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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Oct 14. 2022

아! 남부로다!

이탈리아 종단 기차를 타고

어쩌자고 아침 여섯 시 십 분 기차표를 끊었던 걸까? 토리노 뽀르따 수자 역에서 살레르노 역까지 총 여섯 시간 사십 분, 아침 여섯 시 십 분 기차를 타도 살레르노 역에는 정오가 넘어 열두 시 오십 분 도착이었다. 거기서 다시 언제 올 줄 모르는 시타 버스를 타고 삼십 분은 넘게 구불구불 좁은 해안도로를 따라 멀미가 나기 직전까지 가야 에르끼에 도착이다.


언제나처럼 집에서 나오기 직전 캐리어에 올라타고 꾹 눌러 겨우 닫았다.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얹혀 있던 자질구레한 짐들은 그렇게 정리.


"수영복이랑 등산화 챙겨 오는 거 잊지 마." 작은 삼손, 친구 세넴의 당부였다. "당연하지!" 그러니 짐이 많아지는 건 당연지사. 우리가 무엇을 하고 싶을지 어찌 미리 알 수 있으랴? 일기 예보도 믿을 수 없다.

일교차가 큰 시기, 10월 중순 이탈리아 남부에 가려면 짐이 많아진다. 우선 수영복 적어도 위아래로 두 세트. 원피스 수영복은 절대 금물이다. '무슨 패션쇼 하러 가냐'한다면 모르는 소리다. 젖은 수영복을 바로 벗어 갈아입지 않으면 감기가 들린다. 그러니 못 해도 수영복 두 벌은 기본이다. '비키니? 네가 무슨 탑 모델이야? 그렇게 몸매에 자신 있어?' 한다면 그것도 또 모르는 소리다. 해변이나 나룻배 위에서 젖은 수영복을 재빨리 갈아입으려면 비키니가 최고다. 한겨울, 어느 햇살 좋은 날 백발성성 할머니 셋이서 선글라스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빨간, 노란, 파란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나란히 해바라기를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탄력을 잃은 피부나 남의 몸매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10월 중순에 바다 수영이라니! 그렇다. 우린 1월에도 2월에도 햇살이 좋은 날은 바다에 들어간다. 햇살이 가장 뜨거운 오후 두 세시 경, 해변에 드러누워 햇살에 앞뒤로 몸을 충분히 데운다. 그리고는 하나, 둘, 셋 소리를 지르면서 물로 뛰어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용기가 없어서 머리까지 푹 담그지는 않는다. 젖은 수영복이야 재빨리 벗어내면 그만이지만, 머리칼이 푹 완전히 젖어버리면 쩡 하고 두통이 올 정도로 추위가 엄습하니까. 왜 가을 겨울에도 차디찬 바닷물에 들어가냐고 묻는다면...... 찬물에 온 몸을 담그고 나와 햇살 아래 몸을 말리면 솜털 하나하나까지 바람에 보송하니 일어나는 느낌이 상쾌하니까.


,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구나. 캐빈 사이즈 캐리어를  채운 짐들은 이렇다. 수영복  , 해변에서 발바닥을 보호해  고마운 슬리퍼, 해변에서 비키니 갈아입을  편한 원피스(편한 원피스는 훌륭한 이동용 간이 탈의실 된다.), 산에 올라갈 때나 해변 위에서 마구 뒹굴어도 좋을 낡아서 더 편한  청바지, 날이 쨍할 때를 대비한  반바지, 강한 햇살을 막아줄 야구 모자, 얇은 바람막이 점퍼,  지고   뱃놀이용 모자 달린 점퍼, 산에 올라갈  가지고  작은 백팩, 잠옷으로 입을 엉덩이 아래까지 내려오는  티셔츠, 세면도구, 여분의 속옷과 양말, 발목까지 올라오는 튼튼한 등산화(돌산에 올라갈 , 친구네 밭일을 도와줄 , 버섯을 찾으러    필요하다. 캐빈  자리 차지를  하는  함정.), 그리고 우리의 즐거운 저녁 식사를 위한 들러리들.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갈아낸 신선한 후추 향과 맛이 나는 뻴라 베르가 1.5리터 매그넘 사이즈 와인, 계란 흰자에 헤이즐넛과 꿀을 넣어 만든 이탈리아식  토로네, 버터와 바닐라의 풍미가 일품인 쿠키 크루미리, 여러 가지 맛의 초콜릿 타르투피니, 포도즙과 , 모과, 헤이즐넛을 넣고 뭉근하게 졸여내서  숙성된 치즈와 찰떡궁합 쿠냑, 트러플을 넣은 오일에 보관한 살라미. ! 그리고 친구가 생선 필렛 뜨는  배우고 싶다고 해서 챙겨간 칼과 잔뼈 제거용 핀셋. ......  자질구레한 것들이 캐빈 백에 모두 들어가 잠긴  기적이다. 솔직히 매그넘 사이즈 와인병이 들어갈지 확신이 없었지만, 올라타서 누르기 기술로 성공했다.


시간을 잘 써 볼 욕심으로 이른 시간 예매한 기차표 덕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 했다. 정리할 것을 좀 하고 잠자리에 든 시간이 새벽 두 시, 그리고는 새벽 네 시 경 나는 이미 차의 시동을 걸고 있었으니까.


