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편에서 아부키르 전투의 뒤처리를 위해, 나폴레옹의 젊은 부관 데코르슈(Descorches)가 영국-투르크 연합 함대를 찾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 젊은 부관은 멋진 프리깃함이 아닌, 노를 저어 움직이는 롱 보트(long boat)에 백기를 달고 연합 함대를 찾아갔으므로, 꽤 고달프고 폼 안나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데코르슈 중위는 투르크 함대의 제독과 투르크 포로들과의 포로 교환 및 그래도 남는 (투르크 군의 포로가 훨씬 더 많았으니까요) 투르크 군 포로들의 식량 조달 문제에 대해 협의를 마친 뒤에도, 곧장 해안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영국 함대의 사령관인 시드니 스미스 경이 그를 자신의 기함인 티그르(HMS Tigre) 호로 초청했거든요. 시드니 경은 프랑스어에 능통했으므로, 이 둘은 티그르 호의 함장실에서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대화 도중에 눈치빠른 시드니 경은 이집트의 프랑스군이 정말 최소한 6개월 이상 유럽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시드니 경의 대책없는 말썽은 영국 해군 내에서도 그를 기피 대상으로 만드는데 일조했습니다.)
선천적으로 시드니 스미스는 모험심이 강하고 재기가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짧은 순간 머리를 굴리다, 프랑스군에게, 정확하게는 나폴레옹에게 현재 유럽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 나폴레옹을 물먹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이 젊은 프랑스군 중위에게 약 2개월 전인 6월 6일에 독일에서 발행된 프랑스어판 가제트(Gazette de Francfort)지 등 신문 2부를 주었고, 더불어 아주 중요한 내용을 구두로 전달했습니다. 그 내용을 한줄 요약하면 이랬습니다.
"실은 우리 로열 네이비가 나포한 프랑스 연락선에 나폴레옹에게 전달하려던 파리 총재 정부의 메시지가 있었는데, 내용은 나폴레옹 혼자라도 좋으니 빨리 프랑스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소."
데코르슈 중위는 당연히 이 신문들과 시드니 경의 구두 메시지를 나폴레옹에게 전달했습니다. 과연 시드니 경의 이 메시지는 사실에 입각한 것이었을까요 ? 또 만약 사실이었다면 대체 시드니 경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메신저 역할을 자청한 것이었을까요 ?
시드니 경이 전달해준 파리 총재 정부의 메시지는 사실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으로 인해 유발된 제2차 대불 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를 집단 폭행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주요 전장인 라인 방면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젊은 영웅 카알(Karl) 대공이 프랑스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고 있었고, 나폴레옹이 피땀흘려 정복했던 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는 러시아의 수보로프(Souvarov) 장군에게 모두 다시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더욱 안 좋았던 것은 국가 경제가 파탄 지경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런 난리 통에, 프랑스 총재 정부는 (애초에 나폴레옹의 정치 세력화가 두려워 이집트로 보내버렸지만)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이 절실하게 아쉬웠습니다. 그들은 나폴레옹 뿐만 아니라, 이집트 원정군을 통째로 돌아오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파리와 이집트는 아무런 연락 방법이 없었습니다. 프랑스를 떠난 이후, 나폴레옹이 파리 총재 정부로부터 받았던 유일한 공식 연락 문서는 1799년 초 시리아 원정에 떠나기 직전에 간신히 나폴레옹에게 도달한 탈레랑의 편지 하나 뿐일 정도였지요.
(나폴레옹만 알프스를 넘은 것이 아닙니다. 수보로프 장군의 지휘 하에 알프스를 넘는 러시아군의 용맹성을 보십시요.)
마침내 '나폴레옹 귀환 작전'이 실행됩니다. 브뤼(Etienne Eustache Bruix) 제독이 5월 초, 북대서양의 항구 브레스트(Brest)에 정박한 프랑스 해군 함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향했던 것입니다. 이 함대의 규모는 전열함만 25척, 프리깃함도 18척이나 포함된 거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함대의 목표는 약간 애매모호한 점이 있었습니다. 원래 축구에서 진정한 페인트 모션은 적을 속이고 관중도 속이고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도 속여야 한다는 농담이 있던데, 이 경우가 딱 그랬습니다. 일단 분명히 이 함대는 지중해를 향했습니다. 그러나 규모는 거창하지만 승무원들의 미숙함 때문에 도저히 영국 해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 브뤼 제독은 미리 연락선 한 척에 '아일랜드의 반란을 도울 함대가 곧 간다'라는 편지를 실어 아일랜드로 떠나 보냈습니다. 당연히 이 연락선은 영국 해군에게 나포되었고, 브뤼 제독의 의도대로 영국 해군은 아일랜드로 향하는 항로에 잔뜩 모여 프랑스 함대를 요격할 준비를 했습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1798년의 United Irshmen 반란 사건과 그를 지원하려던 Hoche 장군의 아일랜드 원정 계획은 영국에게 큰 위협이었습니다.)
