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식 Feb 24. 2024

그저 매일 다정하고 싶을 뿐


L-테아닌을 먹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로 인한 긴장완화에 도움이 된다는 건강기능식품이다. 테아닌 외에 비타민B 6과 마그네슘이 포함되어 있어 기존에 복용하던 마그네슘의 양을 권장복용량에 맞게 줄였다.


수술과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나면 회복만 남은 줄 알았다. 처음에 병을 진단받았을 때에도, 수술을 앞두고도, 방사선 치료를 할 때에도 나는 씩씩하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자주 농담하고 오히려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을 위로했다. 약과 주사 치료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안내받고 자료도 많이 찾아 읽었지만, 마음이 요동칠 거라고는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비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뒤에 이런 일을 겪게 되니 더 당황스러웠다. 몸의 치료는 레시피가 정해져 있는 요리처럼 병원의 표준치료로 오차 없이 진행되었지만 내 마음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정확하게 내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아차릴 수 조차 없었다. 재난을 겪은 후에 얻은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같았다.


갱년기 증상으로 기분 조절이 어렵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늘어갔다. 내일이 기대되지 않았다. 약기운이 돌고 체력이 떨어지는 밤이면 더 예민해졌다. 점점 자신의 기분보다 나의 기분을 살피는 아이를 보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괴로운 마음이 불어났다. 정신과 협진을 고려했는데 쉬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교수님의 적극적인 권유가 있었으면 등 떠밀리듯 갔을 것도 같은데 기분을 조절하기가 힘들다는 얘기를 어렵게 꺼낼 때마다 교수님은 많이 불안하신 것 같은데 마음을 편하게 먹어라 지금 수치도 상태도 다 괜찮다고 말씀하실 뿐이었다.


나 스스로가 너무 지랄 맞다고 생각한 걸 메타가 알아챘는지 신경안정에 도움이 되는 영양제 광고가 끊임없이 올라왔다. 그중 원재료가 가장 단순하고 내가 알 수 있는 성분들만 들어있는 제품을 골랐다. 정신과 협진보다 좋은 것은 없겠지만 그저 영양제일 뿐이니 먹어보고 플라시보 효과라도 있으면 고맙겠다는 생각이었다. 작년 말부터 고생하고 있는 불면증에도 차도가 있길 기대하며.


어젯밤 11시 22분에 첫 복용을 했다. 남편이 오랜만에 집에 와서 아이가 평소보다 훨씬 늦게까지 놀았는데 날이 서지 않아서 효과가 있는 건가 생각했다. 오늘 내내 약을 먹지 않았던 날들과 비교하며 감정을 살폈다. 평소보다 불안하거나 불만족스럽거나 불행하다는 생각을 적게 했다. 반항심도 덜 들어서 충동적인 행동을 자제하기도 쉬웠다. 아이와 다정하게 눈 맞추고 따뜻하게 얘기하고 여러 번 웃었다. 오랜만에 내가 조금 좋은 엄마같았다. 플라시보일 수도, 그저 오늘 덜 피곤한 날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나는 그저 아이에게 매 순간 다정하고 싶을 뿐이다.


오늘은 밤 11시가 조금 안 되어 테아닌을 복용했다. 이제 잘 시간이 가까워져 오는데 사실 내일이 오는 것이 조금 두렵다. 혹시나 오늘, 내일 치의 다정함까지 모두 끌어다 써버린 건 아닐까. 내일이 되어 다시 불안정한 상태로 돌아가면 어떡하지? 내일은 반드시 내일 치의 다정함이 생겨날 거라고 철썩 같이 믿지 말아야지. 하나도 기대하지 말아야지. 그저 오늘은 우연히 컨디션이 좋았을 뿐이라고 내일은 또 모를 일이라고 생각해야지. 내가 아이를 사랑한다는 거, 그거 딱 하나만 믿어야지.

작가의 이전글 아름답고 무용한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