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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ipio Nasica Jan 15. 2019

중립도 힘이 있어야 한다 - 발트해의 포성 (상편)

전에 어떤 책을 읽다보니 제1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왜 독일 편이 아니라 영국 편을 들게 되었는지가 색다른 방식으로 설명되더군요.  원래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로 시작하긴 했지만, 정작 미국내 최대 민족은 독일계이고, 영국계는 고작 제 3위입니다.  제 2위 민족은 영국과는 원수지간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일랜드계라고 하더군요.  언어 때문에 미국이 영국에 좀더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미국인들은 정서적으로 독일에 대해서도 나쁘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초기에는, 미국의 감정은 '유럽놈들, 지들끼리 싸우다 다 죽어버려라'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연히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 독일에게도 많은 물자를 수출하여 돈을 벌었습니다.



(양키 친구들, 전쟁을 통해 돈만 벌지 말고 빨리 와서 좀 같이 싸워주면 안될까 ?)



그런데 왜 미국이 영국편에 서서 독일에 맞서 싸우게 되었을까요 ?  사실상 독일과는 원수진 일도 전혀 없었는데 말이지요.  원수진 일이 좀 있기는 했습니다.  독일의 유보트가 미국인들이 많이 탄 루시타니아호를 격침한 사건이 있었지요.  게다가 독일이 멕시코에게 미국 침공을 부추겼던 짐머만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미국이 바다를 건너가 수많은 자국 젊은이들을 희생시켜가며 강대국 독일과 전쟁을 벌인다니, 좀 의아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독일과 손을 잡으면 미국 땅의 일부, 원래 멕시코 땅이었던 텍사스를 돌려받을 수 있다네 !)



먼저, 루시타니아호 이전에도 독일 잠수함이 미국인들이 탄 선박을 격침한 경우는 꽤 많았습니다.  논란이 된 루시타니아 호야 영국 선박이지만, 그 이전에도 독일은 영국으로 군수품을 싣고 가던 미국 선적의 화물선을 격침시켜 재산 뿐만 아니라 인명 손실을 낸 경우도 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만 하더라도 미국은 독일에 대해 전쟁을 벌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영국 선박인 루시타니아 호가 격침되면서 미국 시민들이 죽었다고 전쟁 참전을 결정한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요.

게다가 짐머만 사건도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 독일은 유럽 전선의 유지에도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무 힘도 없는 멕시코와 동맹한다고 해도, 바다 건너 미국에 선제 공격을 가해 승리를 거둘 확률은 0에 수렴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독일은 얌전히 있는 미국이라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을까요 ?



(미국의 군사력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에도 유럽 각국에 비해 매우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으나, 유럽으로의 원정군을 편성하면서 그야말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됩니다.  최초로 유럽에 건너간 미군 포병대는 아직 포병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프랑스군의 대포를 빌려 써야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영국 해군이 있다는 것이 그 설명의 요지였습니다.  위에서 설명드렸듯이, 미국은 애초에 영국과 독일 양측에 신나게 물자를 팔아댔습니다.  이미 19세기 말에 미국의 공업력은 영국과 독일, 프랑스를 다 합친 것보다도 더 컸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당연히 밀가루부터 시작하여 구두용 가죽, 화약, 철강, 구리, 나사못 등등 온갖 물자가 무한정 필요했으므로, 영국이나 독일이나 공업 대국이자 농업 대국인 미국으로부터의 물자 수입이 절실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영국 해군이 독일의 항구를 봉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전쟁이 벌어져도 제3국 선박은 전쟁과는 상관없는 금수품(contraband)이 아닌 상품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통상이 허용되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총력전, 장기전이 되면서, 의약품이나 밀가루, 냉동 쇠고기 같은 기본 생필품도 다 차단해버리는 것이 전쟁의 승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당연히 영국은 우세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독일의 해외 통상을 막았습니다.

이렇게되자, 미국은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 측에만 물건을 팔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미국으로서야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도 수출을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므로 좋았겠지만, 영국 해군이 두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독일은 코너에 몰리게 되었고, 독일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내가 못 먹는 것 남도 못 먹게 하자는 식으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연합국으로 가는 모든 상선과 여객선을 다 격침시켜버리겠다는 것이었지요.   이는 미국의 이익을 크게 해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제 물건을 팔고 받은 채권은 다 영국이나 프랑스 것이었는데, 영국이나 프랑스가 전쟁에 지기라도 하면 그 채권을 몽땅 떼일 판국이었으니, 어떻게든 연합국이 승전하도록 돕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도 일치하는 것이었지요.  그것이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일이라고 할지라도요.   결국 영국 해군 때문에 결국 영국 편이 될 것이 뻔했던 미국을 조금이라도 발을 묶어두려고 독일이 꾸민 무리수가 바로 짐머만 사건이었고, 이는 미국의 대독전 참전에 좋은 구실 역할만을 할 뿐이었습니다.