여기에다 마침 닥친 자욱한 안개를 틈타 브뤼 제독의 대함대는 브레스트 항을 빠져 나와 순조롭게 지브로올터 해협으로 향했습니다. 이들은 순조롭게 당시 동맹국이던 스페인의 군항 카디즈(Cardiz) 앞바다까지 갔지요. 이 항구에는 스페인 전열함 17척이 있었는데, 이 앞바다에는 영국 해군의 키스(Keith) 제독이 16척의 전열함으로 이들을 틀어막고 있었습니다. 프리깃 같은 것은 빼고도 25 + 17 >> 16 의 수적 우세가 있었음에도, 브뤼 제독은 교전을 회피하고 곧장 지브랄타 앞바다를 지나 지중해로 진입했습니다. 이것만 보면 정말 브뤼 제독의 목적은 이집트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브뤼 제독의 모습입니다.)
당시 영국 지중해 함대 총사령관인 세인트 빈센트(St. Vincent) 경에게는 적지 않은 숫자인 30척의 전열함이 있었으나, 이 전함들은 완전히 분산되어 있었으므로, 브뤼가 수적 우세를 이용하여 하나씩 때려부수기에 딱 좋은 형태였습니다. 먼저 키스 제독이 16척으로 스페인 제1의 군항인 카디즈를 봉쇄하고 있었고, HMS 티그르 (Tigre) 등 2척은 시드니 경 지휘 하에 이집트 앞바다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으며, 4척은 새로 탈취한 지중해의 마혼(Mahon) 항구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또 4척은 나폴리 항구 앞바다에서 나폴리 왕국을 지원하고 있었고, 3척은 말타 섬에서 볼(Ball) 함장의 지휘 하에 프랑스 보부아(Vaubois) 장군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전함 수가 총 30척이라고 했는데 아직 한 척이 빈다고요 ? 아, 그 한 척은 넬슨 제독이 시칠리아 팔레르모 (Palermo)에서 엠마 부인과 불륜을 불태우는 뱃놀이에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나왔던 임현식 선생의 대사가 정답입니다. "이쁜 여자들은 다 없어져야 해... 아니면 세상 여자들이 다 이뻐지던가." 당대 영국 지중해 함대의 재앙이었던 엠마 부인의 초상화입니다.)
지브로올터 해협을 감시하는 지브랄타 요새의 영국군은 브뤼의 함대가 통과하는 것을 보고 경보를 울렸습니다. 영국 해군은 깜짝 놀라 서둘러 전함들을 미노르카(Minorca) 섬에 집결시켜 브뤼 제독의 도전에 대비했습니다. 카디즈 항구를 봉쇄하던 키스 제독의 전함들이 카디즈를 내팽개치고 다 이쪽으로 집결한 것은 물론, 심지어 가장 중요한 임무, 즉 영불 해협을 지키고 있던 해협 함대(Channel Fleet)에서도 12척의 전함을 차출하여 보내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브뤼 제독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당시 아직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영국 지중해 함대를 하나하나 각개 격파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프랑스의 지중해 항구 툴롱(Toulon)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물론 아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었겠지요. 물이 떨어졌다든가 (?) 마스트가 부러졌다든가 하는 것들이요. 하지만 이런 사정들은 몇 개월, 심지어 몇 년씩 육지를 밟지 못하는 영국 해군이 더 심하게 겪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출항한지 불과 1달도 안된 브뤼의 함대가 영국 함대보다 더 나쁜 상황이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브뤼의 이 행동 덕택에 세인트 빈센트 경은 미노르카 섬에 무려 32척의 전함들을 모아 놓을 수 있었습니다. 대신, 카디즈 앞바다가 뚫리자 기어나온 스페인 해군 전함 17척이 (이중에는 포갑판이 3층인 1급 전함이 3척이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역시 지중해로 들어와 카르타헤나 (Carthagena)에 입항했습니다.
(브뤼가 헤집고 다닌 항구들과, 영국 해군이 집결했던 미노르카의 위치입니다.)
