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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나쌤 Apr 16. 2023

나는 결혼하고 외갓집에 발길을 끊었다

외할머니 장례식 그 전 이야기...


외할머니는 엄마를 낳은 친모가 아니다. 외할아버지는 첫째 부인에게서 큰 외삼촌을 낳았고, 둘째 부인에게 엄마를 낳았다. 그리고 지금의 외할머니에게 나머지 4명의 자식을 낳았다.




외할머니는 나에게 특별히 애정이 없었다. 외할머니 친 자식 네 명의 열 명도 넘는 손주들이 북적거리는 외갓집에서 나는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알았다. 미움보다 사람을 더 외롭게 하는 건 무관심이라는 것을.




난 결혼하고 외갓집에 발길을 끊었다. 결혼하고 남편을 데리고 외할머니에게 처음 인사를 간 날 난 깨달았다. 나만큼 내 남편도 나중에 태어날 내 아이들도 이 집에서 그림자 같은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그 후로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도 나는 외갓집은 절대 가지 않았다.




"그래도 할머니한테 인사는 드려야지. 명절인데~"


"엄마나 딸 노릇 열심히 해. 난 한 번도 손녀 대접받아 본 적 없으니 손녀 노릇 안 할 거야."


엄마는 이해하지 못했다.


버릇없는 딸이 냉정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정아, 내가 이런 말은 너 가슴 아플까 봐 안 하려고 했는데, 너네 엄마 고생 많이 했다. 네 외할머니가 마당에서 머리채 잡고 내동댕이 친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




엄마가 귀 수술 후유증으로 몇 년 동안 귀가 들리지 않았을 때 외숙모는 엄마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나에게 말했다. 60 넘은 엄마가 가녀린 아이처럼 보였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 자기 자식들을 친자매처럼 돌봐주는 배다른 딸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머리채를 붙잡고 차디찬 마당에 내동댕이 쳤을까?




"우리 엄마잖아."


언젠가 난 외할머니 같은 거 없다고, 외할머니한테 사랑을 받아 본 적도 없다고, 그러니 엄마나 딸 노릇 열심히 하라고 울며 대들던 나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우리 엄마라고...




그땐 이 말이 전혀 이해가 안 됐었는데 지금은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친자식들과 티 나게 차별하고 사랑을 주진 않은 엄마라도 외할머니는 우리 엄마의 엄마였다.




외할머니가 떠나고 나니 후회가 밀려온다. 외할머니에게 나도 최선을 다해 볼걸. 어쨌든 나에겐 유일한 할머니였는데...




어차피 후회는 남은 이들의 몫인가 보다.








저는 요즘 엄마에 대한 글을 자주 씁니다. 그러면서 엄마의 어린 시절과 만나고 엄마의 상처를 대면합니다. 저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바보 같다 생각했죠.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어요.




이모들은 늘 얘기합니다. 우리 언니가 우리들 다 업어서 키웠다고요. 외할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고 하루 종일 바빴기 때문에 그 시간에 동생들을 돌보는 건 모두 엄마의 몫이었어요.




저는 가끔 엄마가 너무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 사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엄마는 늘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이었어요.




우리 엄마는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며 외롭게 성장했지만 저는 엄마가 엄마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준 덕분으로 엄마의 공백을 느끼지 않고 무탈하게 성장했답니다.




엄마는 늘 반찬 있어? 뭐 해 줄까? 먹고 싶은 거 말해. 라고 물어봅니다.




"뭐든, 엄마가 해 주는 건 다 맛있지~"


립 서비스했답니다. 저 잘했죠?


우리 있을 때 잘하자고요. 나중에 남는 건 후회뿐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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