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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ipio Nasica Oct 25. 2018

파리의 여인들이여 안심하라 - 아부키르 전투

지난 편에서는 이집트 침공을 위해 시리아에 집결 중인 오스만 투르크의 '다마스커스'군을 분쇄했으나, 시리아 정복에는 실패하고 고생 끝에 나폴레옹이 카이로로 돌아오는 것까지를 보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집트를 노리는 세력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억하시겠습니다만, 오스만 투르크는 육로와 함께 바다를 통해 이집트를 침공하기 위해 로데스 섬에 대군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 일부가 아크레 포위전에 구원군으로 참전했다가 큰 피해를 입긴 했습니다만,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군 덕분에, 이집트의 긴 해안선은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에 활짝 열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아크레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에는 바로 그 사실도 큰 역할을 했고, 또 실제로 나폴레옹은 아크레 철수에 앞선 연설에서, 병사들에게 '상륙을 노리는 적들로부터 이집트를 지키러 돌아간다'고 공언을 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마르몽의 활약은 사실 별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폴레옹과는 1793년 툴롱 시절부터의 부하 관계였으므로,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돌아갈 때 비밀리에 함께 데려간 극소수의 측근에 속했지요.)



나폴레옹이 시리아에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이집트를 지키고 있던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마르몽(Marmont), 카이로의 두구아(Dugua), 그리고 상(Upper) 이집트의 드제(Desaix)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그 명성에 비해 여태까지의 활약상이 잠잠했던 드제가 뭘 하고 있었는지 보시지요.  사실 드제는 잠잠히 있지 않았습니다.  1798년 카이로 점령 직후, 나폴레옹은 상 이집트로 도주한 마멜룩의 수장 무라드(Murad) 베이(bey, 장군 정도의 직위)를 추격할 것을 드제에게 명했고, 드제는 불과 2~3천의 부대만을 이끌고 그 넓은 상 이집트를 누비며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미 프랑스군의 위력을 경험한 마멜룩들은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프랑스군과 끊임없는 숨바꼭질을 계속했는데,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무라드 베이의 마멜룩 군대는 조금씩 소모되어 나갔습니다.  이 과정은 나폴레옹의 시리아 원정 내내 계속되었고,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마멜룩들을 뒤쫓는 과정에서 보여준 드제의 리더쉽과 공정함은 프랑스군 병사들 뿐만 아니라 상 이집트 지역의 이집트인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을 부를 때 '대 술탄(Great Sultan)'이라고 불렀던 이집트인들은, 드제 장군을 부를 때는 '공정한 술탄(Just Sultan)'이라는 명칭을 섰다고 합니다.



(드제는 나폴레옹의 부하들 중 드물게도 귀족 출신으로서 제대로 된 장교 훈련을 마쳤던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상 이집트 지역에서 공정한 술탄이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정작 본인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코카서스 출신의 백인녀들과 에티오피아 출신의 흑인녀들로 자신만의 하렘을 꾸미고 동양의 음탕함에 빠져 지내고 있다고 다 솔직하게 부는 바람에 그 명성에 약간의 흠이 나긴 했습니다.)



이렇게 농민들의 지지를 받은 드제의 활약상 덕분에, 나폴레옹이 시리아 원정에서 귀환했을 때 즈음해서는, 무라드 베이의 마멜룩 군대는 불과 300명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고, 그나마 상 이집트에서도 거의 쫓겨나 룩소르 서쪽, 지금의 리비아 남부 사막 지대의 오아시스에서 은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찌그러든 신세 속에서도, 무라드 베이는 시리아로 도망쳤던 마멜룩들과 종종 연락을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7월 초, 이렇게 남서쪽 사막에서 은거하던 무라드 베이가 무슨 소식을 받았는지 갑자기 움직임을 보입니다.  무라드 베이가 잔존 부대를 움직여 다시 카이로를 향한 것입니다.