이 스페인 함대와 연합하면 25 + 17 > 32 아직도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의 세력이 더 우수했습니다만, 카디즈 앞바다에서의 25 + 17 >> 16 의 수적 우세조차도 불안해했던 브뤼가 32척의 영국 함대에 도전할 리가 없었지요. 사실 프랑스 함대의 실력도 매우 불안했지만, 스페인 함대의 실력도 만만찮아서, 카디즈에서 카르타헤나로 오는 그 짧은 항해에서조차 가벼운 폭풍에 자기들끼리 충돌하여 배 2척이 심하게 부서지고 나머지 배들도 돛대가 1~2개씩 부러지는 추태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대로 정말 25 + 17 vs. 32 의 대결이 벌어진다면, 아무래도 32척을 가진 영국 함대가 대승리를 거둘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당시 마세나(Andre Messena)는 제노바(Genoa)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포위되어 악전고투하고 있었는데, 총재 정부는 5월 중순에 툴롱으로 파발마를 띄워 브뤼에게 포위된 제노바로 향할 보급선들을 호위하라는 임무를 내렸습니다. 아울러 이집트의 나폴레옹에게 보낼 편지도 함께 전달했습니다. 이 편지의 내용은 '나폴레옹 너의 판단에 따라, 이집트 원정군을 다 데려오든, 일부 부대를 남겨놓고 데려오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너 하나만이라도 아무튼 프랑스로 빨리 돌아와 달라'는 절박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마세나에게 보급품을 전달하고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을 귀환시킨다는 중대한 임무를 띤 브뤼의 함대는 비장하게 툴롱 항을 나섰고, 영국 지중해 함대가 아직 집결하지 못한 관계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제노바 앞바다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방해도 없이 제노바 항구에 보급선을 입항시키는 간단한 임무조차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마침 강한 서풍이 불어와서 도저히 입항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영국 해군이었다면 이 정도는 해낼 수 있었을까요 ? 글쎄요...
(마세나는 이때 결국 잘 견디어 내어, 스위스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해내는 기염을 토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브뤼는 일단 카르타헤나로 가서 스페인 해군과 합류한 뒤, 이집트로 가려고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더 열악했던 스페인 해군은 그 항로를 단호히 거부하고, 대신 프랑스 함대를 카디즈까지 호위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브뤼는 정말로 그 제안을 받아들여, 일단 카디즈로 간 뒤, 그대로 8월 13일 다시 브레스트로 되돌아오고 맙니다. 결국 거창한 출항 끝에 뭐 해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이 식량만 축내고 되돌아온 것이지요.
파리 총재 정부도 이런 한심한 프랑스 해군에게 애초부터 뭘 기대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일단 이 25척의 전함과 18척의 프리깃함에 약 2만 5천의 이집트 원정군을 다 태우고 올 수도 없었는데도 이집트로 보내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애초에 기획 의도가 불분명했다는 이야기거든요. 게다가 5월 중순에 툴롱의 브뤼에게 전달된 나폴레옹에게 보낼 편지는 복사본 몇 통을 더 만들어 또다른 경로, 즉 이탈리아에서 적절한 상선 등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전달하려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런 노력들은 모두 좌절되었습니다. 심부름꾼들이 그냥 포기해버리거나, 일부는 영국 해군에게 나포된 것이지요. 그래서 시드니 경도 파리 총재 정부가 나폴레옹에게 '너 하나라도 돌아와달라'고 애타게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시드니 경은 나폴레옹에게 그런 소식을 사실 그대로 전달해 주었던 것일까요 ? 그는 아부키르 전투를 통해, 육지에서는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를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을 때려 잡을 방법은 오직 하나, 그가 바다 위에 떠 있을 때를 덮치는 것이었습니다. 시드니 경은 나폴레옹에게 이런 사실들을 전해준다면, 당연히 그는 프랑스로 돌아오려고 배를 타고 나설 것이고, 그때 파리를 때려잡듯 그를 잡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문제는 그런 기획이 시드니 경 머리 속에서 즉흥적으로 떠오른 것이다보니, 나폴레옹게 확신을 줄 수 있는 증거, 즉 나포한 총재 정부의 명령서가 당장 시드니 경의 손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그 내용은 구두 전달하고, 그 내용을 뒷받침해줄 증거 자료로 프랑스의 위기를 보도한 프랑스어 신문을 데코르슈 중위의 손에 들려 보낸 것이었습니다. 자, 똑똑한 나폴레옹이 이런 즉흥적이고 어설픈 미끼에 걸려들었까요 ?
(당시 이집트에 있던 나폴레옹에게 프랑스의 위급함을 알려주는 여신들.... "Allegory Of The State Of France Before Napoleon's Return From Egypt" 라는 제목의 Jean-Pierre Franque 라는 화가의 작품입니다. 알고 보면 저 여신들이라는 것이 바로 영국 해군 시드니 경이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지요. 이 그림은 아마도 나폴레옹의 정적들이 '이집트에 군대를 내팽개치고 혼자 살아돌아왔다'는 점을 공격하자 그에 대응하기 위해 주문제작된 것 같습니다. )
나폴레옹은 미끼 뿐만이 아니라 낚시줄과 찌까지 덥썩 삼켰습니다. 그는 카이로로 돌아가는 길, 아영 캠프에서 램프를 켜놓고 이 신문들을 밤새도록 탐독했습니다. 신문을 읽는 그는 내내 흥분하여 부들부들 떨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이탈리아에서 이루어놓은 모든 것이 다시 오스트리아의 손에 무너져내리고 있었고, 프랑스 자체의 안보조차 위협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비록 적의 전해준 말이긴 하지만) 총재 정부도 자신의 귀환을 애타게 원한다니 ! 그는 그날 밤 당장 프랑스로의 귀환을 결심합니다. 사실 그는 이미 이집트에 질려 있었습니다. 이미 이집트 원정 첫해에, 생각보다 이집트에 경화(specie, 즉 금화나 은화)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나서 이집트에 대한 입맛이 싹 가신데다, 아크레에서 쓴 맛을 보고나서 동방 정복의 꿈도 스려져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집트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갈 구실만 찾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 구실을 시드니가 제공했으니, 옳다거니 하면서 덥썩 문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요.
