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거품 우유, 라떼 스큐마또(latte schiumato)
12월도 어느덧 중순을 넘어갑니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가게마다 작은 불빛들이 반짝입니다. 연말 분위기가 물씬 하지요. 여기저기 크리스마스 트리나 리스도 많이 보입니다.
이탈리아에서는 크리스마스 트리(Albero di Natale)를 만드는 날이 정해져 있답니다. 바로 12월 8일, 임마꼴라따(Immacolata), 성녀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가진 날이지요. 물론 몇몇 사람들은 11월에 벌써 트리를 만들기도 하지만요. 생각해 보면 크리스마스 트리를 12월 8일에 만들면 기껏 예쁘게 만든 트리를 17일만 (25-8=17) 즐길 수 있으니 아쉽긴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의 전신인 국민학교에 다닐 땐 학기말이 되면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었지요. 빨간색, 초록색, 하얀색의 약간 두꺼운 색지를 잘라 반으로 접어 크레파스, 색연필, 색 사인펜으로 크리스마스 트리, 별, 눈사람 등을 그려대곤 했어요. 멋을 부린다고 물풀을 바른 자리엔 반짝이도 뿌리고, 눈사람 몸통 위엔 솜을 붙이기도 했답니다.
학기말, 연말, 추위, 크리스마스 하니 문득 떠오르는 풍경이 있네요. 도무지 몇 학년 때였는 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추운 겨울, 학기 말이 다가오자 담임 선생님은 교실에 난로를 놓으셨어요. 그땐 1, 2, 3, 4열 분단을 만들어 4열로 길게 복도가 생가게 교실 배치를 하는 게 보통이었는데, (아마도 지금도 그렇지 않나요?), 선생님은 교실 정 중앙의 난로를 중심으로 달팽이 집처럼 책상 배치를 하셨어요. 그리고 매일 자리를 한 칸씩 옮겨 앉게 하셨죠. 골고루 온기를 나눌 수 있게 말이죠.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땐 반 마다 신청을 해서 우유 급식을 했답니다. 여름엔 시원한 우유가 괜찮았지만, 손발이 곱아오는 추운 겨울이 되니 차가운 우유에 어디 손이 잘 가나요? 선생님은 어디선가 아주아주 큰 황금색 주전자를 가지고 오셨어요. 그리곤 우리에게 작은 우유곽을 잘 열어 우유를 모두 주전자 속에 붓게 하셨어요. “이 우유곽 부리 부분을 다시 잘 접어 기다리세요.” 그리곤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주셨지요. 선생님이 따스하게 데워 일일이 다시 우유곽 속에 담아 주시는 김이 폴폴 올라오는 우유 한 모금, 어쩜 그리 고소하고 맛있었나 모르겠어요. 홀짝홀짝 마시면서 우유곽을 감싼 두 손도 따스하게 데울 수 있었지요.
그 따스한 우유에는 하나의 비밀이 있었어요. 모든 집의 아이들이 우유 신청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답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몇몇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따뜻한 우유를 홀짝이는 걸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데 우리 반의 아이들은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모두 우유를 마실 수 있었어요. 모두 함께 데운 우유를 반 아이들 모두가 나누어 마실 수 있게 선생님이 요술 주전자에 넣고 기지를 발휘하신 거지요.
생각해 보니 꿈만 같은 이야기군요. 어쩜 정말 제가 꿈을 꿈 걸까요? 화재 발생이나 화상의 위험도 있었을 텐데 초등학교 교실 안에 커다란 난로가 놓인다거나, 불편하게 달팽이 모양의 나선형 책상 배치라든가 말이죠. 요즘 같으면 “아니, 우리 아이 마시라고 우윳값을 냈는데, 선생님이 뭔데 나눠 마시게 해요?” 하고 성난 학부모에게 당장 항의가 들어왔을지도 모르죠.
어릴 적 경험한 음식의 맛은 아주 오래도록 기억됩니다. 그 동화 같은 난로 위 주전자에 데운 김이 폴폴 나는 따스한 우유 한 모금이 요즘처럼 추운 계절만 되면 떠올라요.
그래서 아침 식사를 하러 커피숍에 가면 부쩍 뜨거운 우유를 자주 시키게 되네요. 이탈리아 커피숍에서는 그냥 얌전하게 데운 뜨거운 우유, 라떼 칼도(latte caldo)를 주문하면 거품 우유, 라떼 스큐마또(latte schiumato)가 나옵니다. 뜨거운 우유 위에 구름처럼 두꺼운 거품이 얹힌 라떼 스큐마또. 홀짝대며 아껴서 마시다 컵 바닥에 남은 거품까지 소중히 떠서 먹지요. 우유 거품처럼 몽글몽글하고 몽환적인 어린 시절의 교실의 기억도 함께 떠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