(무라드 베이가 역사학에 끼친 공헌은 단순히 피라미드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빛나는 승리를 헌납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상 이집트에서 이리저리 도망치는 그를 쫓아 드제 장군이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고, 덕택에 드제에게 배속된 학자들도 이곳저곳에서 고대 이집트의 유적들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어쩌면 무라드 베이가 이집트학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는 나폴레옹이 떠난 이후 결국 클레베르와 협정을 맺고 카이로로 되돌아오는데, 그만 거기서 페스트에 걸려 1801년 허무하게 병사합니다.)



나폴레옹에게도 이 소식이 들어왔고, 나폴레옹은 이것을 신기루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무라드 베이를 죽이거나 사로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7월 12일 자신의 휘하 중 최고의 기사라고 할 수 있던 뮈라에게 무라드 베이를 추적할 것을 명했고, 뮈라가 이끄는 프랑스 이집트 원정군의 최정예 기병대는 그의 뒤를 쫓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사막의 여우답게 무라드 베이는 이들의 추적을 따돌렸을 뿐만 아니라, 대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가, 카이로 시내를 향해 거울로 뭔가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아직 카이로에 남아있던 그의 아내가 집 옥상에 올라가 역시 거울로 답신을 하는 것도 목격되었습니다.  대체 이것들이 무슨 꿍꿍이였을까요 ?  나폴레옹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차마 여자를 잡아다 고문하는 일은 나폴레옹조차도 저지르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 자신도 사막으로 말을 타고 나가 '무라드 베이 사냥'에 합류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무엇때문에 이렇게 날뛰는지에 대해서는 곧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바다로부터요.  7월 15일 저녁, 무라드 베이를 쫓다 이제 밤을 보낼 곳을 물색하던 나폴레옹 앞에 알렉산드리아의 마르몽이 보낸 전령이 헐레벌떡 나타납니다.   그가 전한 소식은 놀라운, 그러나 사실 예상했었던 것이었습니다.  즉 아부키르 만에 영국 해군 함대의 호위를 받은 오스만 투르크 전함 5척과 프리깃 3척, 그리고 50척이 넘는 수송선이 닻을 내렸고, 이미 1만의 병력을 아부키르 곶에 내려 놓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보여준 나폴레옹의 행동은 정말 찬사를 받아 마땅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무라드 베이를 쫓아다니느라 기진맥진했음에도 그는 전광석화처럼 명령서를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알렉산드리아의 마르몽에게는 '그 자리에 얌전히 앉아 알렉산드리아를 지킬 것'이 명령되었습니다.  당시 마르몽이 가지고 있던 1200명의 소규모 병력으로 어줍쟎게 오스만군에게 도전했다가는 죽도 밥도 안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나일 삼각주 동쪽에 배치되었던 클레베르에게는 아부키르 남동쪽 64km 지점에 위치한 강변 마을 다만후르(Damanhur)로 황급히 달려올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카이로 주변 사막을 헤매던 뮈라에게도 명령서를 보내 즉각 다만후르로 기병대를 집결시키도록 명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즉각 카이로로 돌아가서 카이로의 모든 프랑스군을 이끌고 역시 다만후르로 달려갔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정말 '모 아니면 도'의 정신으로 카이로의 프랑스군을 수비대도 남겨두지 않고 박박 긁어갔습니다.  남은 카이로의 치안과 수비는 당시 프랑스군에게 협조하던 현지 그리스인들의 수장인 바르텔레미(Barthelemy)에게 맡겨둘 정도였습니다.   그는 심지어 까마득하게 먼 상 이집트의 드제 장군에게도 전령을 띄워 가능한 최소의 수비대를 제외한 전체 병력을 끌고 카이로 지역으로 내려와, 혹시 나폴레옹의 방어망을 빠져나간 오스만군이 카이로를 덮치지 못 하도록 제2 방어선을 만들 것을 명합니다.