(이 Razzle Dazzle이라는 기묘한 모양의 해군용 위장 무늬는 주로 잠수함의 관측으로부터 군함의 모양과 크기, 방향을 모호하게 보이게 만들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Norman Wilkinson이라는 영국 해군 장교에 의해 도입되었습니다.  다만 그 효과가 과연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확실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영국이나 독일이나 똑같이 해양 통상을 방해했지만, 영국 해군은 뭔가 좋은 인상을 남겼고 반대로 독일 해군은 악당 역할을 하게 된 점은 달랐습니다.  그 차이는 영국 해군은 수상 함대 전력이 막강했지만, 독일 해군은 그렇지 못하여 부득이 잠수함에 의존해야 했다는 점에서 왔습니다.  독일로 향하는 선박이 있을 경우, 영국 해군은 구축함이나 순양함으로 그 상선을 정선시키고 거기에 탑승하여 그 선박의 화물을 뒤져 금수품이 있는지 확인하고, 만약 있을 경우 선박을 나포하는 형태의 비교적 얌전한 전통적 봉쇄 활동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무장이 빈약한 잠수함으로나 대양에 나갈 수 있었던 독일 해군은 그럴 여력이 없었던지라 그냥 다짜고짜 어뢰를 발사하여 격침시켜버리는, 인명 살상까지 동반한 과격한 봉쇄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독일 잠수함들도 중립국 상선을 위협하여 정지시킨 뒤, 금수품이 발견되면 (어차피 영국 해군이 득실거리는 바다에서 나포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므로) 선원들을 보트에 내리게 한 뒤 어뢰로 격침하는 방법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너무나 시간도 많이 걸렸고, 또 잠수함이 상선보다 그다지 빠른 편도 아니라서 상선을 협박하여 정지시키는 것도 어려웠던데다, 망망대해에 선원들을 조각 보트에 태운채 내버려두는 것도 몹쓸 짓이라는 비난도 많았기 때문에, 결국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펼치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루시타니아 호의 범죄 행위'라... 독일로서도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라는 변명도 있겠지만, 그래도 여객선이 분명한 배에 어뢰를 쏘아대는 행위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긴 하겠지요.)



이래서 '수도를 함락당하고도 전쟁에 이긴 사례는 많지만, 바다를 잃고서도 전쟁에 이긴 사례는 없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쟁이 벌어졌을 때 상대 국가에 대해 해양 봉쇄를 실시했던 사례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  그것까지는 모르겠고, 이미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영국은 그런 해상 봉쇄를 시도했습니다.  다만 당시 봉쇄 지역이 긴 북아메리카 해안선이었고, 지중해 등에서도 작전이 벌어졌던 관계로 영국 해군은 대서양 동서부에 너무 넓게 분산되어 별다른 효과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덕택에 미국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과 교역을 계속할 수 있었지요.  그 결과 미국은 무사히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고, 영국 해군은 크게 체면을 구겼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제1차, 곧이어 제2차 대불 동맹전쟁이 벌어지면서, 영국 해군은 다시 해양 봉쇄에 나섰습니다.  이렇게 되자 가장 기뻐한 것은 영국 해군 함장들이었고, 가장 슬퍼한 것은 당연히 프랑스 무역업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무역업자들 외에도, 스웨덴이나 덴마크 등의 기타 중립국이었던 북유럽 국가들도 무척 큰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프랑스는 대단한 덩어리를 보유한 당대 유럽 최대 경제국이었으므로, 당연히 북유럽 국가들도 프랑스와 이런저런 무역을 많이 했는데, 그 활동이 당장 방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영국 해군 함장들이 좋아라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포 포상금 때문이었지요.  나포 포상금은 그저 적국의 군함 뿐만 아니라, 적국의 상선을 나포한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요즘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만, 가령 소유권은 어느 미국의 자본가에게 있는 화물선의 선적(배의 주소지)이 파나마이고, 정작 운항은 영국 선장 지휘 하에 말레이지아 선원들이 수행하고 있다면 이 배는 대체 어느 나라의 배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  특히 그 화물선이 수송 중인 화물이 스페인산 포도주인데 그 화물 소유권은 독일인이라고 하면 더욱 골치가 아파집니다.  당시 유럽은 보호 무역이 성행하고 있었으므로 평상시라면 프랑스 화물은 반드시 프랑스 선적의 배를 이용하는 것이 원칙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제약은 1651년 크롬웰이 항해조례를 발표하여 네덜란드의 세력을 꺾는데 크게 재미를 본 이후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었지요.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면서 프랑스 선적의 배들이 항구에 발이 묶이게 되자, 프랑스로 가는 화물을 스웨덴이나 덴마크, 나폴리, 심지어 한때 적국이었던 프러시아 선박까지도 앞다투어 실어나르게 되면서 이들 국가의 해운업이 반짝 번영하게 되었지요. 



