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카리비아 해를 거쳐, 이제 다시 유럽 대륙으로 눈을 돌려보시지요. 나폴레옹의 부하들이 생 도밍그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는 동안, 상대적으로 유럽은 평온한 편이었습니다. 물론 근 10년 만에 처음 유럽 대륙 전체의 평화를 가져온 아미엥 (Amiens) 조약 덕분이었지요. 하지만 이 아미엥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아미엥 조약 자체가, 나폴레옹의 이런저런 책략에 의해 프랑스 측에 유리하게 맺어진 조약이기도 했고, 사실 그보다도 프랑스나 영국이나 양측 모두 평화를 진정 바라지도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유럽 제패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었고, 영국은 그런 상황을 막아내야만 하는 처지였으므로, 애초에 둘 중 하나가 파멸에 이르기 전에는 평화가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가령 아미엥 조약을 주도한 영국의 대불 온건파 애딩턴 수상 (Henry Addington) 조차도, 영국 육군 병력을 평화시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18만명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미엥 조약으로 인기를 얻은 애딩턴은, 전쟁이 막상 터지자 친구였던 윌리엄 피트 전 수상과 사이가 멀어졌고 곧 사임했습니다.)
아무튼 프랑스는 영국이 이집트와 말타섬에서 철수하지 않는 것을 비난했고, 영국은 프랑스가 북부 이탈리아의 치살피나 (Cisalpine) 공화국을 사실상 프랑스에 합병해버린 것을 조약 위반이라며 규탄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이 생 도밍그에 대규모 원정대를 파견한 것도 영국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국제 정세가 점점 험악해지다가, 결국 1803년 5월 18일, 영국이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고, 불과 4일 뒤인 5월 22일에 아직 전쟁이 선포된 줄도 모르고 있던 프랑스 상선 2척을 영국 해군이 나포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나폴레옹도 발끈하여 아직 자국내에 많이 남아있던 영국 관광객들 중 18세 이상 60세 미만의 남자들 약 1800명을 모두 체포하여 구금해버렸습니다. 이는 당시 국제 관례상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으나, 나폴레옹의 영국에 대한 증오심은 대단하여 이들 대부분은 정말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할 때까지 10년 넘게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저 지도에서 베르덩과 블로뉴의 거리를 보십시요. 베르덩에 수용되었던 영국 선원 2명이 탈출을 감행, 온갖 고초 속에서도 1804년 블로뉴까지 와서 작은 뗏목을 만들어 영국으로 건너가다가 바다 위에서 프랑스 세관의 경비 보트에 붙잡힌 사건이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블로뉴 병영을 방문 중이던 나폴레옹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용기를 가상히 여겨, 이 두 영국 선원을 스파이로 처형하는 대신 금화 몇개씩을 쥐여주고 영국 프리깃함에 인도해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전쟁은 제3차 대불 동맹 전쟁으로 이어집니다만, 그건 1805년 나폴레옹이 황제 즉위를 한 뒤 이탈리아 왕국의 왕위까지 겸직하면서 사실상 중북부 이탈리아까지 프랑스에 병합하자, 그에 반발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까지 전쟁에 뛰어들면서 벌어진 일이었고, 아직까지는 순수하게 영국과 프랑스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즉 근 2년 동안 영국은 혼자서 프랑스와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 외로운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을까요 ? 하지만 실제로는 1805년 10월의 트라팔가 해전 전까지는, 뭐 눈에 띄는 전투가 전혀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물론 바로 바다, 정확하게는 영불 해헙 때문이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영불 해협 자체는 그다지 넓은 바다가 아닙니다. 그 최단 거리는 약 34km 정도로서, 날씨가 좋으면 프랑스 해안에서 바다 건너 도버의 하얀 절벽이 보일 정도로 가깝습니다. 당시 범선으로도 바람이 아주 좋으면 3~4시간 만에 건널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나폴레옹이 '딱 6시간만 영불 해협을 장악해달라 그럴 수만 있다면 세계를 정복해주겠다' 라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긴 영국 역사 중에서, 영국이 외국의 침공을 받아 점령된 일은 딱 2번입니다. 첫번째가 케사르가 지휘하는 로마군에 의한 것이었고, 두번째는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이끄는 바이킹의 후예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번의 영국 정복도, 영국이 매우 약했던 시절의 이야기이고, 영국이 어느 정도 유럽의 강국으로 등장한 이후로는 어느 누구도 감히 영국 땅을 침공할 생각을 하지 못했지요. 왜 그랬을까요 ?
