유혹하는 벚꽃축제에도, 유네스코에 등재될 정도로 큰 단오가 집 앞에서 열려도, 경포해변의 페스티벌에도, 강릉커피축제에도 변함이 없었다. 무서울 정도로 반복된 200여 일을 한결같이 지냈다. 자신을 믿고 기다렸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뤘다. 기다림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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