이렇게 돌아갈 것을 결심하지, 당장 떠오르는 문제는 2가지였습니다. 어떻게 갈 것인가 ? 누구누구를 데려 갈 것인가 ?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돌아갈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이미 프랑스로 떠난 사람들이 좀 있었고, 나폴레옹도 그 사람들이 택한 루트를 그대로 택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루트라는 것이 그다지 안전해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지요.
누가 이집트에서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었나요 ? 일단 지난 편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페레(Peree) 제독이 페스트 환자들을 이집트로 수송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프리깃함 3척을 이끌고 제멋대로 프랑스로 귀환해버린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리아 원정 초기인 1799년 3월에도, 프랑스 본국으로 연락을 취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정박 중이던 프리깃 한척을 프랑스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 프리깃에는 나폴레옹의 학자들 중 하나인 저명한 지질학자 돌로미외(Déodat Gratet de Dolomieu)가 타고 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돌로미외는 이 프리깃함의 출발 소식을 듣고는 지병을 핑계로 귀국을 요청했고, 나폴레옹도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이 노학자가 부담스러워 즉각 허락했었지요. 다만, 돌로미외의 귀국길은 전혀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이 프리깃은 이탈리아 근해에서 폭풍에 휘말렸고, 결국 인근 타란토(Taranto)로 피항해야 했는데, 이 타란토 항은 프랑스와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부르봉 출신 왕이 지배하는 '2개의 시실리 왕국' 소속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있었는데, 돌로미외의 경우가 딱 여기에 해당했습니다. 원래 돌로미외는 소시적에 말타 기사단 소속의 기사였습니다. 그런 연고가 있었으므로, 나폴레옹이 말타 섬을 침공할 때 기사단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공작대의 일원으로 활약했습니다. 이때 뭔가 기분이 상하는 일이 있었는지, 당시 말타 기사단장 (Grand Master)에게 밉보이는 일이 있었는데, 하필 그 기사단장이 말타 섬 함락 이후 이 시실리 왕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사단장은 돌로미외를 '프랑스 빨갱이들의 열혈 핵심당원이자 전쟁 범죄자'라고 찍어 공격했고, 덕택에 그는 메시나로 호송되어 거기서 아주 형편없는 시설의 독방에 갇혀 살인범이나 다름없는 처우를 받으며 생고생을 했습니다. 후일담이지만, 저명한 학자를 이런 식으로 대우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럽 전체의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나 항의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돌로미외를 구해준 것은 나폴레옹이었습니다. 1800년 6월의 마렝고(Marengo) 전투에서 회심의 승리를 거둔 뒤, 이어진 1801년 3월의 플로렌스 평화 조약에서 내세운 조건 중 하나가 돌로미외의 즉각 석방이었거든요. 다만 돌로미외는 2년 가까이 치룬 옥고가 너무 심해, 결국 1801년 11월, 고향의 여동생 집에서 병사하고 맙니다.
(돌로미외의 초상입니다.)
(돌로마이트라는 광석 아시지요 ? 이 광석 이름도 돌로미외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것입니다.)
아무튼 페레 제독이나 돌로미외나, 영국 해군에게 요격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시는 SPY 레이더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조기 경보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영국 해군이 엄중히 감시하는 주요 군항인 브레스트와 툴롱 등지에서 전열함 25척과 프리깃 18척으로 구성된 대함대가 잡히지 않고 빠져 나와 지중해를 활보할 정도라면, 상대적으로 감시가 소홀한 알렉산드리아에서 프리깃 1~2척이 야밤에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만도 합니다. 다만, 페레 제독이나 돌로미외가 탈출을 감행했던 것은 시리아 원정이 한창인 때라서, 시드니 경의 2척의 전함과 몇 척의 프리깃으로 구성된 함대는 나폴레옹의 시리아 원정을 방해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폴레옹이 곧 바다로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저 수평선 너머 어디서인가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을텐데, 과연 무사히 그 턱을 빠져 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요.
(강톰 제독입니다. 이 양반 최대 업적은 이집트에서 프랑스로 나폴레옹을 무사히 실어날랐다는 점이지요.)
