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반에 주인공이 "Form Follows Function"(이하 FFF) 즉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굉장히 유명한 근대 건축의 명제를 읊습니다. 이건 1920년대 독일 바우하우스(종합 디자인학교)의 철학을 담은 발언인데요. 전통, 역사와 단절을 꾀했던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모토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FFF는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한 기존의 전통적인 건축물 대신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현대식 건축물을 추구했기에, 정치적으로는 당시 제국의 전복을 꾀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주의적 가치와 상당히 밀접했습니다. 전통적인 형태를 거부하고, 시각적 순수성과 공간/기능의 합목적성 그리고 규격화와 표준화, 공업생산/경제성 등을 표방했거든요.
초반에는 구조주의/사회주의의 공공성을 중시하다가 나중에는 좀 더 자유로운 표현주의로 넘어가려는 찰나! 나치에 의해 강제폐쇄 되면서 바우하우스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미국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현대건축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영화 <오펜하이머> 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독일의 유대계 과학자들과 비슷한 케이스라 할 수 있을듯요.)
베를린궁은 현대에 들어와형태(껍데기)는 옛 제국시대의 모습을 복원하고, 안의 기능(내용)만 바뀐다는 측면이 있습니다. 게다가 오히려 동독의 공화국궁으로 인해 망가진? 근대적인 껍데기를 역사박물관이라는 기능에 맞게 새로운+옛것으로 재건하는 측면이 있지요. 어찌보면 지속적으로 시대와 FFF가 불일치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베를린궁/전통건축이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참고로 (구)남친은 운디네의 제복, 즉 Uni-Form을 보고 그녀가 섹시하다 말하는데요. (현)남친은 운디네가 도슨트를 연습하는 본업인 Function을 보고 그녀가 지적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전남친이 반했던 섹시한 형태의 유니폼은, 본래 현남친이 반한 지적인 도슨트 기능을 하려고 입는 옷이지요.
즉, 두 남친(동독/서독)들이 운디네(베를린궁)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관점은 형태를 보고 있느냐, 기능을 보고 있느냐의 부분에서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을 듯요. 그런데 과연 운디네란 존재의 가치는 형태적인 섹시함과 기능적인 지적임이 그저 전부인 걸까요?
도시개발의 과정1 : 주인공들의 잠수
물은 본원의 장소(메기가 사는)이자, 변화하고(잠수/세례)묻어버리는 곳(요단강/삼도천)이란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있는 듯합니다. 어느 도시든 도시역사박물관에 가보시면 라인강/한강/O강 유역에서 모여살기 시작했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도시 문명은 대게 강 주변에서 생겨납니다. 특히 물을 어떻게 다스리는지(치수)가 도시개발의 가장 큰 관건이라 할 수 있는데요. 고대의 메기나, 댐, 남주인공의 직업이 산업잠수사로 등장하는 건 이와 관련있을 것 같더군요.
영화 속에서 메기는 제국 이전부터 존재해온 이 땅의 전설적인 존재라고 나오더군요. 독일 니벨룽겐 전설 속 독일영웅 군터에서 따온 듯 한데, 우리로 치면 단군 할아버지 같은 존재일 듯합니다. 아니면 강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를 어머니로 둔 고구려의 주몽 설화와 비슷할지도... 어쩌면 메기 군터는산업화되기 시작한 근대도시의 역사 그 이전부터 간직해온... 즉, 초창기에 자연과 함께 살아왔던 도시의 신화적인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댐이란 도시개발을 위해 과거 자연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근현대적인 토목 공사라 할 수 있습니다. 남주인공이 하는 잠수라는 행위는 도시의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과거에 습지를 개발하려고 물을 막아놓은 댐을 관리하는 작업인데요. 동시에 도시의 근원으로 내려가 자연+전통 덕분에 생기발랄해지기도, 때로는 자칫 그에 잠식되기도 하는 등의 복합적인 행위일 듯하네요. 즉, 산업잠수사라는 크리스토프의 직업설정은 현대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 과거로부터 밀려드는 홍수를 계속 막아내거나 건져 올리는 걸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서양에서 잠수는 종종 세례(baptism)를 은유하곤 하는데요. 때문에 물은 도시 태동의 젖줄, 근원지이자 변화하기 위해 들어가는 문(door)과도 같단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잠수가 변화하기 위한 세례와 같다면, 와인은 영성체/성찬에 의한 동일화를 은유한 걸지도...) 그러나 운디네는 결국 (구)남친을 익사시키고, 자신 또한 인어공주처럼 물로 돌아가는군요.
