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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structionist Mar 23. 2019

"금방 되는 거지?"

오늘 하루도 참으로 길고 고된 일상의 연속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짜증났던 점은

나라는 사람은 복합적인 사고가 가능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매일같이 하고 있는 업무는 '어찌됐건 누구에게든 가르치면 몇 번 반복 후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라는 것과

'어찌됐건 누구에게든 가르치면 몇 번 반복 후 가능한' 업무이기 때문에 나의 업무에 대한 중요도 및 복합적 가능성이 낮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업무지시를 하는 양반은 '어찌됐건 누구에게든 가르치면 몇 번 반복 후 가능한' 업무라는 것을 전제로 하여 나에게 늘상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금방 되는 거지?"라는 것이다.


이 "금방 되는 거지?"에는 다양한 근거가 따라붙게 되는데,

그 중 가장 첫번째로 전제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봤을 때는/들었을 때는 상당히 간단하다고 느꼈는데, 너 또한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거지?'라는 강요이다.

여기서는 질문 혹은 의사파악이 아닌 강요인 점을 들어 해당 질문에 상당히 확정적인 대답을 따라붙게 한다.

즉 "금방 되는 거지?"에 대한 대답을 무조건 '예, 금방 됩니다.'라고 해야한다.

여기서 '아니오, 금방 되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해당 사람이 "금방 되는 거지?"라는 질문을 할 정도의 짬밥이 되지 않았거나 예상을 벗어나는 사람의 경우이다.

하지만 우리의 또라이들은 '아니오'라는 대답에 굴하지않고 자신의 입장을 지속해서 고수하며, 원하는 대답이 나올때까지 '어째서 이것이 금방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다.

결국 답은 정해져 있지만, 해당 답을 찾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리면 걸릴수록 우리의 또라이들은 그 사람에 대해서 '말이 안통하는 애'로 낙인찍히게 되는 계기를 선사한다.


두 번째로 "금방 되는 거지?"의 근거가 되는 것은, 실제로 업무가 간단하다는 전제이다.

하지만 이것에는 함정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업무가 간단하다 하더라도 간단한 업무가 단수인지, 복수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진행하는 업무 중 하나를 일례로 들어보자.

나는 하나의 상품을 등록하기 위해 1. 상품에 대해 파악하고 2. 상품에 대한 이미지를 찾고 3. 해당 이미지와 파악한 텍스트를 자회사의 이미지/포멧에 맞게끔 재설정하며 4. 상품 판매 기간에 맞도록 기간을 조정하고 5. 해당 기간에 알맞은 가격을 등록하는 과정을 거친다.

위의 예시를 읽는 것처럼 업무는 간단하다. 단, 위의 간단한 업무가 1>2>3>4>5로 끝나는 것이 아닌 1>2>3>4>3>5>4>3>4>5... 처럼 반복이 지속되는 업무라면?

'간단'이 모여서 시간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기에는 충분하다.

결국 위의 "금방"에 포함되는 것은 1>2>3>4>5였지 1>2>3>4>3>5>4>3>4>5... 는 아니라는 것.


세 번째로 "금방 되는 거지?"의 전제는 바로 '원래 하던대로 해.'가 깔려있는 것이다.

많은 회사가 그러하듯 지금처럼 경기가 좋지 않을 때에는 한 사람이 2명, 3명분을 해주기를 원한다.

이것에는 아이디어 등의 생각을 표출하는 것에도 다수의 몫을 해주기를 바라지만, 보통 중소기업의 경우 단순히 물량을 2배, 3배를 해주길 원하는 곳이 많다.

이렇게 많은 물량을 제작하고 찍어낼수록, 숫자에 압도되어 점점 업무가 규격화되어지고, 해당 규격을 벗어날 경우 업무 시간이 지체될 경우가 생긴다.

즉 규격화된 상품이 아닌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산해 낼 시간이 부족하여 표준화된 규격으로만 찍어낼 수밖에 없는 공장화가 되어간다.

이 공장화를 다른말로 하면 '원래 하던대로 해'가 되는 것이고, 이것을 전제로 한 명이 2명, 3명분을 해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걸려있다.


나는 분명 창의적이고 복합적 사고를 하고 싶고, 텍스트를 생산한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건만,

이번 회사에서는 업무를 진행할수록 예전 공장에서 일하던 20살때의 내가 자꾸 떠오른다.


20살에는 대학보다 돈 버는게 더 좋아서 인근 공장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핸드폰에 들어가는 카메라 부품을 하루 8시간, 10시간씩 보고있다보니 너무 힘들었지.

그래도 어린 나이에 만져보기 힘든 돈을 월급으로 받아서 나름 명품도 사고, 여행도 다녔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그 공장에서 반년을 버티고 퇴사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가 점점 멍청해지는 내가 보기싫었고, 무엇보다 3교대로 일하다보니 너무 힘들어서 '아 공부가 제일 쉬었구나'를 깨달았었지.


그런데 놀랍게도 그 때의 내가 자꾸 떠오르는건, 밀려드는 일을 겨우겨우 처리하며 공장에서 찍어내듯 상품페이지를 만들어내는 내가 오버랩되어서인 것 같다.

"금방 되는 거지?"라고 묻는 그 양반에게 "그럼 금방 니가 하면 되겠네"라고 답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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