(이것이 그 유명한 도버 해안가의 하얀 절벽입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여행자들이 대륙에서 보았을 때 정말 상륙이 곤란한 땅으로 보였을 겁니다.)
크게 보면 자연 조건이 2가지 있었습니다. 먼저, 영불 해협에 면한 영국 해안은 유명한 도버의 하얀 절벽입니다. 케사르도 막상 도버에 상륙하려고 보니, 이 하얀 절벽 위에 브리톤족들이 투창을 들고 우르르 늘어선 모습을 보고는 감히 상륙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배 위에서 기다리다가 몇마일 더 옆으로 항해한 뒤에야 간신히 상륙했다고 하지요. 케사르는 영국 상륙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상륙 주정을 탄 상태에서도 그랬다고 합니다. 이처럼 영불 해협에 면한 영국 해안은, (정말 God save the King의 역사가 이루어지려는지) 상륙군이 안정적으로 배를 댈 만한 항구가 별로 없는 편이었습니다.
(영국에 상륙하는 케사르)
그때문에 1588년 영국 침공을 위해 호기있게 나섰던 스페인의 아르마다(armada)도, 정작 영불 해협을 통과하면서도 감히 영국 해안에 상륙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만 정복 때의 윌리엄 공도, 감히 영국왕 해롤드의 해군에 맞서 당당히 상륙하지는 못했고, 보급품 부족과 폭풍으로 인해 해롤드의 해군이 철수한 다음에야 배를 타고 나와 도버 훨씬 서쪽의 페번시(Pevensey)라는 작은 항구에 상륙을 해야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노르만 정복은 프랑스인이 영국을 정복한 것인데도 정작 영국인들은 프랑스인이 아니라 노르만인이다 라고 해서 별로 부끄러운 과거사로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연 조건의 2번째는 바로 바람이었습니다. 당시 선박들은 모두 바람의 힘을 빌어 움직이는 범선들이었는데, 영불 해협은 바로 편서풍 지대에 위치했습니다. 즉, 영국에서 프랑스로 가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데,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범선들의 평균 속도는 약 4~5노트, 그러니까 시속 7~9km 정도였으므로, 영불 해협을 건너려면 약 4시간이 걸렸습니다만, 이것도 바람의 방향이 좋을 때 이야기였습니다. 특히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갈 때처럼 역풍을 받으며 간다고 하면, 8시간이 걸릴지 10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지요.
게다가 당시에는,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러서도,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 사용된 그런 전문 상륙용 주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즉, 당시 상륙을 위해서는 먼저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적절한 곳에 닻을 내려 배를 고정시킨 뒤, 롱 보트(long boat)와 커터 (cutter) 등의 대형 보트를 각 배에서 3척 정도씩 내려 각 보트마다 30~40명의 병력을 태우고 노를 저어 적군이 기다리는 해안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이런 보트들은 이미 병력이 과다하게 탑승한 상태였고, 또 심한 파도를 무릅쓰고 상륙해야 했으므로, 해안가에서 중무장한 적들이 기다리고 있다면 적의 공격에, 특히 적의 포격에 매우 취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어렵게 해안에 닿은 30~40명의 병력 중 1/3 정도는 다음 차례의 병사들을 태우러 다시 노를 저어 군함으로 되돌아가야 했으므로, 해안가에 남은 한줌도 안되는 병력들은 몰살당하기 딱 좋았습니다.
