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내일도 많이 파셨으면
병원에서 나오니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작고 하얗고 차가운 얼음결정체들은 땅에 닿자마자 사라졌다.
우산이 없지만 조금은 맞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병원에서 집까지는 다섯 정거장 거리인데 언제나 병원에 갈 때는 버스를 타고, 집에 올 때는 걸어왔다. 병원에 갈 때나 집에 올 때나 거리가 변할리 없으니 소요시간도 같을 텐데 이상하게 병원까지 걸어가는 길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집까지 빠르게 걸으면 20분이 안 걸리지만 한 번도 20분 만에 집에 도착한 적은 없다.
집에 가는 길에는 어느 골목을 선택하냐에 따라 카페가 서른 개도 넘게 있고, 문구점도 두 곳, 서점은 세 곳, 화장품점도 큰 매장이 두 곳, 작은 브랜드들도 꽤 여러 개 있어서 작정하면 하루 종일 밖에 있기 어렵지 않았다. 농가와 직거래하여 유통마진을 줄이고 건강한 식재료를 파는 식료품점도, 반찬가게도 네 군데나 있는데 그 가운데엔 화룡점정처럼 백화점도 있어서 늘 이 중에 두 군데 정도는 들렀다가 집에 가곤 했다.
보통은 1. 식료품점에 들러서 식재료를 사고 2. 서른 개가 넘는 카페 중에 단골인 카페에서 빵과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은 뒤 집에 들어가는 코스를 선호하는데, 하릴없이 서점과 문구점, 백화점 여기저기를 기웃대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눈을 맞으며 걸을 만큼 분명한 볼 일이 있었다. 위에 적지 않은 가게. 길거리에 임시로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곳. 노점상. 오늘 나의 볼 일은 양말노점상이었다.
병원만큼이나 커다란 약국을 지나 프랜차이즈 빵집과 죽집, 카페를 지나, 꽃집과 떡집을 지나면 양쪽으로 빽빽한 노점상 거리가 나왔다. 유명한 떡볶이집과 가끔 이용하는 과일가게를 지나고 붕어빵과 찹쌀꽈배기 집이 시작되기 전에 양말가게가 있었다. 한 번도 이용해 보지 않았지만 지날 때마다 흘깃거리며 어떤 양말 종류가 있는지 봐두었고 오늘 내가 살 양말은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니삭스라고 부르는 긴 양말이었다.
수술을 한 뒤에 추위를 많이 타게 되었는데 나는 원래 여름에 약하고 겨울에 강한 류였어서 갑자기 타는 추위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내복을 아래위로 껴입어도 뭘 더 입어야 할지 모르겠을 만큼 추워서 바지내복 위에 신을 긴 양말이 필요했다. 여기저기 정처 없이 기웃거리기는 잘 하지만 노점상에서 사장님께 말을 거는 건 어쩐지 어려웠다. 게다가 양말 사장님은 붕어빵 사장님처럼 늘 손님을 기다리는 모양으로 서있지 않고 사람도 들어갈 것 같이 큰 봉지 사이를 이리저리 다니며 분주했다.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 사장님!
분명 크게 부른 거 같은데 마스크 안에서 소리가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 사장님!
- 네! 허허허허허. 뭐 필요하세요?
사장님은 내가 부르기만 했는데 허허허허 하며 웃었다.
천막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 윗부분에 주렁주렁 매달린 긴 양말을 가리키며
이건 얼마예요? 하고 물었다.
- 아 이거 요즘 많이 사가시더라고요 날이 추워 그런가 허허허허허 만 원에 세 켤레 가져가세요! 허허허허허
사장님이 내가 얼만지 묻기만 했는데 허허허허 하고 두 번이나 크게 웃었다.
천장에 걸린 긴 양말의 발가락 부분을 문지르는 듯 만졌다. 부드러웠다.
- 저 이거 세 켤레 주세요.
- 아 이걸로 드릴까요? 오늘 개시 손님이에요! 허허허허허 기분이 너무 좋네!
내가 개시 손님이었구나. 까다롭게 안 굴고 사길 잘했네.
- 근데 요즘 세상에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너무 잘생기셨어!
- 네?
- 아니 우리 딸이 얼마 전에 취업을 했거든요, 우리 딸도 엄청 예쁜데 손님이 너무 잘 생기셨네! 잘생기셨어! 허허허허허허
- 아 네, 고맙습니다.
어쩔 줄 몰라 후다닥 인사를 하고 검정 비닐봉지에 담긴 양말을 받아서 나오는데 사장님의 웃음소리가 계속 들렸다. 왜 그랬는지 나는 뒤돌아,
오늘 많이 파세요!라고 했다.
사장님이 자꾸 잘 생겼다고 하며 웃는데 나는 눈물이 조금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