(적절한 병력 집결 장소를 정확하게 선정하는 것도 나폴레옹 전술의 핵심입니다.  단순히 병사들을 빨리 걷게 만든다면 그건 지휘관이 아니라 그냥 하사관이지요.  저렇게 한번에 다만후르를 병력 집결지로 선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이렇게 나폴레옹의 기본 계획은, 일단 아부키르에 상륙한 적이 카이로로 쳐내려올 것에 대비하여, 아부키르에서 카이로로 올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인 다만후르에서 병력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이끌고 갈 카이로 주둔군 1만, 그리고 뮈라가 모아 올 기병대 1천, 거기에 클레베르의 사단 약 8천을 집결시켜, 숫자를 알 수 없는 오스만 상륙군의 진격에 제동을 걸 생각이었지요.  나폴레옹 전술의 핵심은 기동력이라고 했는데, 이젠 꽤 익숙해진 이집트의 지리 덕택에, 아부키르 상륙 소식을 받은 지 불과 4일만에 나폴레옹은 1만의 보병과 뮈라의 1천 기병을 다만후르에 모아놓고 있었습니다.  다만 아직 클레베르의 사단은 도착하지 않았지요.   나폴레옹은 초조했습니다.  아직 병력이 다 모이지 않았는데 혹시라도 오스만군이 물밀듯이 내려와 도전해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 걱정이었습니다.  또,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사막을 빙 돌아 곧장 카이로를 들이치거나, 로제타 또는 다미에타 등의 항구 도시를 하나하나 점령한다고 하면 그것도 큰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찰병의 보고를 받아보니, 상황은 나폴레옹이 걱정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오스만군이 상륙한 바로 그 아부키르 해변에서 땅을 파고 있다는 것이 그가 받은 정보였습니다.

왜 오스만군은 먼 바다를 건너와 기껏 해변에서 삽질을 하고 있었을까요 ?  먼저 그 지휘관이 누구인지를 보시지요.  당시 주로 알바니아인들로 구성된 '로데스군'의 지휘관은 사이드 무스타파(Sayd Mustafa) 파샤였습니다.  이 양반은 이때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장이었고, 타보르 산 전투에서의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 지휘관과는 달리, 러시아와의 오랜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했을 정도로 경험이 풍부한 군인이었습니다.  무스타파는 러시아군과의 오랜 경험을 통해, 유럽식 군대의 강점과 단점을 잘 알고 있었고, 특히 프랑스군이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펼친 작전 내용에 대해서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군이 거둔 두 차례의 대승, 즉 피라미드 전투와 타보르 산 전투는 프랑스의 보병 방진에 대해 기병으로 도전했다가 완패한 사례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프랑스군이 겪은 가장 큰 패배인 아크레 전투를 복기하면서, 그는 프랑스군의 약점이 바로 포위 공격전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상륙 작전에서 공격 대신 수비 작전으로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는 일단 아부키르에 상륙하면 영국 및 오스만 해군 함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해변가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프랑스군이 공격해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럴싸한 전법이었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야전을 펼치려 해도 펼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로데스 섬에서 여기까지 좁고 더러운 수송선에 실려 오느라 고생을 한 결과, 그의 병력 중 약 1/3이 환자였던 것입니다.  