나폴레옹은 작년의 아부키르 해전에서 살아남은 강톰(Ganteaume) 제독에게, 2척의 쾌속 프리깃이 언제라도 즉각 출발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라고 명합니다. 나폴레옹의 생각이나, 강톰 제독의 생각이나, 이 최신예 쌍동이 프리깃들이라면 설마 영국 해군에게 발각된다고 하더라도 그 추격을 따돌리고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최신예 쌍동이 프리깃들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 이것들은 1797년 캄포 포르미오 조약 체결 전에, 나폴레옹이 북이탈리아에서의 작전을 마무리 짓는 과외 활동으로 베네치아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낼 때 베네치아 항의 조선소에서 거의 완성 단계에 있던 두 척의 쌍동이 프리깃함들이었습니다. 전직 지중해 해양 강국 베네치아답게, 이 똑같은 모양의 두 프리깃함은 비교적 잔잔한 지중해에 최적화되어 그야말로 고속으로 항해 할 수 있는 쾌속선으로서, 각각 40문씩 (18 파운드 포 28문 + 6 파운드 포 12문)의 대포를 실은 대형 프리깃이었습니다. 이 프리깃들은 1797년 8월에 진수될 무렵에는 이미 프랑스가 압수한 상태여서, 진수될 때의 이름도 카레르(Carrere) 호와 뮈롱(Muiron) 호로 명명되었습니다. 삭구를 갖추고 취역한 것은 같은 해 11월이었지요.
(나폴레옹의 뮈롱 호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여, 실제 군함도 항구에 영구 보존토록 했고, 또 나폴레옹의 집무실에도 실제 뮈롱 호와 똑같은 모형을 하나 만들어 비치하게 했습니다. 이 모형이 실제 나폴레옹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그 모형이라고 합니다. 실제 군함은 부르봉 왕가 복귀 이후 불분명한 이유로 화재가 발생하여 폐기 처분 되었습니다.)
특히 이 두 척 중 한척이 뮈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나폴레옹의 개인적인 명령에 의한 것이었지요. 기억하실런가 모르겠습니다만, 뮈롱(Jean-Baptiste Muiron)은 아르콜레 다리의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보호하다가 (혹은 그냥 곁에 서있다가) 오스트리아군의 총에 맞아 전사한 나폴레옹의 참모 장교였습니다. 뮈롱은 쥐노(Junot)와 함께, 툴롱 포위전 때부터 나폴레옹의 참모로 일한 젊은 장교로서, 쥐노와도 무척 친한 사이였고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이 북부 이탈리아 원정에 나선 직후인 1796년 3월 29일, 외프레지(Euphrasie)라는 아가씨와 결혼식을 올렸지요. 나폴레옹은 이미 8일 전 원정길을 떠난 관계로 이 결혼식에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뮈롱도 불과 2~3일 후에 서둘러 나폴레옹의 뒤를 따랐지요. 이 외프레지라는 아가씨는 당시 뮈롱의 아이를 이미 가진 상태였습니다. 이 임신이 8개월째 접어들 무렵, 뮈롱의 고향집에 머물고 있던 외프레지에게 나폴레옹의 친필 편지가 당도합니다.
"뮈롱이 아르콜레 전투에서 바로 제 옆에서 전사했습니다. 당신은 소중한 남편을 잃었고, 저는 오랜 친구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조국은 우리보다 더 심각한 손실, 즉 재능과 용기가 각별했던 장교를 잃었습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또 그 유복자를 위해 뭔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꼭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아르콜레 다리를 건너는 나폴레옹과 그를 보호하다 전사하는 뮈롱...)