(당시 군함에 싣고 다니던 대형 보트는 크게 롱보트(longboat), 커터(cutter), 졸리보트(jollyboat)의 3가지가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 롱보트는 약 7m 길이에 2m 폭이었지요. 그림에 나오는 유명한 바운티(Bounty) 호 함상 반란 사건에서, 배에서 쫓겨난 블라이(Bligh) 함장은 이 롱보트에 24명의 충성파 선원을 싣고 약 6,660km를 항해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상륙은 적이 없는 해안에 대해 이루어져야 했는데, 나폴레옹에 대해 바짝 긴장하고 있는 영국 해변에는 이런 곳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또, 적이 없는 해안을 어떻게든 찾아서 상륙을 시킨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각 배에서 500명씩이라도 상륙시키려면, 정말 1~2시간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고 적어도 5~6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실제로 아무런 저항이 없었던 1798년 알렉산드리아 상륙 때에도, 나폴레옹은 불과 6천 명 정도를 상륙시키는데 하루밤이 꼬박 걸렸다고 하니까, 적어도 8시간 이상이 소요되었습니다. 이렇게 병력과 물자를 하역하는 도중에, 등 뒤에서 영국 해군이라도 들이닥친다면, 그건 정말 참혹한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었겠지요. 따라서, 나폴레옹이 했다는 '딱 6시간만...' 이라는 발언은 정말 나폴레옹의 해군에 대한 무식함을 드러내는 개드립에 불과한 것이거나 (나폴레옹 본인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상륙전을 해본 경험이 있었으니) 그저 영국 침공을 못하는 이유를 해군에 떠넘기려는 허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 볼품없이 상륙하던 나폴레옹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역시 영국을 지키는 것은 바람이나 절벽투성이 해안이 아닌, 바로 영국 해군 로열 네이비였습니다. 당시 영불 해협을 지키는 함대를 글자 그대로 해협 함대 (Channel Fleet)라고 불렀는데, 이 함대가 바로 영국 해군의 최정예가 모인 영국의 수호신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가령 1801년, 세인트 빈센트 백작(John Jervis, 1st Earl of St Vincent) 지휘 하에 있던 해협 함대에는 전열함만 49척이 모여 있었지요. 이름이 해협 함대라고 해서, 이 함대가 영불 해협 30km 구간 중간에 떡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의 주요 대서양 쪽 군항인 브레스트(Brest), 르 아브르(Le Havre) 등의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습니다. 아예 프랑스 해군을 항구에서 기어나오지도 못하게 하자는 것이 바로 영국 해협 함대의 전략이었습니다.
(프랑스 측에게는 애석하게도, 브레스트나 르 아브르는 영불 해협에서 좀 떨어져 있었고, 가까운 곳인 블로뉴는 수심이 너무 얕은 작은 항구였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바로 이 세인트 빈센트 백작은 1801년, 본국의 해군성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감있게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습니다.
"I do not say, my Lords, that the French will not come. I say only they will not come by sea."
"프랑스군이 영국으로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바다를 통해 오지는 못한다고 말씀드릴 뿐입니다."
('Old Jarvie'로 불렸던 존 저비스 세인트 빈센트 백작의 위엄)
1801년 초반, 아직 아미엥 조약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나폴레옹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영국 침공 계획은 혁명 발발 전부터 탁상공론으로만 여러번 계획되었었고, 1796년에는 (비록 영국 본토 침공은 아니었지만) 아일랜드 원정을 위한 함대가 실제로 출항하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뿐이었지요. 그러나 1801년 당시, 영국과 좀더 유리한 조건에서 평화 조약을 맺기 위해서라도, 나폴레옹은 영국을 침공하는 척 시늉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집행된 계획이 영국과 최단 거리에 있는 불로뉴(정확하게는 불로뉴-쉬르-메르, Boulogne-sur-Mer)에 대규모 영국 침공용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생각으로는, 영국 침공을 위해서는 그저 딱 '6시간만' 바다에 떠있을 필요가 있었으므로, 뭐 대단한 함대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굳이 영국 해협 함대를 격멸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저 대형 보트들을 잔뜩 만들어서 그것을 타고 노를 젓든 돛을 올리든 아무튼 병력을 태우고 해협을 건너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따라서, 대형 전열함들이 정박하기에는 조수 간만의 차이가 너무 커서 부적절했지만, 아무튼 영불 해협 최단 거리에 위치한 이 불로뉴 항구에 소형 선박 또는 대형 보트들을 잔뜩 모아들이고 또 새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여기에 육군 병력들도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의 불로뉴의 모습입니다. 역시 조그마한 배들에게나 적합한 작은 항구에 불과합니다.)