(이 배들은 원래 네덜란드 군함이었으나 1652년 크롬웰의 항해 조례 직후 벌어진 전투에서 영국 해군에게 나포된 배들입니다.  네덜란드처럼 해운업으로 먹고 사는 나라에게 항해 조례는 굶어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는 청천벽력이었지요.)



이와는 반대로, 영국 해군 함장들은 골치가 아파지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 덴마크 국기를 휘날리며 프랑스 영해 바로 바깥 쪽을 항해 중인 화물선을 어떻게 처리해야 했을까요 ?  당시 관행상, 군함조차도 엉뚱한 나라의 깃발을 게양하는 것을 ruse de guerre (위장 전술) 라고 하여 수시로 사용했기 때문에, 단순히 깃발만 보고서는 저것이 덴마크 화물선인지 프랑스 화물선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해운업의 특성상 프랑스 선박에도 덴마크인이나 나폴리인, 미국인 등 다양한 국적의 승무원들이 타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배 근처에 접근하여 말을 붙여 보아도 명확히 알기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영국 해군이 채택한 방법은 공해상에서도 선적에 상관없이 중립국 선박이라고 할지라도 무조건 정선시켜 그 배에 강제로 승선, 그 선장을 취조하고 관련 서류를 점검하고 또 선창에 적재한 화물을 마음대로 뒤져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 배가 독일 함부르크에서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을 잔뜩 싣고 출항했는데 목적지가 포르투갈의 리스본이라고 되어있지만 의심스럽게도 지중해 안쪽인 프랑스 툴롱 인근 해역에서 얼쩡거리고 있다면, 이건 프랑스로 가는 금수품(contraband)을 싣고 가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나포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가령 1800년 7월, 덴마크 군함이 호송하는 화물 선단 하나가 당시 프랑스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네덜란드 오스탕드(Ostend) 앞바다를 항해하다가 영국 해군의 정지 명령 및 검색에 응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덴마크 군함은 이를 거부했고, 만약 검색을 강행하려 할 경우 발포하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습니다.  영국 해군의 규모가 압도적이었으므로 영국 해군은 덴마크 군함의 거부 표시를 개무시하고 강제 검색에 들어갔는데, 덴마크 군함은 정말 영국 군함에 발포했고, 이는 곧 영국의 응사로 이어졌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고 전체 화물 선단이 모조리 영국에 나포되어 버렸습니다.

당연히 이런 조치는 중립국들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했습니다.  실제로 뭔가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서 프랑스 인근 해역을 항해하게 된 것일 수도 있고, 또 뭔가 사정이 있든없든 엄연한 공해인데 프랑스 인근 바다를 항해한다고 선박과 화물을 빼앗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요.  당연히 모든 나포 선박들은 실제로 프랑스에 금수품을 수송할 의사가 있었건 없었건 영국 정부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재판을 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종종 그 재판에서 이기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럴 경우 영국 정부가 아닌, 그 화물선을 나포했던 영국 해군 함장이 그 피해액을 보상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해당 함장이 원래 돈많은 집안 출신이 아니라면 파산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요.  그러니까 영국 해군의 나포 포상금은 달콤한 만큼 잠재적인 독이 든 사과였던 것이지요.  (Patrick O'Biran의 명작 Aubrey-Maturin 시리즈의 주인공 잭 오브리도 이런 식으로 파산을 당하는 비극을 Post Captain 편에서 겪게 됩니다.  국내에서는 황금가지사에서 이원경씨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는데, 번역 괜찮습니다.  재미있으니 꼭 읽어보십시요.)



(아무리 좋은 책도 우리나라에서는 잘 안팔려서 문제인데, 이 Aubrey-Maturin 시리즈도 판매 저조로 중간에 끊어지지 않을까 염려했었습니다.  다행히 최소한 3편인 HMS Surprise 까지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전체가 20편인데... 과연 다 완간될 수 있을까요 ?  여러분에게 달려있습니다.)