무스타파 파샤는 최소한 1~2주라도 그의 병사들이 원기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위성 사진으로 본 현대의 아부키르 곶입니다.  이렇게 보면 넓어보이지만, 저 맨 아래 첫번째 방벽의 길이가 대략 1km 정도입니다.  굉장히 좁은 지역이라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한편, 이 상황을 알게된 나폴레옹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오스만 군의 기동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괜한 기우였던 것입니다.  그는 그런 상대라면 클레베르의 사단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고 보고, 즉각 병력을 움직여 아부키르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나폴레옹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7월 24일이었는데, 여기서 나폴레옹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부키르 만을 지중해로부터 가려주는 긴 곶의 입구에 2중으로 건설한 방어벽 뒤에 숨은 약 1만 5천의 오스만 투르크군과, 저 먼 바다에 정박해 있는 군함들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보기에 무스타파 파샤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곶의 끝에 바다를 등지고 방어진을 치면 결사의 각오를 높일 수 있을런지 몰랐지만, 일단 방어선이 무너지면 그 다음은 끝장이었습니다.  게다가, 곶의 끝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영국 및 투르크 해군의 지원을 받으려는 속셈이었겠지만, 이는 바다에 어두운 무스타파의 계산 착오였습니다.  저 사진에도 나오듯이, 이 일대의 바다는 얕은 모래톱 투성이어서 전함처럼 큰 배들이 도저히 가까이 올 수 없었습니다.   당시 함포들의 최대 사정거리는 약 2km 정도 되었습니다만, 그건 정말 최대 사거리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700m 이내에 들어와야 뭔가를 맞출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부키르 현장에서 군함들이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던 거리는 무려 3km가 넘었습니다.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이나, 작년의 아부키르 해전에서 영국 해군 HMS 컬로덴(Culloden)이 지나치게 해안에 가까이 붙었다가 좌초되었던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저 맨 위에 컬로덴 호가 좌초한 모습이 보이십니까 ?  그리고 저 아래 왼쪽에 작은 글씨로 아부키르 성이라고 보이시나요 ?  애초에 저런 해변에 상륙해놓고 전함들이 함포로 근접 지원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지친 병사들을 일단 잠시 쉬게 하고, 바로 다음날 당장 공격을 개시하기로 합니다.  그는 전략은 상당히 단순했습니다.  "저것들을 밀어붙여서 쓸어버려 !"  사실 별다른 전략 전술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1만5천이라는 오스만의 대군은 평방 1km 정도의 좁은 아부키르 곶 끝부분에 밀집되어 있었습니다.  이 수치를 좀 현실감나는 수치로 표현하면, 20평도 안되는 공간마다 1명씩의 오스만 병사들이 들어찬 형국이었습니다.  실제 병사들의 배치는 훨씬 더 빽빽했겠지요.  그 좁은 공간에 총 1만1천의 프랑스군까지 뛰어든다면 이건 정말 난장판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무슨 전략 전술이 필요했겠습니까 ?  그저 서쪽 방벽에 대해서는 라뉘즈(Lannuse) 장군의 사단이, 동쪽 방벽에 대해서는 란(Lannes) 장군의 사단이 공격한다 정도의 작전만 있었습니다.  뮈라는요 ?  요새화된 적의 방벽을 말이 뛰어넘을 수는 없었으므로, 뮈라의 기병대는 전위대 역할만 할 뿐 실제 공격에는 가담할 수 없었습니다.