나폴레옹으로서야 침공 시늉만 하는 것일지 몰라도, 영국 해군으로서는 펄쩍 뛸 일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성은 1801년 8월, 발트 해에서의 임무를 어정쩡하게 끝내고 돌아온 넬슨을 다시 불로뉴로 보냅니다. 한마디로 불로뉴에 집결한 프랑스 상륙 함대를 박살내라는 것이었지요. 넬슨은 프리깃함과 다수의 포함 및 박격포함을 동원하여 1801년 8월 4일 불로뉴를 집중 폭격합니다. 5척의 박격포함이 16시간에 걸쳐 약 800발 이상의 폭탄을 투척했으나, 효과는 미미했습니다. 프랑스측의 작은 포함(gun boat) 2~3척이 침몰한 정도였지요. 이 작전은 애초에 넬슨도 내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기술로는, 그런 장거리에서의 포격의 효과는 아무래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넬슨은 잘 알고 있었거든요. 넬슨은 굴하지 않고 두번째로 8월 15일 밤에, 이번에는 넬슨답게 대형 보트들을 수십 척 동원하여 육탄 돌격으로 불로뉴 항구의 프랑스 군함들을 탈취하는 작전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전 역시 엄중한 프랑스군의 대비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사상자만 많이 내고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정황도 더해져, 결국 영국은 자신에게 다소 불리한 조건으로라도 아미엥 조약을 맺어야 했었지요.
(이 1801년 8월의 불로뉴 습격 작전은 넬슨의 보기 드문 패전 중 하나입니다.)
1803년 5월, 영국의 선전포고로 전쟁이 시작되자, 나폴레옹은 이번에는 허세가 아닌 정말로 불로뉴 프로젝트, 즉 영국 침공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진지한 준비였으므로, 엄청난 돈과 인원, 시간을 다 쏟아부었지요.
일단 항구 시설을 대폭 개선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이곳에 대형 선박들을 정박시킬 수는 없었고, 이번에도 이 불로뉴 항구에서는 주로 바닥이 낮고 평평한 대형 보트들이 활발하게 건조되었습니다. 이런 평저선 형태의 대형 보트는 사실 뭐 특별할 것이 없는 것으로서, 날씨가 좋을 때만 영불 해협을 건널 수 있는 수준의 물건이었습니다. 이걸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파도가 거세지기라도 하면 큰일 나는 것이었으므로, 정말 이런 배를 타고 영불 해협을 건너려면 어느 정도 운이 좋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영국 침공을 위해 '뭔가 특별한 선박들을 건조 중'이라는 소문은 바다를 건너 영국민들에게 알려졌고, 이는 영국 언론의 좋은 잡담거리가 되었습니다. 즉, 실제보다 훨씬 과장된, 희한한 형태의 특수 선박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럴싸한 삽화와 함께 신문이나 잡지에 인쇄되어 팔린 것이지요.
(이것이 나폴레옹이 불로뉴에서 잔뜩 만들었던 대형 평저선의 제대로 된 모습입니다.)
가령 실제 프랑스군의 평저선은 길이가 36m, 폭이 12m 정도의 돛과 노에 의지하는 평범하고 둔한 대형 보트였고, 사람만 꽉 채운다면 약 500명의 병력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신문과 잡지에서는 이런 평범한 보트들이 획기적인 신기술로 만들어진 엄청난 크기의 상륙 전용함으로 둔갑했습니다. 가령 어떤 그림에서는 풍차와 수차로 추진력을 얻는 성탑 같은 구조물의 상륙함으로 묘사되었고, 다른 그림에서는 터무니없게도 길이 630m, 폭 450m 정도의 크기에, 약 5만명의 병력과 500문의 대포를 적재할 수 있는, 글자 그대로 물 위에 뜨는 성채같은 대형 구조물로 묘사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그림들은 공포에 질린 영국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돈벌이용 흥미거리에 불과했고,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풍차와 수차로 추진력을 얻는 대형 선박은 정말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에 주로 나오던 것들이지요. 라퓨타 생각이 나네요.)