도시개발의 과정2 : 주인공들의 심정지
도시란 전쟁이 나지 않는 이상 완전히 파괴하고 새로 만든다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옛것을 간직하면서도, 도태되지 않도록 현실에 맞춰 계속 변모해야 하지요. 역사적인 건축물들의 파괴와 재생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공사 중일 땐 잠시 기능을 멈추는 즉 심정지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일부 시대에 맞지않고 보존할 가치도 없다고 여겨지는 건축물은 아예 끝장내(철거해)버리기도 하구요.
마치 운디네가 베를린궁을 은유하고 구/현 남친들은 시대를 은유하는 것마냥, 역사박물관을 기능에 맞게 복원하는 도중에(FFF :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주인공들은 잠수하거나, 부러지거나, 심정지하는 순간들을 맞이합니다. 건축적으로는껍데기(Form)와 속의 기능(Function)을 상대방에게 서로 맞춰가는 순간들이지 않을까 합니다. 즉,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잠시 공사중인 것이지요. 도시/건축적인 시각으로 운디네의 연애사를 따라가면, 생각보다 이러한 메타포가 더욱 서글프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아래의 메인 포스터 이미지는 (현)남친의 품에 기대어 걸어가다, 다시 (구)남친을 보자 잠깐 심정지하는 순간인데요. 운디네는 초반에 내가 살아남기 위해, 네가 날 떠난다면 난 (구)남친인 널 죽여야한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결국 분을 삭히지 않은 상태에서 관계 정리도 미처 하지않은 채, (현)남친을 만나는 사고가 일어나지요. 운디네는 수조(=베를린장벽)가 와장창 깨지면서 물폭탄+유리파편과 함께 크리스토프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운디네가 양다리 비슷하게 걸친 상황은 마치공화국궁이 인체에 유해한 석면 문제로 한창 이슈가 된 다음, 통일 직후에 이 공화국궁/베를린궁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나 논란이 일었던 과도기적 시기(1990~2008년)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참고로 크리스토프가 기차역에서 깜빡 졸았을 때 본인은 3분만 지난줄 알았지만 실은 25분이나 졸았는데요. 베를린궁이 있던 곳에 공화국궁이 세워져 25년간 이용되었고, 공화국궁의 철거기간은 2006년부터 2008년까지 2~3년 걸렸습니다. 묘하게 여기에서 둘의 시각차가 드러나는 듯 하네요.
⦁ 1951~1973 : 베를린궁 철거후 빈땅(12년)
⦁ 1973~1976 : 공화국궁 준공한 시기 (2~3년)
⦁ 1976~1990 :공화국궁이 있던 시기(25년)
⦁ 1990~2003 :석면문제로 비운 시기 (13년)
⦁ 2003~2006 : 잠시 출입가능한 시기 (2~3년)
⦁ 2006~2008 :공화국궁 철거한 시기(2~3년)
⦁ 2008~2020 : 베를린궁 복원한 시기 (12년)
⦁ 1990~2020 :출입금지된 시기(30-3년)
참고로 독일이 통일된 1990년부터 석면 제거작업을 위해 이곳은 약 27~30년간 출입금지 되었습니다.
새로운 남친을 따라 들어간 물 속에서 운디네는 메기를 발견하곤 잠수 도중 심정지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곧 남친이 그녀를 물에서 건져 인공호흡을 하자 숨이 돌아오지요. 운디네가 심정지했을 때 (현)남친이 심폐소생술을 하며 부르는 구호이자 노래가사인, "Staying Alive"는 "살아있어줘!!" 라는 뜻입니다. 영화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나 장소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묘하게 공허한 외침처럼 들리는군요. 전 왠지 베를린궁을 시대에 맞게 심폐소생시켜 현실에 말뚝 박아놓으려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한편, 남친이 선물해준 그를 닮은 잠수사 피규어는 다리가 부러지지만, 운디네가 잘 이어붙여 놓습니다. 마치 현대에 적응해 살아남으려는 베를린궁처럼 수조 속에 있던 피규어는 과거~미래를 잇는 기억의 조각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기도...