공격은 7월 25일 오전 6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습니다만, 라뉘즈가 맡은 서쪽 방벽은 일부 미완성 구간이 있었던 지라, 라뉘즈는 결국 그 부분을 넘어 오스만 투르크의 1차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합니다.  1793년의 툴롱 포위전에서도 나폴레옹이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방어선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적은 결국 진다.  이는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증명되었다."  이는 주로 군사 기술적 문제보다는 사기 문제때문일 것입니다.  아크레에서는 비록 그 말이 항상 맞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만, 적어도 여기서는 맞았습니다.  일단 라뉘즈가 서쪽 방어선 일부를 돌파하자, 좁은 곳에 갇혀 있던 투르크군은 곧 혼란에 빠졌고, 이틈을 타서 란의 사단도 방어선 중앙부를 뚫고 들어가 서쪽 방벽을 지키던 투르크군의 뒤로 침투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서쪽 뿐만 아니라 동쪽 방벽을 지키던 투르크군까지 집단 패닉을 일으켰습니다.   이어진 결과는 무질서한 후퇴였지요. 



(원래 기병만으로 성이나 요새, 보루 등의 방어물을 점령하는 것을 기병대 최고의 업적으로 치지요.  워낙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이들이 후퇴할 곳은 어디였을까요 ?  무스타파 파샤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일부 투르크 병사들은 제2차 방어선으로 달려갔습니다만 거기서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결국 이들은 바다로 뛰어드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최소한 저 멀리 3km가 넘는 바다 쪽에 영국 및 투르크 해군 전함들이 보였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투르크 병사들은 수영을 제대로 할 줄 몰랐고, 할 줄 아는 병사들이라고 할지라도 3km를, 그것도 거추장스러운 군화와 군복을 입고 헤엄칠 수는 없었습니다.  이 패주 과정에서 자기들끼리 밟혀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병사들이 수천명에 달할 것이라고 추산되고 있습니다.  냉혈한 나폴레옹조차도 이 광경이 "자기가 본 것 중 가장 끔찍한 광경"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편에게도 문을 열어주지 않은 제2 방어선이었습니다.  사실 이때 이 제2 방어선 지휘관이 문을 열고 투르크군 패잔병들을 받아들였다면, 그 통에 제2 방어선까지 한꺼번에 함락되었을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여세를 몰아 이 방벽에 몸을 던졌지만 이 방벽은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제1 방어선이 쉽게 무너진 것은 서쪽 방벽 일부가 아직 미완성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여기는 방어벽이 완벽했거든요.  프랑스군은 이 방벽을 넘기 위해 한참동안 혈전을 벌였습니다만, 결국 부상병과 시체만 남기고 소득없이 물러나야 했습니다.  프랑스군이 물러나자, 비로소 방벽의 문이 열렸습니다.  투르크군의 관습상, 이런 승리를 거두었으면 그 승리를 증명하기 위해 적의 수급을 베어다 파샤에게 가져가야 했거든요.  투르크 병사들은 무질서하게 흩어져 이미 죽었거나 아직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는 프랑스 병사들의 목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에게 그날의 전투는 대충 끝이 난 셈이었지요.  

그러나 별로 하는 일 없이 기회만 노리고 있던 뮈라에게는 그날 전투가 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열혈남아 뮈라에게는 깊이 생각할 능력은 없을지 몰라도, 순간의 기회를 포착하는 역량은 당대 최고였습니다.  그는 이 기회가 적진으로 달려들어갈 절호의 찬스라고 판단하고는 휘하 기병대를 몰고 바람처럼 달려들어갔습니다.  란이나 라뉘즈의 보병대와 연락을 하여 보조를 맞춘다든지 하는 것 따위는 뮈라 같은 남자의 머리 속에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고, 사실 그래서 이 작전이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달려드는 프랑스 기병대의 공격에 당연히 '수급 채취팀'으로 나왔던 투르크 병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들은 허둥지둥 아직 열려 있는 진문으로 달려 들어갔고, 아까 아군에게도 문을 열어주지 않던 수문장도, (아마도 자기 자신의 부대원들이라서 그랬는지) 이번에는 우물쭈물하다가 뮈라가 진문 안으로 뛰어드는 순간까지도 문을 닫지 못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프랑스 보병들도 우르르 다시 돌격을 시작했음은 물론이고요.  한편 뮈라는 앞을 가로 막는 투르크군을 정말 옛날 이야기의 관운장처럼 베어넘기며 무작정 앞으로 내달렸습니다.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적장 무스타파였지요.  위계 질서가 확실했던 투르크군답게, 무스타파의 장막은 그 화려함이나 크기가 다른 것들과는 눈에 띄게 달랐으므로 목표물 확인은 쉬웠습니다.  그는 아까 즉흥적으로 '돌격 앞으로'를 외친지 불과 5분 만에, 무스타파의 장막 안으로 말을 탄 채 뛰어들었습니다.



(그로의 명작, 아부키르 전투입니다.  대개 당시 나폴레옹이 의뢰하여 그린 전쟁화에서 주인공은 당연히 나폴레옹이었는데, 정말 이때 뮈라의 활약은 너무나도 대단하여 나폴레옹도 당시 보고서에 이건 뮈라의 승리라고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저 그림 속의 주인공도 당연히 뮈라 바로 그 남자입니다.)