당시 유럽 중립국들이 영국 해군의 공해상에서 저지르는 이런 횡포에 대해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신생국인 미국과의 관계는 점점 험악해져서 1812년 결국 전쟁까지 치르게 되지요.  특히 미국과의 사이가 크게 벌어졌던 것은 같은 언어를 쓴다는 특성상 영국 해군 탈주병들이 미국 선박의 승무원으로 꽤 많이 복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이 공해상에서 금수품 조사를 한다면서 무단으로 미국 선박을 정지시키고 화물 뿐만 아니라 선원들도 조사하여, 영국 억양이 있거나 하면 영국 해군 탈영병이 틀림없다며 마구 체포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지요.  

미국과 영국의 전쟁은 10년 뒤 이야기이고, 1800년 즈음 당시의 제2차 대불 동맹전쟁 때도 이런 영국 해군의 만행에 반발하는 군사 조치가 있기는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2차 무장 중립 동맹 (the 2nd League of Armed Neutrality)입니다.  제2차 ?  그럼 제1차도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  예,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 독립전쟁 당시인 1780년에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영국 해군의 무차별 정선 및 검색에 대항하여 주창한 것으로서, 덴마크-노르웨이 왕국과 스웨덴 왕국이 여기에 가담하여 제1차 무장 중립 동맹을 맺고 영국 해군의 공해상에서의 검문 검색에 저항하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러시아는 해군 함대를 대서양과 지중해까지 파견하여 무력 시위를 펼쳤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영국 함대의 전력이 이들 찌질한 북방 국가들보다는 훨씬 강했으므로 러시아가 큰소리를 칠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역시 미국, 그리고 미국의 독립을 응원하는 프랑스와 한참 전쟁 중에 러시아까지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굳이 러시아와의 무력 충돌을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당시 영국 해군의 주요 해군 물자는 대개 발트해 연안국인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쪽에서 나오고 있었으므로 더욱 이들 북방 국가와의 무력 충돌은 피하고자 했지요.  덕택에 나중에는 이 무장 동맹에 오스트리아나 나폴리 왕국, 네덜란드, 심지어 오스만 투르크까지 가입했고 ,결국 영국은 미국 독립 전쟁에서 쓰디쓴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러시아의 여걸, 예카테리나 2세입니다.  영어로는 Catherine이라고 표기하더군요.)



자, 그럼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으로 촉발된 제2차 대불 동맹전쟁 당시의 무장 중립 동맹에 대해서 보시지요.  이때도 영국 해군의 무차별 검색에 저항하는 동맹의 주창자는 러시아의 짜르 파벨 (Paul) 1세였습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대불 동맹 전쟁의 당사자 아니었던가요 ?  제3국도 아니고 전쟁 당사자가 갑자기, 그것도 적국인 프랑스와 교역을 하겠다는 이유로 동맹국인 영국에게 대포를 들이대는 것은 대체 무슨 해괴한 경우일까요 ?  여기에 얽힌 스토리가 또 다소 깁니다.  

전에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원정을 떠나는 항해길에 거저 줍다시피 점령했던 말타 섬이 그 시초였습니다.  이때 말타 섬에서 쫓겨난 말타 기사단은 흘러흘러 러시아에 보금자리를 정하고, 아예 러시아의 파벨 1세를 기사단 단장, 즉 그랜드 마스터로 선출합니다. 파벨 1세가 약간 괴짜 군주이긴 했어도, 단순히 폼이 난다는 이유로 말타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에 취임할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실 말타섬이 탐났던 것입니다.  그때도 이미 러시아는 겨울에도 얼지않는 부동항을 얻고자 노력하고 있었는데, 추운 나라에서 벌벌 떨던 러시아 해군에게 따뜻한 지중해 한복판의 요지에, 그것도 이미 튼튼한 발레타 요새까지 마련된 말타섬만큼 탐나는 해군 기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  그래서 러시아는 사실 자신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은 프랑스에게 뜬금없이 선전포고도 하고 수보로프 장군에게 대군을 딸려보내 먼 이탈리아와 스위스에서 피를 흘리게 했던 것입니다.  



(이 양반이 바로 러시아의 파벨 1세인데,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말타 기사단장의 정복입니다.  가슴에 있는 십자 표시가 바로 말타 기사단의 상징이지요.)



그런데 일이 묘하게 돌아갔습니다.  마침내 1800년 9월에 말타섬의 프랑스군이 영국군에게 항복하면서 철수했으나, 말타섬이 러시아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영국이 그대로 말타섬에 주저 앉을 기세였던 것이지요.  러시아로서는 아주 기분이 팍 상할 상황이었지요.  어차피 이탈리아로 갔던 러시아 원정군이 이미 1799년에 마세나에게 패배하는 바람에 이미 대불 동맹 전쟁도 때려친 마당에, 더 이상 영국에게 알랑거릴 이유가 없어진 것이지요.  결국 러시아의 파벨 1세는 1800년 12월, 20년 전의 추억을 되살려 덴마크-노르웨이 왕국과 스웨덴 왕국에게 제2차 무장 중립 동맹을 결성합니다.



