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에 언급했던 쇼브라킷(Chobrakit 또는 Shubrakhit) 전투 전날 밤의 일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의 보이에(Pierre Boyer) 장군은 마멜룩 군의 동정을 살피러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강변의 마을을 모두 수색하는 중이었습니다. 이런 마을 중 몇몇 곳에서는 총알이 날아왔지만, 몇몇 곳에서는 낯선 프랑스군을 환대했습니다. 그런 마을 중 하나에서, 보이에 장군은 마을 사람들의 무리에서 태연히 걸어나온 시크(sheik, 족장, 장로) 한명을 만납니다. 그 족장은 대체 무슨 권리로 대 술탄에게 속해 있는 나라를 침탈하러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보이에르 장군도 어리숙한 사람은 아니어서, 태연스럽게 이렇게 답변했다고 합니다.
"유일신과 그의 예언자께서 우리를 보내셨소."
그러자 그 시크는 (chic가 아닙니다) '최소한 이스탄불의 술탄에게 그런 사실을 알렸어야 했다'고 나무랐습니다. 다소 뻥쟁이였던 보이에 장군은 역시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이미 술탄에게 알려드렸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시크는 '프랑스 왕께서는 안녕하시냐'고 물었고, 보이에르는 이미 시작한 거짓말을 계속 이어가서 '아주 정정하시다'고 대답했지요. (실은 전혀 정정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루이 16세께서는 이미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셨거든요.) 그러자 이 시크는 자신의 터반과 수염을 걸고, 보이에를 영원한 친구로 대접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합니다.
(이런 짐이 정정해보이느냐 ? 참으로 요망한 발언이구나 !!)
보이에 장군이라는 분은, 위에서처럼 이집트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 부모님에게 보내는 글에서조차 뻥을 밥먹듯이 치던 분이라서 (쇼브라킷 전투에서의 나일강 수상전의 지휘자는 페레 Perrée 장군이었는데도, 부모님에게는 자기가 총사령관으로 지휘했다고 뻥...) 위 이야기가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는 이야기인지 의심을 해봐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위 일화는 당시 이집트인들의 정서를 대략적으로나마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당시까지 이집트는 너무나도 오래동안 외국인들에게 지배를 당해왔기 때문에, 이집트를 장기간 지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통성'이 중요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런 정통성 확보를 위해 '오스만 투르크의 대 술탄으로부터 칙령을 받았다'라고 대국민 뻥을 쳤었지요.
그런데, 과연 그 뻥의 핵심에 서있는 이스탄불의 술탄은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 과연 나폴레옹이라는 꼬꼬마가 벌이고 있는 일을 알고는 있었을까요 ? 그리고 당시 18세기말은 오스만 투르크가 이미 기울어가고 있던 시절인데, 과연 나폴레옹과 그의 프랑스군을 응징할 무력을 갖추고 있었을까요 ?
(이 양반이 오스만 투르크의 대 술탄, 셀림 3세입니다.)
(1789년 술탄 셀림 3세가 오스만 고관대작들의 알현을 받는 장면입니다.)
일단 당시 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 왕중의 왕, 사실상의 황제라고 할 수 있었던 셀림(Selim) 3세는 1761년 생으로서, 젊은 시절부터 그 다재다능함과 명석한 두뇌, 그리고 무엇보다 '깨인 생각'으로 인해 기울어가는 오스만 투르크를 부활시킬 황제의 제목으로 주목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1789년 젊은 나이에 술탄에 등극하자 시작한 일은 당연히 서구식 개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일단 강력한 근대식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일단 군대부터 서구식으로 개혁하려 했지요. (19세기 말 청나라의 양무 운동과도 비슷합니다.) 이때 오스만 투르크를 도와 개혁을 진행시켜줄 서구의 파트너는 바로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와 오스만 투르크의 술레이만 대제입니다. 물론 이 두 분은 직접 만난 적이 없었고, 이 초상은 각각 따로 그려진 것이지요. 음... 그러니까 합성이라는 이야기네요.)