특히 영국민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았던 것은 바로 나폴레옹의 '공군'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바다로도 건너오겠지만, 영국 로열 네이비로 인한 바다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엄청난 수의 대형 기구를 타고 하늘로도 동시에 침공한다는 소문이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 파다하게 퍼졌던 것입니다. 실제로도 나폴레옹은 이 '공군' 책임자로 소피라는 이름의 30대 여성을 임명했습니다. 아, 영국 침공의 선봉을 맡은 공군 지휘관이 가냘프고 아름다운 프랑스 여성이라니, 얼마나 로맨틱한 일입니까 ? 아마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분이 정말 좋아할 스토리 라인 아니겠습니까 ?
(아~ 이런 모습 ??)
하지만 이 여성, 그러니까 처녀적 이름은 소피 아르망 (Marie Madeleine-Sophie Armant)이었다가 기구 모험가인 장-피에르 블랑샤르(Jean-Pierre Blanchard)와 결혼하면서 소피 블랑샤르(Sophie Blanchard)로 알려진 이 여성은 사실 아름답지도 않았고, 성격도 무척 소심했으며, 결정적으로 공군 책임자도 아니었습니다.
(으헉... 환상을 깨주는 소피 블랑샤르의 모습)
프랑스군은 1794년 마인즈(Mainz) 포위전 때부터 기구를 군사용으로 이용하기는 했습니다만, 사실 기구는 어디까지나 관측용이었지 수송용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도 기구를 군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단지 행사용/축제용 유흥거리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마인즈 포위전에서 쿠텔(Coutelle) 대령이 고안했던 관측 기구의 모습입니다.)
소피 아르망이 1804년 공군 책임자가 되었다는 것도, 사실은 "공식 축제 비행사" (Aéronaute des Fêtes Officielles)로 임명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다만 소문에 이 여성이 정말 기구를 타고 공중으로 영국을 침공할 계획의 초안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기는 했다고 합니다. 이 소문은 사실 프랑스보다는 영국에 더 떠들썩하게 퍼져서, 바다 위에 성채를 띄우고 하늘 위에 기구를 띄워 대대적으로 영불 해협을 건너는 프랑스군의 모습을 그린 신문 잡지가 영국에서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람들은 공포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소피 블랑샤르의 남편인 장-피에르 블랑샤르는 이미 1785년 1월 7일에 영국의 도버 캐슬(Dover Castle)에서 프랑스의 귄(Guines)까지 2시간 30분 만에 기구를 타고 영불 해협을 건너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영국과 프랑스가 편서풍 지대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즉, 범선과 마찬가지로, 영국에서 프랑스로 가는 것은 쉬워도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가는 것은 (적어도 기구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실제로도 로지에(Pilatre de Rozier)라는 사람이 블랑샤르의 성공을 흉내내어 시도했던,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가는 영불 해협 횡단은 1785년 6월 15일 추락으로 끝나 로지에가 사망하는 비극을 빚었을 뿐이었습니다.
(아, 하늘은 어찌하여 영국과 프랑스를 편서풍 지대에 놓이게 하셨는가 ?)