(약간 뒤의 일이긴 합니다만, 1801년 루네빌 조약 이후 유럽 지도입니다.  보시다시피 당시 노르웨이는 덴마크 왕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사실 덴마크나 노르웨이, 스웨덴은 모두 바이킹의 후손으로서 한통속이지요.)



사실 알고보면 러시아는 이런 무장 중립 동맹을 맺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정작 러시아는 선박을 이용하여 프랑스와 무역할 일이 거의 없었거든요.  이건 파벨 1세의 분풀이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덴마크-노르웨이나 스웨덴에게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이들 국가는 영국과 프랑스 양쪽 국가에 이런저런 해군용 군수품 (그래봐야 목재, 밧줄, 뭐 그런 임업 제품이 대부분)을 많이 팔았거든요.  이들 국가에게는 러시아라는 든든한 빽을 등에 업고 프랑스와 교역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솔깃한 이야기였습니다.  당연히 이들 국가는 이게 왠떡이냐 하며 러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지요.

이 무장 중립의 요지는 다음과 같은 5개의 선언이었습니다.

 - 모든 중립국은 교전 당사국의 항구와 해안을 자유롭게 항해할 권리를 가진다.
 - 교전 당사국 국민이 소유한 화물일지라도, 금수품이 아닌 이상, 중립국 선박으로는 자유롭게 운송될 수 있다.
 - 해양 봉쇄는 적법한 것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근접 감시에 의해 수행되어져야 한다.
 - 중립국 선박은 '정당한 이유와 명백한 사실에 근거해서만' 체포될 수 있다.
 - 선단의 호송을 맡은 군함의 함장이 해당 선단에 금수품이 없다고 선언하면, 해당 선단은 어떤 검색도 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즉 요약하자면 금수품이 아니라면 영국 해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프랑스와 자유롭게 교역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으로서는 이건 해양 봉쇄를 포기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특히 호송 군함이 딸린 선단의 경우, 지휘 함장의 '금수품 없다'라는 말 한마디면 검색을 못한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  세상에 어떤 함장이 '실은 우리 선단에 금수품이 있긴 합니다' 라고 말을 하겠습니까 ?  실제로 알고 보니 그 선단의 화물선 한척에 프랑스로 향하는 화약 30통이 선창에 몰래 숨겨져 있다고 해도, '아, 저는 몰랐습니다.  그 화물선 선장이 저를 속였나 보군요.' 라고 한마디만 변명하면 끝일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여러 나라들 간에 금수품의 정의가 크게 달랐다는 것입니다.  가령 화약 같은 것이야 명확하겠지만, 100년 묵은 떡갈나무로 만든 ㄱ자 모양의 곡재에 대해서는 영국과 스웨덴의 관점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런 목재는 군함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핵심 부품이기도 했지만, 그냥 일반 화물선에 사용되기도 하는 흔한 물건이었던 것입니다.  기타 타르, 밧줄, 강철괴 등등 보는 관점에 따라서 금수품이기도 하고 일반 화물이기도 한 상품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평범한 밧줄인데, 누군가의 눈에는 전략적 군사 물자입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움직임을 관측하고는 얼른 러시아와 북방 국가들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러시아와 프랑스는 이제 전쟁 상태가 아님을 선언하고, 모든 러시아 국적의 선박에 대한 공격 행위를 중단시켰습니다.  사실 당시 바다에 프랑스 군함도 별로 없었고 러시아 선박도 별로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괜히 남의 나라들을 이간질하는 뻔한 선전 행위에 불과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이간질과는 무관하게, 당연히 영국은 이 무장 중립 동맹을 사실상의 프랑스와의 동맹이라고 간주했고, 이를 깨뜨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쓸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설사 러시아와의 일전을 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특히, 이번에는 저 대서양 너머 북아메리카 해안지방까지 다 감시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영국 해군성은 이번이야말로 영국 해군의 집중된 힘을 보여줄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1801년 초, 영국 해군은 영국 동해안의 야머스 (Great Yarmouth) 해안에 대규모 함대를 집결시키기 시작합니다.  불과 작년 12월에 이 무장 중립 동맹이 결성된 것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빠른 반응이었지요.  이렇게 신속한 대응의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봄이 되어 러시아의 크론슈타트 (Kronstadt)와 레발 (Reval) 등의 군항의 얼음이 녹아 러시아 함대가 출항할 수 있기 전에 먼저 덴마크부터 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필 덴마크가 제1의 목표가 되었던 것일까요 ?  간단했습니다.  덴마크가 발트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거든요.  러시아를 치기 위해 발트해로 들어가려면 먼저 걸리적거리는 덴마크부터 쳐야 했습니다.  그 다음에 러시아의 크론슈타트로 항진하여 그대로 러시아 해군을 궤멸시킨 뒤, 만약 스웨덴이 러시아를 응원하러 기어나오면 스웨덴도 마저 응징한다는 것이 영국 해군의 기본 계획이었습니다.  즉, 만약 스웨덴이 도발하지 않는다면 스웨덴은 일단 내버려둔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영국 해군의 뼈와 살을 이루는 떡갈나무가 대부분 다 스웨덴에서 오는 것이었으니, 가급적 스웨덴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이렇게 수십 년된 떡갈나무를 풍부하게 보유한 스웨덴은 영국이 꼭 필요로 하는 국가였습니다.  마치 현재의 미국이 여러가지면에서 껄끄러운 사이일 수 밖에 없는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관계를 좋은 방향으로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것과 비슷하지요.)