(1526년 술레이만 대제가 최초로 프랑수와 1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 프랑스는 오스만 투르크에 비해 뭐 하나 나을 것이 없는 형편이었고, 특히 프랑소와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몹시 핍박당하던 신세라서, 당시 양자 관계는 거의 프랑수와 1세가 술레이만 대제에게 '형님 나 좀 살려주쇼' 하고 매달리는 양상이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와 프랑스는 무려 1526년부터 동맹을 맺어왔습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느라 오스트리아 뒤편을 건드려줄 동맹국이 절실히 필요했던 프랑스의 프랑수와 1세(Francois I)와, 이제 막 유럽 대륙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발칸 반도의 확고한 지배를 위해 뭔가 뼈대있는 서방 국가와의 유대 관계가 필요했던 술레이만(Suleiman, 영어식으로는 솔로몬) 대제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동맹을 맺었던 것이지요. 당시 이슬람 군주와 기독교 군주가, 다른 기독교 군주를 치기 위해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정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사건이었습니다. 이 동맹은 주변의 질시와 비방에도 불구하고, 무려 250년이 넘게 지속되어 왔습니다. 심지어 (형식적이지만) 술탄의 친구인 프랑스 왕의 목을 자르고, 아예 신이 존재한다는 항진 명제 자체를 거부했던 프랑스 혁명조차도 그 동맹을 깨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오스만 투르크 왕조에서는, 술탄이 추종자들의 배신이나 백성들의 반란으로 목을 잘리는 일이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어서, 프랑스 백성들이 프랑스 왕의 목을 잘랐다는 사실이 (다른 유럽 왕실에서와는 달리)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스만 투르크는 프랑스의 혁명 정신이 자기 나라로 퍼져 올까봐 전전긍긍하며 호들갑을 떠는 오스트리아나 러시아, 영국의 모습을 상당히 '꼬시다'라며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오스만 투르크의 국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쉬블림 포르트 (Sublime Porte, 큰 관문이라는 뜻의 불어)에서는 영국이나 러시아 대사들의 격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 정부를 인정하고 대사관도 둘 수 있게 배려해주었습니다. 프랑스 상인들이 오스만 제국 내에서 많은 편의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물론입니다.
(오스만 투르크 한창 때에는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의 외교관들이 와서 설설 기었다는 바로 그 대문, 쉬블림 포르트입니다.)
프랑스도 오스만 투르크만한 동맹국이 드물었기 때문에, 오스만 투르크의 비위를 맞춰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가령 바롱 드 토트(Francois Baron de Tott) 같은 프랑스 군인이 오스만으로 파견되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을 군사 기술적으로 지원했지요.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 군사력의 뼈대를 이루는 예니체리 군단은 이미 노예라기보다는 주인의 지위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에 상충되는 군사 개혁에 완강하게 저항했습니다. 이로 인해 오스만 투르크의 군사 기술은 유럽에 비해 최소 100년 이상 뒤진 상태였지요. 나중 일입니다만 1807년, 영국 함대가 이스탄불 코 앞인 다다넬즈 해협까지 밀고 들어와 외교적 양보를 강요하느라 벌어졌던 다다넬즈(Dardanelles) 해협 전투에서, 영국 함대에게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던 다다넬즈의 거포는 무려 1464년 주조되었던 물건이었습니다. 그만큼 군사 기술의 발전이 없었다는 이야기지요.
(영어 쓰는 애들이 군함타고 이슬람 세계에 가서 분탕질 하는 것은 이미 이때 시작되었지요.)