이때 이 전투에 참전했던, 프랑수아(Francois) 대위의 기록에 따르면, 적장 무스타파 파샤도 겁장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뮈라가 장막으로 칼을 들고 달려드는 것을 보고, 물러서기는 커녕 오히려 앞으로 달려나와 침착하게 뮈라의 머리통에 대고 권총을 쏘았습니다.  동시에 뮈라도 그 권총을 든 손을 향해 칼을 내리 찍었고요.  결과는 양쪽 모두의 부상이었습니다.  뮈라는 턱에 총알을 맞았습니다만, 무스타파는 뮈라의 칼에 손가락 2개를 잘리며 권총을 놓쳤습니다.  아마도 그 탓에 겨냥이 다소 빗나갔는지, 뮈라의 턱은 피부만 상하고 뼈는 온전했습니다.  이때 뮈라는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명언을 남깁니다.  

"파리의 여인들이여 안심하라.  나의 입술은 멀쩡하다."



(저 그림 속에서 뮈라와 무스타파 파샤의 모습을 확대한 것입니다.  무스타파 파샤의 오른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고, 그의 손가락 2개가 없어진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다른 투르크인 부하들은 뮈라에게 칼을 바치는 등 항복하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스타파의 표정은 아직도 기가 죽지 않고 용감히 저항을 하려는 듯 합니다.  그나저나 말들의 표정이 좀 우습군요.)



손가락을 잘린 무스타파는 제14 용기병 대대의 병사들이 포로로 끌고 갔고, 나머지 투르크군은 제1 방어선의 병사들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합니다.  약 2천 명의 투르크군이 이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군도에 맞아 죽었고, 또 다른 2천 명이 역시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대부분 익사해버립니다.  이때쯤에는 저 멀리 정박해 있던 영국-투르크 함대에서도 이 참극을 목격하고 몇명의 투르크군이라도 건져보려고 대형 보트들을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수는 너무 적었고, 또 너무 느렸습니다.  극소수의 투르크군만 거친 파도와 프랑스군의 총알, 그리고 바다에 빠져죽으며 아무것이나 움켜쥐려는 동료들의 손길을 피해 이 보트들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그 극소수의 행운아 중에는 다른 동료들처럼 알바니아 출신이었던 30세의 젊은 장교 모하메드 알리(Mohammed Ali)라는 사내가 있었는데, 그는 6년 후 이집트의 권력을 장악하고 사실상 이집트를 지배하는 왕조를 세웁니다.  그의 왕조는 1950년대까지 이어집니다.



(근대 이집트의 창시자이자, 사실상 이집트 마지막 왕조의 창시자인 모하메드 알리입니다.  이 그림은 1840년대에 그려진 것인데, 이 사내도 젊었을 때 나폴레옹과 뮈라에게 거의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난 경험이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5천 명은, 이런 극소수 행운아들의 운명과는 매우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들의 운명이 더 행운처럼 보였습니다.  이들은 물에 빠지거나 프랑스군의 총칼에 찔리는 꼴을 면하여, 무스타파 파샤의 아들의 지휘 하에 제3 방어선, 즉 예전부터 거기 서있었던 아부키르 곶 끝 부분에 있는 아부키르 요새로 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지옥으로 가는 길이 처음에는 넓고 평탄해보인다더니, 이들이 택한 길이 딱 그 꼴이었습니다.



(그로의 그림 속에는 많은 것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5천명의 투르크군이 피해들어간 아부키르 요새가 뒤에 보이는데, 실제 규모보다 엄청나게 큰 성채로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무스타파 파샤의 뒤로, 바다 속에 뛰어드는 투르크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고, 바다 위에 둥둥 뜬 흰색 터번들이 보입니다.  실제로 당시 나폴레옹도 수많은 터번들이 주인을 잃고 바다 위를 떠도는 것을 보고 몸서리쳤다고 합니다.  몸서리는 쳤지만, 그래도 그렇게 살겠다고 바다에 뛰어든 투르크 군에게도 프랑스군은 열심히 총을 쏜 것 같습니다.  물에 빠진 투르크 군 사이사이에 포탄인지 총탄인지가 물에 떨어지며 작은 물기둥을 만드는 것들이 뚜렷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일부 해군 전함들의 롱 보트들이 생존자들을 건지러 접근하는 모습도 보실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미 전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나폴레옹에 따르면 전투 현장에 쓰러진 적의 시체와, 나중에 해안으로 떠내려온 익사자들의 시체를 세어보니 그것만도 6천구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날 오후 늦게서야 현장에 도착한 클레베르는, 이 광경을 보고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평소에 나폴레옹을 그토록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젊은 총사령관을 와락 끌어앉고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장군 !  당신은 정말 위대합니다 !  당신이 몸담기에 이 세계는 너무나도 작습니다 !"