새벽 네 시, 보통의 이탈리아 인들에게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아주 이른 시간이다. 덕분에 도로 위는 텅텅 비었다. 어둠과 붉은 가로등 불빛만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거기다 안개까지 깔려 있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선을 따라 여기저기 높고 낮게 둥둥 떠 있는 안개의 층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허연 안개층을 자동차가 통과할 때면 마치 망토를 입은 유령의 습격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괜히 오싹한 기분이 들어 가까스로 용기를 내 몇 번이고 백미러로 뒷좌석을 훔쳐보았다. 괜한 으스스한 기분도 잠시, 삼십 여 분 운전 후 토리노 포 강 쪽으로 가까워지자 강물의 영향인지 고속도로 위가 안개에 꽉 잠겨 전혀 앞뒤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으스스한 기분은 개뿔, 생명이 위태로울 지경이라 바짝 긴장을 하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더구나 고속도로 위 공사 구간이 많아 붉고 노란빛으로 빛나는 번쩍이는 왕화살표가 긴장을 더했다.


교통체증 따위는 없었다. 짙은 안개와 지독한 어둠 덕분에 단 한 번도 시속 100킬로 이상을 밟지 않았지만 너무나 빨리 목적지에 도착했다. 삼십 분을 더 자고 나올 걸 그랬나. 지난번 시칠리아 여행에서 두 번이나 비행기가 취소되는 나쁜 경험의 기억이 오랜만의 여행을 서두르게 만들었다. 변수를 염두에 둔 여행은 여유 있지만 피곤하다.             


아침 다섯 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 기차역 맞은 편 코르소 볼자노 지하 주차장은 을씨년스러웠다. 입구 자체가 봉쇄되어 있다가 내 차가 진입하자 천천히 두꺼운 철문이 올라갔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지하 주차장은 차가 지나갈 때마다 조금씩 불이 켜졌다. 도시 중앙에 위치한 주차장답게 주차 공간은 좁디좁았다. 그나마 조금 더 여유가 있어 보이는 기둥 옆에 주차를 하고 보니, 하필 내가 방치된 지 한참 된 차 바로 옆에 주차한 걸 깨달았다. 두꺼운 먼지와 거미줄이 검은 벤츠 세단 위에 카펫처럼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다. 장난기 있는 누군가는 그 두꺼운 먼지 위로 손가락 그림까지 그려 놓았다.

이 차의 주인은 무슨 사연이 있어서 이렇게 차를 내버려 두게 된 걸까? 기둥과 버려진 차 사이에 주차를 했으니 앞이나 뒤에서 박지 않는 한 문콕 걱정은 없다.


옆에 주차된 유령차에 대한 감상도 잠시, 아무도 없는 새벽의 지하 주차장을 서둘러 벗어났다. 기차역도 별반 다르지 않게 한산했다.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온기와 빛이 있는 곳이 필요했다. 너무 일찍 도착한 탓에 열지도 않은 카페테리아 앞에서 십여분을 기다렸다. 따끔한 목 안으로 간 짠 신선한 오렌지 주스를 밀어 넣은 시간은 아침 다섯 시 삼십 분.

먹지도 않을 브리오쉬는 왜 산 걸까? "브리오쉬도 드실 거죠?"란 말이 떨어지자마자 내 눈에 내가 좋아하는 피칸 페이스트리가 눈에 들어온 게 이유였다. 브리오쉬는 종이봉투에 넣어 넣고 카페테리아를 나왔다.


아침 여섯 시. 2번 플랫폼. 벌써 몇 대의 기차가 떠나고,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여러 번 바뀌었다.

십여 분 있으면 살레르노행 이탈로 기차가 들어올 것이다. 내 경험상으로는 트렌 이탈리아보다 이탈로가 비교적 출발 시간이 정확한 편이다. 토리노에서 살레르노까지 거의 일곱 시간이 걸리는 긴 여행을 해야 하니 일등석으로 예약을 했다. 덕분에 좌석은 넓고 편안했고, 승무원이 시간마다 커피, 콜라, 차, 물, 브리오쉬, 땅콩, 초콜릿 과자, 짭짤한 과자 등을 권했다.  


보통 나의 여행의 시작은 제대로 자지 못 해 따끔거리는 목과 눈이 알려준다. 묽은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고 곧 목이 떨어져라 푹 고꾸라든 채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내 주위에는 온통 푸른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하고 있었다.


로마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다행이다. 그녀가 내려서. 어느 역부터였을까? 훅 하고 시큼한 달갑지 않은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놀랍게도 냄새의 근원지는 내 앞 대각선 방향에 앉은 아주 예쁜 갈색 머리 여자였다. 컴퓨터를 앞에 두고 정신없이 일을 하는 중이었는데, 조금 더웠는지 쟈켓을 벗어던졌다. 그녀가 팔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열리지도 않는 열차 창문을 비상 망치로 부수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간. 십여 분 멈췄던 기차가 다시 출발한다. 여행의 낭만 따위는 없다. 엉덩이가 납작해질 지경이었다. 다행히 엉덩이 뼈가 엉덩이에 구멍을 내기 직전에 기차가 종착지 살레르노 역에 도착했다.


북쪽에서 내려온 점퍼나 긴팔 스웨터를 걸친 사람들과, 남쪽에서 팔랑팔랑 얇은 끈나시 원피스나 배꼽티에 샌들을 신은 사람들이 교차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오후 한 시, 살레르노 기차역 앞 광장은 굉장했다. 햇살이 얼마나 이글이글 불타는지 누군가 작은 불화살을 정확하게 내 두피를 향해 하나하나 겨냥해 맞추는 기분이었다. 한의원에서 한의사가 정성스레 불침을 다다다닥 놓아주는 기분이랄까? 탈모가 걱정되어 팔로 대충 정수리를 가리니 이번엔 요것 봐라 하며 햇살이 팔뚝 위에 기미를 선물해 준다.


10월 중순 정오의 타는 듯한 더위. 아! 남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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