(이 63cm짜리 구경의 다다넬즈 거포는 투르크가 1866년 빅토리아 여왕에게 선물로 주어, 이제는 포트 넬슨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오스만 투르크는 당시 기술력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포병대와 해군의 개혁에 대해 목말라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정부에서는 그를 위해 포병 전문가를 이스탄불에 파견합니다. 그 후보자가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지요. 그가 실제로 이스탄불에 왔었더라면, 그래서 오스만 투르크의 포병대를 유럽 수준으로 향상시켰다면 유럽 역사가 어떻게 변했을까요 ? 흠... 글쎄요, 별로 바뀌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임오군란 때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질시하던 훈련도감 병졸들이 난을 일으켰던 것처럼, 오스만 투르크에서도 나중에 신식 군대인 니잠므 제디드(nizam-i jedid)에 반발하여 예니체리가 반란을 일으켰거든요. 아무튼 어떤 사회든 기득권 세력은 개혁이라면, 특히 자신들의 특권을 깎아먹는 개혁이라면 질색을 하지요. 셀림 3세도 그 과정에서 1808년 살해되었습니다. (개혁 개혁하다가 비명횡사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슬프군요.)
(1783년 이스탄불에서 오스만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프랑스 교관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의 19세기 말 모습과 비슷하지요 ?)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이 오지는 않았지만, 대신 1796년 오베르 뒤 바예(Jean-Baptiste Annibal Aubert du Bayet) 장군이 일부 야포 및 기술자들와 함께 이스탄불에 파견되어, 셀림 3세의 염원인 포병대 개혁에 나섰습니다. 오베르 뒤 바예와 그의 기술자들은 오스만 투르크를 위해 대포 주조 공장을 만들고 기병 및 보병 교관들을 프랑스에서 데려와 훈련을 시키는 등 오스만의 신식 군대 양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오베르 뒤 바예는 불행히도 1년만인 1797년 열병에 걸려 사망했고, 그의 군사 개혁은 예니체리의 반발에 의해 더 진전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799년 생장 다크레(Saint-Jean d'Acre) 포위전에서 나폴레옹의 포위 공격을 견디어 낸 것은 바로 오베르 뒤 바예로부터 훈련받은 신식 군대의 힘이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 대신 오스만 투르크에 군사 고문겸 대사로 파견된 오베르 뒤 바예 장군입니다. ...대머리셨군요.)
(1796년 오베르 뒤 바예가 이스탄불에 부임하여 오스만의 총리(Grand Vizier)에게 인사하는 장면입니다.)
그건 나중의 일이고, 이때까지만 해도 프랑스와 오스만 투르크의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견고하던 동맹을 깨뜨린 것이 바로 이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었습니다. 대체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소경이 제닭잡는 꼴이었던 것이지요.
쉬블림 포르트에서는 툴롱에 집결했던 프랑스 원정군이 몰타섬을 점령하자마자 오베르 뒤 바예 사후 프랑스 임시 대사였던 뤼펭(Pierre-Jean-Marie Ruffin)을 불러 그 의도를 추궁했습니다. 원래 오스만 투르크가 하필 프랑스와 250년이 넘는 동맹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원교근공(가까운 이웃과는 싸우고 먼 이웃과는 동맹을 맺는다... 중국 전국시대때 나온 외교 이론이지요)이라는 동서고금에 상관없이 진리인 외교 원칙 덕분인 점이 컸습니다. 즉, 오스만도 이웃 국가인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와는 적대 관계를 맻고 먼 이웃인 프랑스와는 친교 관계를 맺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캄포 포르미오 조약에 의해 프랑스가 아드리아 해의 코프푸(Corfu) 섬등 일부 지역을 얻음으로써 오스만 투르크와 약간 불편할 정도로 가까운 이웃이 되자, 오스만 투르크는 약간 경계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쟎아도 불안하던 오스만 투르크는 프랑스 함대가 몰타 섬을 들이치는 것을 보고 혹시 이것들이 키프로스 또는 크레타, 또는 당시 모레아(Morea)라고 불리던 그리스 남단 펠레스폰트 반도를 노리는 것이 아닌가 더욱 불안해졌던 것입니다.
(캄포 포르미오 조약에서 프랑스의 영토로 새로 편입된 아드리아 해의 코르푸 섬의 위치입니다. 외교 관계에서는 바로 옆동네 사촌보다는 먼 이웃이 더 좋은 법인데, 이젠 프랑스가 오스만 투르크에게서 너무 가까와진 것이지요.)