하지만 이 모든 소문과 추측과는 달리,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이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습니다. 일단 나폴레옹 본인이 바다에 대해 정말 무식했는데, 이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든 것은 자신이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나폴레옹 자신이었습니다. 즉, 바닷일은 해군 제독들에게 맡겼어야 하는데, 괜히 해군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참견과 지시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가령 이집트 아부키르 만 해전에서의 대패도 따지고 보면 나폴레옹의 부당한 지시 때문이었고, 나중에 나오겠습니다만 트라팔가 해전의 어설픈 시작도 나폴레옹의 어설픈 전략과 상관없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장 불로뉴에 집결한 해군 함대들만 해도 나폴레옹의 겁없는 무식함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브뤼 제독이 사실 뭐 크게 한 일은 없습니다만 나폴레옹에게 한 행동을 보면 용기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이 일화는 1804년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은 불로뉴 병영에 집결한 병사들을 치하하고 영국 침공 준비를 시찰할 겸, 최초의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불로뉴 병영을 찾았을 때 일어난 것입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수많은 해군 함정들 (그래봐야 주로 평저선인 대형 보트들이었지만)을 사열하겠다고 자기가 오후에 돌아올 때까지 이렇게저렇게 함정들의 배치를 해놓으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돌아와 보니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즉각 나폴레옹 앞으로 불려온 불로뉴 함대의 총사령관 브뤼 (Étienne Eustache Bruix) 제독은 곧 폭풍이 예상되므로 그런 불필요한 명령에 수병들의 목숨을 걸 수는 없었다고 항변했지요. 이런 불손함에 놀란 나폴레옹은 격분하여 들고 있던 말채찍으로 브뤼를 때리려는 제스처를 취했고, 브뤼도 황제의 그런 행동에 분노하여 칼자루에 손을 댔다고 합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말채찍을 집어 던지고 브뤼를 그 자리에서 해임했으며, 마공 (Charles René Magon de Médine) 제독에게 날씨에 연연하지 말고 당장 평저선들에 실제 병력을 태워 사열 대오를 만들도록 명령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날 이 나폴레옹의 고집과 무식함 때문에, 폭풍 속에서 약 30여척의 평저선들이 뒤집히거나 암초에 걸려 200명이 넘는 병사들이 아무 의미없이 물귀신이 되어야 했습니다. 천하의 나폴레옹도 이때만큼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현대적 요트들은 낮은 바닥의 문제를 보완하고자 저렇게 물 속 깊은 곳에 긴 수직날개를 달았지요. 괜히 멋으로 단 것이 아닙니다.)
원래 진짜 바다, 즉 거친 파도가 치는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선박의 용골이 어느 정도 깊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좌우로 들이치는 파도와 바람에도 수평과 항로를 유지할 수 있거든요. 나폴레옹이 잔뜩 만든 평저선은 바닥이 평평했으므로, 잔잔한 연안에서는 좌초 걱정없이 잘 다닐 수 있어 좋았지만, 거친 파도와 바람을 받으면, 뒤집히기도 쉬웠고, 또 뒤집히지는 않더라도 바람 방향으로 자꾸 옆걸음치는 움직임(영어로는 배의 이런 행동을 leeway라고 합니다) 을 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바람이 바위 투성이 해안을 향해 불고 있다면, 이렇게 심한 leeway를 가진 평저선의 경우 속절없이 해안가 암초에 부딪혀 파선하기 쉽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둔한 평저선에 병력을 잔뜩 태우고 바다를 건너다가 영국 해군의 전열함은 커녕 프리깃함, 아니 작은 슬룹(sloop)함에만 걸려도 프랑스의 영국 원정군은 모두 물고기밥이 될 운명이었지요.
(곧 영국을 방문하겠다고 큰 소리치는 나폴레옹과 저 나무로 만든 벽(영국 함대)를 뚫고 오기 쉽지 않을 거라는 영국의 대화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은 영불 해협에서 거친 날씨와 영국 해군을 제거하기 전에는 절대 이루지 못할 꿈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불로뉴에 대규모 원정군을 집결시킵니다. 이들은 대양 방면군 (Armée des côtes de l'Océan) 또는 영국 방면군 (Armée de l'Angleterre)으로 명명되었고, 초기에는 약 15만 명, 나중에는 25만 명 수준까지 늘어납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영국으로 쳐들어간다고 신이 나서 집결했으나, 아무 하는 일 없이 황량한 해변가에 텐트를 치고 숙영을 하자니 점점 사기가 떨어져 갔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한답시고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는데, 그중 하나는 현대 한국군 장군님들도 애용하는 조치였습니다. 바로 강도높은 훈련이었지요. 불로뉴에 집결한 병력들은 계속해서 이런저런 훈련, 특히 행군과 전투 대형 변경 등의 훈련을 받았는데, 병사들의 사기가 높아졌을지는 모르겠으나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절대 그럴 것 같지가 않습니다 !) 확실히 이 영국 방면군의 전투력은 당대 어느 군대보다도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 그대로 나중에 나폴레옹의 대군단 (Grand Armée)가 되어 아우스테를리츠와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의 빛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혹독했던 아일라우 전투에서 이들 중 다수가 전사하면서 이후 나폴레옹의 몰락이 서서히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의 진정한 영광은 바로 이 불로뉴 병영에서 시작된 것인데, 영국을 향했던 총검이 결국 엉뚱하게 유럽 대륙을 정복했던 것이지요.