(이 판화에서 키가 큰 클레베르는 나폴레옹에게 '당신은 위대함은 세상처럼 큽니다' (Vous etes grand comme le monde)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한편 저 아부키르 요새에 들어갔던 5천 명의 투르크군은, 시드니 경이 보트로 보내준 얼마 안되는 영국 해병대원들로 된 증원군을 받고 항전 의지를 불태워 보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무스타파의 형편없는 지리 판단은 여기서도 그들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원래 이 요새는 아부키르 만을 지킨다기 보다는 관찰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던 곳인데, 이곳을 지키는 프랑스군은 불과 35명이었습니다.  (이들은 투르크군의 침공에 맞서 3일을 버티다가 결국 항복했었습니다.)  요새 규모가 그 정도이다보니, 이곳에는 우물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긴 이런 바다와 접한 곶 끝부분에 우물이 있다면 더욱 희한한 일이겠지요.  게다가 이 좁은 요새 안에 5천 명이나 들어차 있으니, 저장된 물은 금새 바닥 났고, 여기에 덧대어 유럽 최고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포병대의 사격 연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직사로 날아오는 구형탄과, 곡사로 날아오는 폭발탄이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쉴 새 없이 날아들었고, 이것들은 반경 200m도 안되는 공간에 5천 명이나 들어찬 오스만군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처벌이었습니다.   일부 투르크군은 너무나도 목이 마른 나머지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다물을 마시고는 미쳐버렸습니다.   결국 이들은 포위 7일 만에 5천 명이 3천 명으로 줄어드는 생지옥을 경험한 후 8월 2일 마침내 항복합니다.   이때 이들의 항복을 목격했던 프랑수아 대위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해골같은 얼굴을 하고 비틀비틀 걸어나와, 그냥 죽여달라고 풀썩 고개를 숙였다고 합니다.  그 참혹한 광경에, 투르크군이라면 치를 떨던 프랑스군 장병들도 차마 더 해꼬지를 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이들에게 주었는데, 그것이 그만 더 큰 참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7일 만에 물과 음식을 접한 투르크군 포로들이 너무 허겁지겁 먹고 마신 덕택에, 그만 배탈이 나서 이들 중 무려 4분의3, 그러니까 2천 명이 넘는 포로들이 결국 죽어버렸다고 합니다.



(아, 무스타파 파샤가 삼국지의 읍참마속 장면만 읽어보았어도 저런 곳에 땅을 파지는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



어쨌거나 프랑스군은 치욕의 현장 아부키르 만에서, 다시 빛나는 승리를 거둡니다.  이때 나폴레옹의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군의 사망자는 100명, 부상자는 500명 정도였는데, 아부키르만에 상륙했던 투르크군 1만5천 명 중 포로가 되지 않고도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모하메드 알리를 포함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으니, 정말 대단한 승리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프랑스군에게는 무스타파 파샤 본인을 포함하여 살아있는 투르크군 포로가 약 2~3천 명 정도 있었습니다.  또한 저 바다 위 영국-투르크 함대에도 프랑스군 포로 35명이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으로서도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식량만 축내는 투르크군 수천 명을 쥐고 있는 것보다는 프랑스군 포로를 돌려받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 포로 교환을 위해 프랑스군 장교 데코르슈(Descorches)가 영국 함대 기함 티그르(Tigre) 호를 찾아가 시드니 경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평범한 회담에서 유럽의 운명이 바뀌는 일이 시작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 




(지금 파리에 있는 아부키르 거리 (Rue Aboukir)는 바로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1798년 넬슨을 영웅으로 만들어준 그 아부키르 해전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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