그러나 루펭은 당시 프랑스 외무부 장관이었던 탈레랑(Talleyrand)의 지시대로, 그 원정 함대의 목적은 오스만 투르크를 도와 러시아에 맞서기 위한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거짓말로 막을 수 있는 것도 잠깐이었고,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이스탄불에 도착하자 오스만 투르크 내의 반 프랑스 정서는 급격하게 나빠졌습니다. 역시 머리털 노란 것들은 믿는 것이 아니라더니 ! 무려 250년 동안 맺었던 동맹을 하루 아침에 내팽개치고 프랑스와는 전혀 무관했던 이집트를 침공해 ?? 쉬블림 포르트는 이 사태에 대해 정말 황당함을 느꼈고, 그 황당함은 곧 분노로 변했습니다.
(빈 회의에서의 탈레랑의 모습을 그린 풍자화입니다. 탈레랑은 시체같은 외모와 이리저리 편을 바꾼 명예롭지 못한 경력 덕분에, 별로 좋은 이미지를 남기지 못했지요.)
애초에 탈레랑은 자기 자신이 직접 이스탄불을 방문하여 상황을 설명하겠다고 공언했으나, 결국 그는 오지 않았지요. 사실 와서 뭐라고 변명을 해야 먹히겠습니까 ? 안 오는 것이 신상에 유리했을 것입니다. (그가 준비했던 거짓말은 이집트의 마멜룩들이 폐하의 적인 러시아와 짜고 이스탄불을 해꼬지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는데, 글쎄요, 아무리 긍정적으로 봐줘도 이게 먹혔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특히 안 좋았던 것은, 프랑스가 이집트를 점령한 것에 대해 오스만 투르크 일반 백성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신론(deism)이고 나발이고, 그들의 눈에는 프랑스=기독교 세력이었거든요. 그런 이교도들이 감히 신성한 메디나와 메카로 가는 길목인 이집트를 점령했다는 사실은 일본이 독도를 점령했다는 것과 비슷한 분노를 유발시켰습니다. 만약 실제로 일본이 독도를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대통령이 그냥 가만히 참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아마 그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유지하기 어려울 겁니다. 오스만 투르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이라는 자리가,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전제 군주의 위치는 아니었거든요. (그 증거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불과 몇년 뒤 노예 군병에 불과한 예니체리들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니체리 부대 병영의 모습입니다. 서방측의 그림이 아닌, 오스만 투르크의 그림입니다.)
마침내 8월 9일, 셀림 3세는 오스만 투르크 영토에 거주하는 모든 프랑스인들을 가택 연금시키고, 반 프랑스 파였던 유수프 지야(Yusuf Ziya) 파샤를 그랜드 비지어(Grand Vizier), 즉 총리로 임명합니다. 여기에 결정타를 먹인 것은 물론 8월 초에 있었던 아부키르 해전의 결과였습니다. 이제 프랑스 원정군이 함대를 잃고 앉은뱅이 오리 신세가 되자, 동 지중해에서의 힘의 균형이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9월 2일 러시아의 짜르 파울 1세가 흑해 함대를 이스탄불에 파견하여 반 프랑스 동맹을 요구하자, 셀림 3세는 아예 뤼펭 등 프랑스 대사관 인원들을 아예 감옥에 처박아 버렸고, 마침내 9월 13일 정식으로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이로써 영국-러시아-오스만, 그리고 나중에는 오스트리아까지 가담한 제2차 대불 동맹이 이루어지지요. 이 모든 것이 나폴레옹의 허황된 '이집트를 거쳐 인도' 프로젝트 덕분이었습니다.