(불로뉴에서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며 흥을 돋우는 나폴레옹)
나폴레옹이 불로뉴에서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 벌였던 이벤트 중에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제정한 것도 있었습니다만, 별로 돈을 들이지 않고도 매우 효과가 강렬했던 교묘한 술책도 있었습니다. 즉, 병사들을 사열하기 하루 전에, 나폴레옹은 미리 참모들에게 명령하여 병사들 중 이탈리아 원정이나 이집트 원정에 참전했던 병사들의 이름과 얼굴 모습/특징, 그리고 그 소속 중대와 중대 내에서의 번호, 고향과 가족 상황 등에 대해 몰래 조사해오도록 했습니다. 그러고는 다음날 병사들을 사열할 때, 천연덕스럽게 병사들 대오 속으로 들어가 해당 병사를 알아보는 척 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자네 피에르 아무개가 아닌가 ? 여기 있었구만 그래 ! 이집트 무슨무슨 전투에서 아주 용감하게 싸웠던 것을 잘 기억하네. 자네 아버지는 아직 리옹에서 건강히 지내시겠지 ? 뭐야 ? 자네 같은 용사가 아직 훈장을 못 받았어 ? 기다리게. 내가 지금 곧 가지고 오겠네 !"
황제 나폴레옹이 이렇게 일개 병사들의 얼굴을 알아보고 그의 작은 무훈은 물론 가족들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운좋게 대상이 된 그 병사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그 광경을 주변에서 지켜본 동료 병사들에게까지 정말 평생 잊을 수 없는 짜릿한 감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정말 병사들은 나폴레옹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 각오가 섰고, 자신들같은 말단 병사도 공적을 세우기만 하면 정말 프랑스의 원수(marechal)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위 이야기는 나폴레옹의 비서이자 친구였던 부리엔의 회고록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사실 부리엔은 나폴레옹과 매우 안좋게 헤어졌기 때문에 그의 회고록을 100% 다 믿을 수는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폴레옹이 영국 침공 준비를 하는데는, 1천 척이 넘는 평저선 건조부터 항구 시설 개선 사업, 병사들의 급료/군복/무기/식량 조달 및 레종 도뇌르 훈장 및 그에 따르는 연금 등등 해서 정말 엄청난 돈이 들어갔습니다. 1개 방면군에 20만명이 넘는 인원을 집결시킨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거든요. 나폴레옹은 이 돈이 어디서 났을까요 ? 바로 지난편에 설명드린 루이지애나 매각 대금 6천만 프랑을 영국 침공 준비에 다 쏟아부었다고 합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2천억원 정도의 돈입니다. 사실 당시 가난한 신생국이었던 미국도 이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이 거금의 상당 부분을 영국의 베어링 형제 은행 Baring Brothers Bank)에서 빌렸다고 합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영국 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영국 침공 준비를 한 셈이지요. 정말 나폴레옹 본인의 말대로 자본에는 조국도 없나 봅니다.
(예 이 베어링 브라더즈 은행이 바로 1995년에 Nick Leeson이라는 직원이 싱가포르에서 감행한 투기 덕택에 1995년에 파산한 바로 그 은행 맞습니다. 1762년에 Sir Francis Baring과 John Baring 형제가 창시한 이 유서 깊은 은행도 정말 한방에 훅 가더군요.)
한편, 나폴레옹이 영국 침공을 위해 미증유의 병력과 함대를 바로 30km 바다 건너 불로뉴에 집결시켰다는 소식은 온갖 과장 및 억측과 함께 영국으로 빗발치듯 날아들었습니다. 과연 역사상 3번째 영국 정복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이 사태에 대해 영국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었을까요 ?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보시도록 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