이 편지가 도착한 뒤 얼마 안 되어, 외프레지는 (아마도 슬픔에 겨워 이렇게 된 듯 한데) 아들을 출산하다가 죽었고, 그 아이도 사산되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으로서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죽은 뮈롱에게 보답할 길이 더더욱 막막해진 셈이었지요. (나중에 황제가 된 뒤, 나폴레옹은 뮈롱을 잊지 않고 1810년 그 아버지인 외스타스(Eustace Muiron)를 백작에 봉해줍니다.) 나폴레옹은 그 아쉬움과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자, 이 최신예 프리깃함에 부하이자 친구였던 뮈롱의 이름을 붙였던 것입니다. 이제 아르콜레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했던 뮈롱이, 다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영국 해군으로부터 나폴레옹을 구출할 임무를 띠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요즘도 그렇지만 사실 군함이라는 물건은 작다고 빠르고 크다고 느린 건 아닙니다. 당시 프리깃함과 전함의 속도도 딱히 꼭 프리깃함이 더 빠르다고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많은 대포를 싣기 위해 두꺼운 목판을 써서 만들어진 대형 전함에 비해, 좀더 날렵하게 만들어진 프리깃이 좀더 빠른 경향이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작은 프리깃은 마스트의 높이도 낮아서 펼칠 수 있는 돛의 크기에도 제한이 있었으므로, 큰 마스트에 큰 돛을 달 수 있었던 전함에 비해 불리한 점도 있었습니다. 특히, 무거워서 안정적인 전열함은 파도가 좀 거세도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가벼운 프리깃은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높으면 속도가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항해가 과연 프랑스에서 평화롭게 끝이 날지 지중해 어느 바다 한가운데서 영국군의 집중 포격으로 끝이 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한편, 누구를 데려가느냐도 나폴레옹의 고민이었습니다. 일단 그는 자신이 프랑스에 돌아가서 다시 일을 시작할 때 필요한 사람들은 모조리 다 데려갈 작정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최측근인 베르티에 (Berthier), 앙드레오시 (Andreossy), 뮈라 (Murat), 란 (Lannes), 마르몽 (Marmont)은 물론이고, 학자들 중에서도 자신의 최측근인 몽쥬(Monge)와 베르톨레(Berthollet)를 데려갈 사람 명단에 올렸습니다. 비록 이탈리아 원정 때부터의 심복은 아니었지만, 진짜 엘리트인 드제(Desaix)도 데려가고 싶어서 나폴레옹은 그를 상 이집트로부터 카이로로 소환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드제는 그 소환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드제에게 화를 내는 편지를 쓰며 '이거 다 너의 미래를 위해서 쓰는 거야'라는 식의 애매모호한 표현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에 귀환한 뒤 드제는 나중에 따로 배를 보내 결국 불러옵니다. 마렝고 전투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정말 나폴레옹이 사람 볼 줄 아는 것이지요.) 그외에, 자신의 친위대 병사 200명도 함께 데려가기로 합니다. 이는 자신의 경호원들에 대한 개인적 의리도 있었겠습니다만, 좀더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을 피하기 위해 일단 아프리카 해안에 바싹 붙어 항해를 하다가, 만약 영국 해군에게 쫓기게 되면 즉각 배를 버리고 상륙하여 육로로 북아프리카 해안을 걸어서 횡단하다가 적절한 곳에서 배를 구해 다시 지중해를 건널 생각이었습니다. 그러자면 적대적인 베두인 족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줄 강력한 호위대가 꼭 필요했던 것이지요. 클레베르요 ? 그 덩치 크고 꼬장꼬장한 성격의 알사스인이라면 나폴레옹도 무척 부담스러운 인간이었습니다. 또 한편 생각해보면 클레베르만큼 나폴레옹의 뒤를 이어 이집트를 통치할 만한 인재도 없었지요. 나폴레옹은 그에게 '모든 지휘권을 넘긴다'는 편지만 달랑 하나 남겨두었습니다.
문제는 비밀 유지였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은 일부 이집트 고고학에 열이 오른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말단 병사부터 장군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아름다운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습니다. 이때 총사령관과 그의 최측근들만 살짝 도망을 친다 ? 이 사실이 알려지면 대혼란, 어쩌면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측근 중에서조차, 비서인 부리엔과 참모장 베르티에만 미리 이 계획을 알고 있었고, 란이나 뮈라, 몽쥬와 베르톨레 등도 당일 날에야 프랑스로의 귀환 소식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안절부절함이나 프리깃함의 출항 준비, 그리고 측근들의 하인들이 주고 받는 대화에서 정보가 조금씩 새어나갔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최측근이라고 부르기에는 상당히 존재감이 약했던 두구아(Dugua) 장군이 이렇게 난무하는 소문을 듣고 나름 걱정이 되어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가 있었습니다. 한줄 요약하면 '나폴레옹 당신이 최측근인 베르티에, 뮈라, 란, 마르몽, 그리고 몽쥬와 베르톨레 등을 데리고 곧 프랑스로 떠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병사들의 동요가 심각하므로 이 소문이 거짓임을 공개적으로 밝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이 편지에 답장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입장이 난처했던 것은 몽쥬와 베르톨레였습니다. 이들은 군인도 아니었는데, 특히 동료 학자들에게 거짓말을 하기가 무척 뭣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동료 학자들도 이 괴소문을 듣고 있었고, '그것이 사실이냐'를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출발하기로 한 당일 날에도, 이 동료들의 질문에 "총사령관이 만약 프랑스로 돌아가려는 의도라고 해도, 난 다음날 정오때까지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고..." 라는 식으로 횡설수설 답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수학자 가스파르 몽쥬입니다. 사실 이집트 원정으로 동료 학자들을 끌어들인 것이 몽쥬와 베르톨레였는데, 자기들만 쏙 빠져 귀국하기란 참... 거시기한 일이었을 겁니다.)