자, 이제 전쟁이 선포되었으니 전투를 벌여야 하는데요, 정작 오스만 투르크는 병력이 없었습니다. 그 넓은 영토를 지키느라 오스만 투르크는 병력을 여기저기 흩어진 반독립 상태의 파샤들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끌어모으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이집트 원정군의 지휘권을 누가 쥐느냐만 해도, 셀림 3세가 그냥 떡 하니 임명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파샤 저 파샤를 다독거리고 협박하고 협상하면서 정해야 했습니다. 결국 이집트 원정군 총사령관은 팔레스타인 해안가의 유서깊은 항구 도시 시돈(Sidon)의 파샤인 제자르(Cezzar, 혹은 Jezzar)가 맡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자르 파샤에게는 단독으로 나폴레옹을 공격할 병력이 없었으므로, 술탄 셀림 3세는 그에게 군자금과 병력을 몰아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제자르 파샤를 그린 19세기 초의 서방측 그림입니다. 이 양반은 그림에서는 무척 인자해보이지만, 별명은 도살자였다고 하네요.)
당장 병력은 없었지만, 쉬블림 포르트의 이집트 탈환 작전은 그 규모가 나름 볼만 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그들은 전설의 제국 오스만 투르크였으니까요. 일단 이집트는 지키기는 쉬워도 침공하기는 어려운 동네였습니다. 북쪽은 바다로, 서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은 바싹 마른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집트와 시나이 사막을 사이에 두고 있는 시리아 지방은 이미 오스만 투르크의 홈 그라운드였고, 또 바다는 영국 해군과 러시아 해군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집트를 둘러싼 장막은 반쯤 걷힌 상태였지요. 쉬블림 포르트는 이 점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이집트 원정군 총사령관인 시돈의 제자르 파샤에게 시돈, 다마스커스(Damascus), 알레포(Aleppo), 예루살렘 등 시리아 주요 도시 주둔군을 몰아주어 총 3만의 병력으로 시나이 반도를 넘어 육로로 이집트를 침공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알바니아와 그리스 등 발칸 반도 출신의 병력 4만2천을 로도스(Rhodes) 섬에 집결시켜, 원래 그 섬에 주둔했던 8천 병력과 함께 무스타파(Mustafa) 파샤의 지휘 하에 영국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출항, 바다로부터 이집트를 침공하기로 했습니다. 무려 8만의 병력이, 동시에 수륙 양쪽으로 쳐들어간다는 웅장한 계획이었던 것이지요.
(시리아의 지도입니다. 위에서부터 알레포, 시돈, 다마스커스, 아크레, 가자, 예루살렘의 이름을 보실 수 있습니다.)
카이로의 나폴레옹에게도 이 소식은 속속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카이로 시내에, 도망쳤던 마멜룩 베이들이 비밀리에 보낸 편지가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즉, '셀림 3세의 칙령을 받고 이집트를 정벌했다는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말이고, 셀림 3세가 프랑스 군에 대해 성전을 선포했다'는 소식이 카이로 시민들에게, 그리고 간접적으로 프랑스군에게도 전해진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지난 편에 다루었던 10월 21일 카이로 대폭동이었습니다. 이어서 오스만 투르크의 정규군이 대규모로 이집트 원정을 위해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자, 나폴레옹은 이제 코너에 몰렸습니다. 지난 500년 간 서방 군대와는 검을 나눠보지 않았던 마멜룩 기병대야 손쉽게 격파했다고 하지만, 이제 상대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마멜룩들을 역시 손쉽게 격파했던 진짜 오스만 투르크 정규군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오스만 투르크 군대는 유럽식으로 무장된 알바니아와 세르비아를 격파했고,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와 여러차례 호각을 다툰 바 있는 진짜 단련된 군대였습니다. 이런 오스만 투르크의 8만 대군에 대해, 나폴레옹이 가진 것은 불과 3만 명의 지치고, 불만이 가득한 병력 뿐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적이 어디로 침공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육로로 침공하는 적군이야 시나이 반도 쪽만 지키고 있으면 될 것 같은데, 문제는 바다로부터의 공격이었지요. 이집트의 넓은 해안이 완전히 노출되어, 영국 해군이 어느 곳에 오스만 투르크 상륙군을 내려 놓을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과연 이 위기를 어떤 식으로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