나중에 운디네는 자신의 임대주택 안에서 남친이 불러준 "Staying Alive"(살아있어!)라는 가사를 마치 "그래 살아볼게!"라고 화답하는 것처럼 흥얼거려봅니다. 하지만, (구)남친에 대한 미련으로 잠깐 심정지됐던 그녀를 보고 (현)남친이 전화로 원망(했다고 착각?)하지요. 동시에 남친은 잠수하던 도중 마치 그 피규어처럼 다리가 끼어 기나긴 뇌사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크리스토프가 물 속에서 산소공급이 안된 게 12분이었는데요. 공화국궁을 철거하고 베를린궁을 완공하기까지 약 12년이 걸렸다는 게 문득 떠오르더군요. 음... 오히려 남친은 대과거, 즉 전통이란 무게감에 잠식당해 버린 걸지도... (참고로 전통건축의 복원 관련 이슈에서도 자주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그러자 각성한 여주는 (구)남친을 영원히 수장시키고, (현)남친을 위해 자신 또한 물 속으로 들어가 사라지는군요. 이건 어쩌면 한낱 동화같은 박물관 신세로 전락하게 될 베를린궁을 의미하는게 아닐런지... 한편으로는, 페촐트 감독은 베를린궁을 그저 신화 속으로 넘겨버려야한단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훔볼트 포럼은 그저 과거를 훔쳐온 것에 불과하다는 감독님의 인터뷰 내용을 떠올려 보면, 왠지 후자에 좀 더 가깝겠단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역사는 발전하는 거라는 생각을 왜 안하는지 모르겠다는 운디네의 대사도 있었으니까요.(묘하게 예전에 독일과 영국에서 크게 유행한 사회발전론/사회진화론의 향기가 느껴지는 대사였습니다. 이걸 잘못된 방식으로 써먹으면 나치의 인종우월주의로 흘러가게 되는...) 감독이 나름 베를린궁에 애정이 꽤 많아 보였는데, 오히려 겉핥기식 활용을 꼬집은 역설적인 표현이었을까요?
여하튼 운디네 덕분인지 바로 그 순간 깨어나게 된 남친은 그녀가 살던 임대주택을 비롯해 전시관과 까페 등 팍팍하게 바뀐 현실 세계 여기저기를 뒤져보지만 그녀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녀가 현실을 살았었단 흔적은 벽에 묻은 와인자국 뿐...) 새로 바뀐 도슨트는 운디네가 일시적인 프리랜서였다는 걸 알려주는데요. 교체된 직원의 강의는 주로 임대주택 부동산의 현실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할 뿐입니다. 남친은 한동안 운디네를 잊고 살아가다가 아이라는 새로운 미래가 생기자 갑자기 그녀에 대한 그리움에 다시 잠수를 하게 됩니다.
어랏? 남친이 또 죽는건가? 싶은 순간에 그가 들고 올라온 '다리를 이어 붙인 잠수사 피규어'... 운디네의 흔적들이 잔뜩 묻어있던 그 피규어는 곧 태어날 아이의 장난감이 되지 않을까 생각되더군요. 아마도 그는 어떻게든 "Staying Alive" 해나가겠지요. 어항 속의 두 모아이 석상 피규어처럼... 아이에게 옛날옛적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말이지요.