정작 이렇게 판을 키운 시드니 경과 영국 해군의 요격 준비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을까요 ? 그것이 좀 놀랍고도 미스티리어스합니다. 시드니 경은 분명히 자신이 획책한 이 음모의 결과가 나폴레옹의 이집트 탈출로 이어질 것을 분명히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포로 교환을 위해 상륙했던 투르크 관리가 출항 준비 중이던 프랑스 프리깃함을 보았으므로 그 사실은 더욱 명백했습니다. 그가 8월 9일자로 당시 해군성 장관이던 스펜서 백작 (Earl Spencer)에게 쓴 편지에는 분명히 나폴레옹이 탈출하려 할 것이며, 그 후임자로는 클레베르를 임명할 것이다라는 것까지 정확하게 추측해서 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8월 12일, 그는 자신의 기함 티그르 호를 타고 키프러스(Cyprus) 섬으로 가버립니다. 이유는 배에 식량이 다 떨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떠나면서 그는 또다른 전열함인 테세우스 (HMS Theseus)호에게 알렉산드리아 일대를 순찰하라고 지시했습니다만, 이 배도 역시 식량 부족으로 불과 며칠만에 로데스(Rhodes) 섬으로 떠나 버리게 됩니다. 대체 이것이 무슨 수작이었을까요 ? 실제로 이 전함들은 아크레 포위전 때부터 전혀 보급을 못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식량이 다 떨어진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어쩌면 시드니 경은 이런 덫을 너무나 즉흥적으로 놓았기 때문에, 자신의 함대에 식량이 다 떨어져서 불과 며칠 밖에는 봉쇄를 못한다는 것을 깜빡 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당시 함장들은 거의 매일 식수와 식량 등에 대해 보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그랬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어쩌면 이런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이집트로 가는 항해는 주로 여름에 이루어졌고, 이집트에서 유럽으로 가는 항해는 주로 겨울에 이루어졌습니다.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주로 서풍이, 겨울에는 주로 동풍이 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설픈 프랑스 해군의 솜씨로는 한 여름인 8월에 바람을 거슬러 서쪽으로 항해를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시드니 경은 생각했는지도 모르지요.
(염장 쇠고기가 없는 영국 해군은 상상하기 어렵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게 없어서 나폴레옹을 풀어주었다 ? 흠.... 아무튼 결국 시드니 경은 키프로스 섬에서도 로데스 섬에서도 염장 쇠고기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원래 해군 국가가 아니라면, 그렇게 대량의 고기를 염장하여 준비해둔 곳이 무척 드물겠지요. 결국 이들이 식량을 비축한 뒤 이집트 해안으로 되돌아 온 것은 이미 나폴레옹이 프랑스에 귀국한 뒤인 10월 초였습니다.)
그 이유야 어쨌든, 아무튼 영국 함대는 한두 척의 프리깃함을 제외하고는 모두 알렉산드리아 앞바다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알렉산드리아의 강톰 제독에 의해 즉각 카이로의 나폴레옹에게 8월 17일에 전달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서둘러 귀환 대상인 측근들에게 밀명을 내려 동행하게 한 뒤, 주변에게는 '나일강 하류 삼각지 지역으로 탐사 여행을 떠난다'는 핑계를 대고 길을 떠났습니다. 이때 부하 중위로부터 가로챘던 프랑스 여인 폴린 푸레스(Pauline Foures)에게도 아무 말 없이 그냥 버리고 갔습니다.
이들 일행은 8월 23일 오후에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도착했고, 여기서 강톰 제독, 그리고 알렉산드리아를 지키던 므누(Menou) 장군을 만납니다. 나폴레옹은 비로소 여기서 므누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클레베르 및 두구아, 그리고 당시 재무관이던 푸시엘그(Poussielgue) 등에게 남기는 편지를 전달합니다. 사실 예의상으로라도 나폴레옹은 최소한 클레베르에게 얼굴을 맞대고 인수인계를 해야 했으나, 천하의 나폴레옹도 클레베르에게 이 야반도주를 면전에서 알릴 배짱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특히 푸시엘그에게 남긴 편지가 인상적이었는데, 신속히 이집트 농민들로부터 토지세 등의 세금을 거둘 것과, 그 지역 세이크(sheik, 족장)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 그러나 반란에는 잔혹하게 대응할 것을 주문하면서, '필요하면 하루에 6명씩 목을 베되, 계속 웃는 얼굴을 유지하라'는 말을 남깁니다.
나폴레옹과 부리엔 등은 뮈롱 호에, 뮈라 등 다른 장군들은 카레르 호에 8월 23일 밤에 승선했으나, 바람이 전혀 없어 계획과는 달리 야음을 틈타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빠져나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해변으로부터 이집트식 소형 선박인 딩기(dinghies) 선을 타고 와서 뮈롱 호의 닻줄을 붙잡고 같이 데려가 달라고 애원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 볼품없는 추태를 부린 사람은 학자로서 이집트 원정에 동행했던 시인 파르스발-그랑메종(François-Auguste Parseval-Grandmaison)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항해에 초청하지도 않았는데 태워달라고 추태를 부리는 시인이 전혀 반갑지 않아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배에 타고 있던 몽쥬와 베르톨레의 부탁으로 결국 승선을 허용합니다.