이렇게 중대한 원정길에는 당연히 상당한 규모의 함대, 즉 전열함만 12척에 5척의 프리깃이 집결했고, 또 유사시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을 직접 폭격하기 위해 박격포함 (bomb ketch) 7척과 이런저런 소형 함정들도 많이 집결시켰습니다.  게다가 유사시 아예 상륙전을 펼치기 위해 제49 보병 연대를 통째로, 그리고 제95 라이플 연대에서 2개 중대의 라이플 소총병들을 함께 데려갔을 뿐만 아니라 육군의 포병대도 동반시켰습니다.  이런 대함대의 사령관으로는 당연히 가장 유능한 제독이 임명되어야 했는데... 일단은 그냥 당장 보직이 없는 제독 중 가장 선임자였던 파커 (Sir Hyde Parker) 제독이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연공 서열 위주였던 영국 해군의 고질적인 문제였지요.  사실 파커 제독은 이렇게 군사적으로 위험하고도 외교적으로 미묘한 업무에 전혀 어울리는 적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고령인데다 최근에 화끈한 전투를 치루어본 적도 없었고, 또 추운 날씨는 질색이었던데다, 무엇보다도 최근에 젊은 아가씨에게 새 장가를 간 직후라서 아직 찬바람이 쌩쌩부는 황량한 발트해로 항해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영국 해군성에서도 이런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함대의 지휘부에 좀더 젊고 뜨거운 피를 수혈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딱 알맞는 적임자가 영국에 돌아옵니다.  바로 넬슨 (Horatio Nelson) 제독이었지요.



(이분이 바로 하이드 파커 제독입니다.  정말 인자한 신사로 보이는 얼굴인데요 ?)



넬슨은 이미 세인트 빈센트 (St. Vincent) 전투와 나일 강 전투에서 불멸의 영광을 쌓은 영국 해군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넬슨도 수컷이랍시고, 나폴리 왕국에서 엠마 해밀턴 부인과의 염문으로 그간 쌓은 영광을 아주 빠른 속도로 말아먹고 있었습니다.  특히 엠마 해밀턴이 남편을 따라 귀국하자 그를 따라 냉큼 영국으로 귀국을 하여 넬슨의 평판은 아주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영국 해군성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영웅이 이런 식으로 망가지는 것이 전혀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넬슨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를 엠마에게서 떼어놓을 것은 딱 하나, 바로 화끈한 해전이었지요.  해군성은 넬슨에게 즉각 야머스에 가서 파커 제독의 함대에 제2인자로서 합류하도록 명령서를 내립니다.

해군성의 기대대로, 넬슨은 즉각 출항하기를 원했으나, 파커 제독은 어린 새 아내가 참석하고 싶어했던 무도회가 끝나기 전에는 움직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물론 이런 대함대에는 항상 뭔가 준비가 부족했으므로 (물통, 화약, 밧줄, 염장 쇠고기, 수병 충원 등등) 출항을 미룰 핑계거리는 충분했거든요.  하지만 결국 넬슨의 등쌀에 못 이겨 파커는 3월 12일 출항을 합니다.  결국 알고 보니 넬슨은 2인자가 아니라 1.5인자(박명수는 쩜오라고 부르더군요)였던 것이지요.  파커도 바보가 아닌지라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넬슨과 파커의 관계는 그다지 돈독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넬슨도 저 잘난 맛에만 취해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지라, 부하 장교가 우연히 잡은 가자미 한마리를 파커에게 선물로 보내면서 관계 개선을 시도했고, 이런 소소한 정성에 파커도 마침내 넬슨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합니다.





