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보고 싶은 줄도 모르고
바깥에 이렇게 요란하게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속 편하게 욕실에서 분갈이하고 샤워기로 화분에 흠뻑 물 줬다. 비가 오는 줄 알았어도 식물에 물은 줬겠지만 속이 편하진 않았겠지.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고 물 주고 나온 지금이 속은 더 편하다. 복도에 비 맞아가며 화분 옮기기 싫었을 거야. 비가 아무리 니들한테 영양제라 해도, 오늘은.
샤워기를 내려놓고 욕실에서 나왔을 때 배수관을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서 이 밤에 아직도 빨래 돌리는 집이 있네 하고 생각했는데, 창밖으로 번쩍하는 찰나의 빛이 구름을 갈랐다. 쏟아지는 빗소리였다. 재활용 쓰레기 일찍 버리고 오길 잘했네. 베란다 문 다 닫고 에어컨 틀길 잘했네. 어쩐지 정말 너무 습하더라.
어렸을 때, 부모님은 맞벌이로 바쁘고, 애가 셋이나 되어서 늘 시끄러웠던 우리 집은 방학마다 첫째인 나를 부산으로 내려보냈다. 방학 중에 반은 친가에서 반은 외가에서 지냈는데, 친가는 산 아래에 있는 큰 마당이 있는 집이었고 외가는 걸어서 자갈치시장을 갈 수 있는 곳에서 외할머니가 운영하는 피아노 학원에 붙어 있는 집이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밤에는 가끔 부산에서 쏟아지던 비를 생각한다. 어린 기억 속 부산의 빗줄기는 서울의 것과는 농도도 냄새도 소리도 달랐다.
친가에서 비가 쏟아진 다음 날이면 포도나무 아래에서 두꺼비가 울었다. 두꺼비가 우는 소리보다 두 마리의 개들이 짖는 소리에 나가보면 두꺼비의 울음소리가 낮고 크게 들렸다. 개구린가봐 하며 신나게 다가가다가 멀찍이서 두꺼비를 처음 본 날, 책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크고, 목을 부풀리며 소리를 내는 모습이 위협적인 데다 비에 젖은 땅 색깔보다 진한 갈색을 가진 두꺼비가 너무 무서워, 빗속에 서서 할머니를 소리쳐 불렀다. 그 이후로 다시는 보러 나가지 않았다. 비가 올 때 개들이 짖으면 두꺼비가 왔나 보다 생각했고 험상궂고 탐욕스러운 모습이 떠올라서 오소소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츠리고 무릎을 안았다. 그러면 습기를 잔뜩 머금은 내 무릎에서도 비 냄새가 났다. 땅 냄새, 숲 냄새, 오래된 집의 나무 바닥 냄새, 이불 아래 넣어둔 할아버지의 흰쌀밥 냄새, 할머니 냄새와 함께 뒤섞여서.
외가에서의 여름비는 적당히 비릿한 생선 냄새와 안갯속에 갇힌 듯 무겁고 텁텁하고 더운 공기를 데려왔다. 외가는 안쪽에 살림집이 있는 피아노학원이었고 에어컨이 없는 시절이었다. 밖에 나가 놀 수 없는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도 집에 가지 않고 학원에서 놀았다. 저녁이 되어 모든 아이의 수업이 끝나기 전까지 한시도 조용할 시간이 없는 피아노 학원에서 나는 흐르지 않는 공기 속에 갇힌 피아노 소리와 왁자지껄한 또래 친구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 더운 공기 속에 내 목소리를 보태 가뒀다. 비가 오면 피아노의 나무 냄새가 더 진해졌고 아이들의 목소리도 더 커졌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너무 좋았다. 비가 데려오는 것들. 고여 있는 공기 속에 가둬지는 소리들. 한데 섞여 뭉개지는 목소리들. 낮잠을 자려고 누우면 그런 소리들이 아득하게 들리며 가끔 붕 뜬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늘 또박또박 들리는 건 우리 할머니 목소리. 내가 배고픈지, 삼촌 방 카세트테이프를 뒤지고 있진 않은지, 이모 장롱에서 아끼는 옷을 꺼내 입다가 또 두들겨 맞는 건 아닌지, 자꾸 나를 부르는, 이제는 볼 수 없는 우리 이명희 여사님.
비 오니까 보고 싶다.
덥고 습한 공기가 기억도 가둬버려서
보고 싶지만 더 이상 볼 수 없는 이들의 모습을 흐르지 않는 공기 속에 묶어놓고
비가 오면 그 기억들이 더 선명해졌으면.
그날의 냄새와 소리가 비와 함께 떨어졌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