(파르스발-그랑메종입니다. 나폴레옹보다 10살 연상이었던 이 시인 양반은 결국 1811년 프랑스 한림원 (Académie Française)의 수석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는 등 나름 잘 살다가 1834년, 나폴레옹보다 장수하고 죽었지요.)
이런 소란 속에서도, 새벽이 되어 해가 밝았는데도 바람이 불지 않아 먼 바다로 나가질 못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이 프리깃 함의 망루에서 보니, 저 너머에 정박한 영국 군함들의 마스트가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강톰 제독은 상황이 안 좋다고 보고 다시 항구로 돌아갈 것을 건의했지만, 나폴레옹은 이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이는 이해가 가는 것이, 항구로 돌아가면 이제는 버려진 것을 알고 분노한 사람들의 얼굴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 다행히 아침이 되자 바람이 불어, 이들은 바다 멀리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항해는 쾌적하지는 않지만 무척 순조로운 편이었습니다. 이들은 항상 영국 해군이 나타날까봐 모두가 전전긍긍했습니다. 다만 딱 한사람, 뭔가 운명을 믿고 있었던 나폴레옹 혼자만 (적어도 겉으로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으며, 갑판에 올라올 때면 항상 기분좋은 얼굴로 이런저런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을 실은 이 소함대는 정말 북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서진하다가, 코르시카 섬 근처에서 북상하여 프랑스 해안으로 향했습니다. 마침내 9월 30일, 코르시카 섬이 육안으로 관측되었고, 10월 1일, 그 수도인 아작시오 (Ajaccio)에 뮈롱 호가 닻을 내렸습니다. 나폴레옹은 여기서 엄청난 환호를 받습니다. 특히 그의 어린 시절 유모를 만나는 등 좋은 시간도 가졌지요. 이 아작시오에는 바람을 기다리며 6일 간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이동안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주둔 프랑스군이 19개월 째 급료는 커녕 아무런 보급품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가지고 있던 4만 프랑의 돈 중에서 파리로의 여행에 쓸 경비를 제외한 전액을 병사들에게 나누어주는 배포를 보여줍니다. 그는 이미 일개 장군이 아니라, 정치가로서 거듭나고 있었던 것이지요. 실제로 8월 23일, 알렉산드리아 해변에서 므누 장군과 작별할 때, 그는 므누에게 자신이 파리에 도달하기만 하면 그 무능하고 비열한 변호사 정치인들을 몰아내고 프랑스 공화국을 제대로 이끌 정부를 새로 세우겠다는 야심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을 태우고 코르시카 아작시오 항에 들어오는 뮈롱 호)
마침내 10월 7일, 바람이 불어 출항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툴롱 동쪽 80km 정도 되는 안개낀 해역에서 영국 함대와 마주쳤으나, 다행히 영국 함대는 그 인근 바다를 항해 중인 선박 중에 감히 프랑스 선박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별다른 추적을 시도하지는 않았습니다. (알고 보면 로열 네이비의 해상 봉쇄라는 것도 참 허술합니다.) 그들은 마침내 10월 9일, 생 라파엘(St. Raphael) 만의 프레쥐스(Frejus)에 입항합니다. 나폴레옹은 상륙하자마자 정말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습니다. 원래 이집트같은 먼 타국에서 온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2주 정도 격리 기간을 거쳐야 하는 것이 당시 규칙이었으나, 군중들은 이렇게 외치며 관리들의 검역을 강제 생략해버렸습니다. "오스트리아 놈들에게 당하느니 역병이 차라리 낫다 !!" 군중들이 이렇게까지 나폴레옹에게 환호했던 것은 사실 운이 좋아서였습니다. 그가 거둔 7월 25일의 아부키르 만의 승리 소식이 불과 3~4일 전에야 프랑스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그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승리의 주역 나폴레옹이 눈 앞에 나타났으니 정말 타이밍이 적절했던 것이지요.
(프레쥐스 항으로 들어오는 나폴레옹. 이 그림은 아테네 사에서 출판된 '나폴레옹의 학자들'이라는 책에 나온 거에요.)
이제 근 1년 반 만에 프랑스로 돌아온 나폴레옹을 기다리는 사건들은 무엇이었을까요 ? 사실 사건들이 나폴레옹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사건을 일으키는 사나이였지요. 그 이야기는 다소 먼 훗날에 하기로 하고, 다음 편에는 이집트 원정 후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이집트 원정편도 다 끝나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