(사나이들의 우정은 가자미를 타고....  그나저나 가자미는 turbot, 넙치는 halibut 입니다.  그런데 어느 것이 가자미이고 어느 것이 넙치인지 구분이 되시나요 ?  힌트, 눈이 어느 쪽으로 몰려있냐가 차이점입니다.  그냥 간단하게는 가자미는 싸고 넙치는 비싸요.)



출항한지 4일만에 함대는 크리스티안산(Kristiansand, 스칸디나비아반도 최남단) 앞바다에 도착했고 여기서 2일간 폭풍을 만나 고생을 한 뒤 3월 21일 드디어 사운드(Sound,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서, 덴마크 말로는 Øresund 외레순이라고 읽습니다) 앞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좀더 영국 함대는 코펜하겐이 위치한 큰 섬인 젤란트(Zealand, 덴마크어로는 Sjælland 셸란)의 서쪽 항로, 즉 영국이 벨트(the Belt)라고 부르는 해협을 통해 크게 빙 돌아서 코펜하겐을 남쪽으로부터 접근하느냐, 아니면 곧장 사운드 해협을 건너 코펜하겐으로 가는 최단거리인 북쪽으로부터의 접근로를 택하느냐 고민을 합니다. 



(코펜하겐이 위치한 섬이 젤란트, 또는 셰란이라는 섬이고, 그 서쪽이 영국인들에게 The Belt라고 불렸던 해협이고, 동쪽이 The Sound라고 불렸던 해협입니다.  먼 남의 나라 해협에 대해서 자기들이 부르는 이름이 있다니, 앵글로색슨은 해양 전투민족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양쪽 항로 모두 각각 장단점이 있었거든요.  벨트 쪽은 방어진지가 거의 없어 육상으로부터의 포격 걱정은 없었지만 물길이 험해 잘못하다간 좌초의 위험이 있었고, 사운드 쪽은 반대로 물길은 안전한 편이었지만 그 해협의 덴마크 쪽 해안인 헬싱괴르(Helsingor)에는, 크론보르(Kronborg) 요새, 즉 세익스피어의 햄릿의 무대가 되었던 엘시노어 (Ellsinore) 요새가 폭 5km 정도의 해협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헬싱괴르와 헬싱보리가 외레순 해협의 목을 조이고 있는 모습 보이십니까 ?)


(헬싱괴르와 헬싱보리 사이를 확대한 위성 사진입니다.)


(헬싱괴르를 크게 확대한 위성사진입니다.  거기에 바로 크론보르 요새가 위치해있습니다.   구글 맵스 덕택에 앉아서도 세계 구경이 가능하군요.  참 좋은 세상이에요.)


(스웨덴의 말뫼에서 바라본 외레순 해협의 모습입니다.  장관이네요.)



특히 이 크론보르 성 바로 건너편에는 무장 중립 동맹의 맹방인 스웨덴의 헬싱보리(Helsingborg)의 요새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운드(또는 외레순) 해협을 건너자면 반드시 양쪽 요새의 포격 범위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덴마크제 또는 스웨덴제의 포탄의 위협이냐 보이지 않는 암초의 위협이냐 중에서 선택을 해야 했지요.  파커 제독은 벨트 쪽을 선호했습니다만, 이번에도 역시 '더 빨리 싸우러 가자'는 넬슨의 성화에 영국 함대는 사운드 쪽으로 향합니다.  파커 제독은 그래도 좀더 안전하게 이 해협을 통과하고자 크론보르 성의 덴마크 수비대 사령관에게 '우리 서로 좋게 그냥 통과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덴마크 사령관은 단호하게 발포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별 수 없이 영국 해군은 단호한 입장의 덴마크 쪽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스웨덴 헬싱보리 요새 바로 턱 밑에 바싹 붙어 사운드를 통과했습니다.  이때가 3월 30일 오전 7시 경이었는데, 영국 해군에게는 다행히, 그리고 덴마크 측에게는 실망스럽게도, 명색이 동맹인 스웨덴의 헬싱보리 요새포들은 전열함 12척의 위용에 짓눌려 침묵을 지켰습니다. 