개인적으로 피규어는 과거~미래를 잇는 기억의 흔적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왜 하필 과거의 신화적 존재인 물고기(메기 군터)나 인어(물의정령 운디네)가 아닌, 현대의 산업잠수사인 남친의 형상일까? 이 부분이 계속 의아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어항에 왠 모아이 석상? 독일의 돌하르방인건가? 것도 두~ 개?! 부부가 쌍으로 전설 속 대과거로 회귀한단 건가...? 라며 한동안 의문투성이로 골머리를 앓았었지요. 그러다 물을 도시의 근원지이자 동시에 변화하러 들어가는 '문'이라고 봤을 때, 피규어는 남친이 운디네에게 건네주었다가 되돌려 받았다는 점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열쇠' 즉, 전통문화유산이란 가치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통 시점의 재해석 : 피규어의 변화
전 피규어(figure)를 '전통문화유산'의 상징으로 바라보면서 피규어의 시점에서 쭉~ 다시 따라가 보았습니다. 동독시절 물 속에 잠겨있던 전근대 역사의 전통문화(피규어)는 베를린 장벽이 깨지면서 수면 위로 꺼내지고, 현대에 와서 베를린궁(운디네)에게 선물로 쥐어줍니다. 그러나 베를린궁(운디네)은 그근대화된 전통유산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깨뜨리지만, 나름 티 안나게 잘 이어붙이고... 하필 현대(현남친)는 베를린궁을 만족스럽게 하려다 근본(물)에 너무 심취해 잠식당해버립니다. 이건 결국 FFF(형태는 기능을 따른다)가 시대와 불일치하는 문제임을 각성한 베를린궁은 과거 시대(구남친)의 잔재를 깔끔하게 죽이고 올라와, 스스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지요. 사라진 운디네처럼베를린궁이란 존재는 한때 그녀가 여기에 살았었다는 흔적만 남기고, 역사 속 사라진 도시의 전설 즉 빈 껍데기(figure)만 남은 박물관 신세가 된 것일지도...
그러나 미래(아이)를 준비할 땐, 다시금 근원(물)을 들여다보며 밖으로 꺼내오는 게 전통이기도 합니다. 전통이란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열쇠"로서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줘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해보니 왜 하필 마지막에 2개의 모아이 석상이지?! 란 의문이 약간은 풀리는 듯하더군요. 부모는 아이들에게 옛날옛적 아주 먼~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하니까요. 마지막에 모아이 석상 같은 모습으로 달라진 피규어는 마치 인종(고대 석상)이 다른 이민자(이란계 배우)와 함께하는 다문화의 미래를 꿈꾸는 것 같더라구요. 아마,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형태의 신화와 역사이야기를 들려주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운디네 2탄은 아이가 놀다가 어항 속의 모아이석상을 꺼내오며 시작하겠단 뻘한 생각이 잠시 떠오른... :D)
개인적으로 저에게 <운디네>란 작품은 로맨스물이라기 보다 베를린이란 역사도시의 근현대 개발사에 대한 애환을 표현하는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산업잠수사라는 남주인공의 독특한 직업 덕분에 잠수장면에서 꼬로록 소리가 그득하니 제가 물속에 있는 것마냥 굉장히 이색적인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전 페촐트 감독 작품 중에선 <운디네>를 가장 처음으로 봤었는데요. 현남친은 인중의 흉터와 다크서클, 묘한 분위기까지 내내 호아킨 피닉스를 닮았단 생각과, 여주인공은 이쁘기도 하지만 묘하게 요오~~물의 분위기가 난다는 생각이 들었던 작품이기도... :D 이후로 감독님께 취향저격을 당해 <내가 속한 나라>를 제외한 모든 작품을 챙겨보며 애정하는 감독님이 되었습니다. 왠지 독일 역사를 은유하는 듯한 여1+남2의 삼각관계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거나 갈아타려는 서사를 참 좋아하시는 듯한 느낌이... (이과라 그런가 희한하게 독일영화들이 취향에 잘 맞더군요. :D)
이 중에서 전 <운디네>를 가장 좋아하는데요. 볼 때마다 서울 강북의 광화문로 주변과 서글픈 조선시대 궁궐들(특히 경희궁), 근대건축유산들 생각이 참 많이 났습니다. 그리고'메기가 하품을 하거나 개미가 침만 뱉어도 물에 잠긴다'던 옛 습지 위에 세워진 한강변 잠실의 아파트단지들과 옛 송파강이 흐르던 잠실의 석촌호수엔 아직도 메기가 살고 있단 소문이 함께 떠오르더군요. (실제로 그 동네 오래된 메기매운탕 맛집이 있는;;;)
[총평]
더 이상 기능을 따를 수 없는 형태들에게 바치는 헌사.
시대가 바뀌었을 때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여야 하는 구시대 유물의 애잔함이란...
언젠가 심연에 잠긴 본원의 열쇠를 찾아 헤매이게 되나니...
"베를린궁에 담긴 도시/건축의 역사와 물의 정령 신화를 따라 꼬로록 잠수해보는 신비로운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