(크론보르 성입니다.  위성사진으로 보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직접 가서 보면 더욱 좋을 것 같긴 합니다 ㅋ)



이렇게 사운드를 무사 통과한 영국 함대와 코펜하겐 사이에는 이제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습니다.  장애물이 있다면 딱 하나, 바로 덴마크 해군이었지요.  영국 함대는 아마거(Amager) 섬 동쪽에 자리를 잡고 이제 코펜하겐의 방어 준비가 어떤 식으로 진행 중인지 염탐을 했습니다.  파커와 넬슨을 비롯한 영국 함대 지휘부 전원이 작은 프리깃함 아마존(Amazon) 호를 타고 코펜하겐 근처까지 접근하여 정찰을 수행했는데, 그 정찰 결과는 한마디로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혼블로워 시리즈에서도 언급된 1797년의 사건인데, 그림 중앙에 있는 프랑스의 74문짜리 전함 Droits de l'homme 호, 즉 '인권'호를 왼쪽의 영국 프리깃 HMS Indefatigable 호와 오른쪽의 영국 프리깃 HMS Amazon 호가 협공하여 좌초시킬 때의 모습입니다.  이떄의 HMS 아마존이 위에서 언급된 그 아마존 호 맞습니다.)



영국에 비해 덴마크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영국 해군 입장에서는 한개 함대를 파견했을 뿐이지만, 사실 이 함대는 영국 전체 함대의 약 1/8에 해당하는 규모였고, 이 정도만 되어도 덴마크에게는 국가의 흥망이 걸린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따라서 덴마크는 거국적인 저항선을 펼쳤는데, 아무래도 덴마크 해군의 규모가 영국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지라, 정상적인 함대 결전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이미 결론이 내려졌었습니다.  

따라서, 덴마크군은 '폼은 안나지만 실속있는' 방어진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즉, 보유하고 있던 7척의 전열함에게서 과감하게 돛대와 삭구를 다 제거해버리고 코펜하겐 해안가에 바싹 붙여놓았습니다.  원래 포격전이 벌어지면 돛대나 활대 같은 것은 포탄에 맞아 부러지면서 갑판 위에 떨어져 수병들을 다치게 하므로 순수하게 포격전 관점에서 보면 없는 것이 더 유리했거든요.  이 7척의 전열함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니까 무역선이니 소형 슬룹함이니 하는 11척의 잡다한 크고 작은 배들을 역시 돛대와 삭구를 제거한 채 전열함 사이사이에 배치했습니다.  이것들은 전열함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아서 가장 큰 것이 24문의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일부 전열함과 프리깃함으로 '정상적으로' 남겨두어 코펜하겐 항구 내에 배치해두었습니다.  이들은 혹시라도 영국 함대가 곧장 코펜하겐 항구 내로 쳐들어올 것에 대비한 것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1812년 미국 프리깃인 USS Constituition이 영국 프리깃인 HMS Guerriere와 교전하는 모습입니다  저렇게 돛을 달고 서로 꼬리를 잡으려고 노력하면서 싸우는 것이 정상입니다만, 그 와중에 활대와 도르래, 심지어 돛대까지 부러져 갑판 위로 떨어지는 일이 아주 많았고, 그런 것에 맞아 죽거나 다치는 수병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것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전투 중에는 갑판 위에 그물망을 쳐두는 것이 정규적인 전투 준비 중의 하나였습니다. )



이런 방어 태세를 접한 영국 함대의 입장은 난감 그 자체였습니다.  영국 해군의 장기는 수많은 전투와 항해로 단련된 승무원들을 100% 활용하여 탁 트인 바다에서 화려한 함대 기동을 수행하면서 적 함대의 사이를 파고들어 종사(rake)를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예 기동전을 포기하여 돛대와 삭구를 다 제거한채 해안가에 딱 붙어 있는 적과 정적인 포격전을 펼치는 것은 그다지 내키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실은 넬슨이 바로 3년전에 이런 적과 맞부딪혀서 성공적으로 박살을 낸 적이 있었지요.  바로 나일 해전의 전투가 딱 이런 모양새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넬슨은 이렇게 해안가에 늘어선 프랑스 전함들과 해안 사이를 파고 들어 프랑스 해군을 양쪽에서 쌈싸먹는 전법을 썼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는 황량한 이집트 해안이 아니라 덴마크의 홈그라운드였던 관계로, 육상에도 큼직한 대포들이 잔뜩 포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트레크로너(Trekroner,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의 세개의 왕관이라는 뜻입니다) 포대는 해안에서 바다 쪽으로 불쑥 튀어나오도록 바다속에 말뚝을 박아넣고 그 위에 지은 포대로서, 영국 해군 전함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현재도 남아있는 트레크로너 요새입니다.)



이 모양새를 본 뒤, 3월 30일 저녁 파커 제독은 넬슨을 비롯한 전체 함대의 함장들을 3층 갑판에 98문의 대포를 자랑하는 기함 런던 (HMS London)에 모두 불러모아 작전 회의 (council of war)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넬슨은 과연 어떤 묘안을 내놓았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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