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거운 헛소리도 미소로 화답해 주는
12월의 첫날 한국에서 부고가 날아왔다. 대학 선배 A의 죽음이었다. ‘대학 선배’. 대학을 졸업한 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런지 그 네 음절의 단어가 낯설다.
부모님이 바라서 들어갔던 지방대 국립대학. 하라는 공부는 않고 1학년 땐 준비기, 2학년 땐 활동기란 이름으로 1-2학년의 거의 모든 시간을 교내 그룹사운드 활동에 쏟아부었다. 우리 학과는 그렇지 않아도 정원도 적은데, 나는 밖으로만 빙빙 도니 학과 안에서는 눈밖에 나게 되었다.
2년 동안의 그룹사운드 활동이 끝나고 휴학. 그리고 복학 후 학부 3학년. 엄마는 내가 교원이 되길 바라셨고, 그렇게 어색한 학과 생활이 시작되었다. 우리 학과는 학과 내 소모임 가입이 거의 의무였는데, 3학년이 되어서야 소모임에 가입했다. 시 쓰는 소모임 ‘산소리’. ‘살아 있는 소리’라는 건지, 산에서 나는 소리처럼 자연스러운 소리’라는 건지 아직 모른다.
산소리. 그 소모임에서 학과 선배 A를 알게 되었다. 학번도 다르고, 나이도 선배가 훨씬 위. 그래도 우린 친구였다.
술자리에선 내가 하는 헛소리를 듣고 선배는 눈이 안 보이게 웃었다. 기가 차서. 나는 선배 A를 떠올리면 두툼한 눈꺼풀이 먼저 떠오른다. 선배의 가르마도. 1:1 중앙 가르마를 탔을 땐 양쪽 앞머리 끝이 S자로 휘어 올라가서 코믹 만화 등장인물 같았다. 그래서 감히 아무도 놀리지 않는 선배를 나는 놀렸다. 그러니 선배는 기가 차서 웃을 수밖에. 내 놀림이 통했는지, 그 후,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사무를 보는 일을 할 땐 머리 스타일을 바꿨다. 머리를 짧게 잘랐으니 1:1은 무리. 4:6에서 3:7 정도였던 것 같다. 선배가 졸업을 하고도 우린 여전히 대학가에서 가끔 술을 마셨다. 나는 여전히 싱거운 헛소리 담당, 선배는 “너 때문에 웃는다.”하며 별종 보듯이 나를 봤다.
난 학사 졸업을 하고 기적적으로 대학원에 붙었고, 그 후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린 대학가에서 가끔 술을 마셨다. 언제였을까 나의 마지막 헛소리가 선배를 웃긴 저녁이.
난 몇 년 동안 학교를 잘 다니다, 훌쩍 겨울 방학에 이탈리아 여행을 했고. 그 후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석 달 간의 여행에서 돌아온 후엔 백화점에서 유아 교실을 하는 사촌 언닐 따라 돈을 좀 벌다 다시 이탈리아로 왔다. 미술품 복원 학교, 요리 학교 통역을 거쳐 요리 학교 정식 코스를 밟고 어느새 난 전업 요리사로 부엌에서 새파랗게 젊은 애들과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한국어 통역일은 차라리 가뭄의 단비였다.
H를 통해 선배 소식을 들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했다. 공모전 상도 받았다고.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자정이 넘은 시간, 키친에서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안고 나오다 A 선배를 떠올리며 찬바람에 이가 시릴 정도로 활짝 웃었다.
‘참 훌륭하다 선배!’
몇 년이 지나고 얼마 전. 2022년 12월 첫날의 소식은 달랐다. 선배 A의 부고. 믿을 수 없었다. 선배는 여전히 한국에 있고, 내가 또 헛소리를 하면 “허허! 이 실없는 친구를 보게”하며 웃을 것이다.
선배 A의 죽음은 나 외에도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처럼 지금까지 억지로 언급하거나 회상하지 않거나, 혹은 아주 여러 번 떠올리고 회자하는 식으로 각자의 당혹감과 상실감을 마주했다.
“선배가 떠나야 이렇게 우리가...... 선배가 여전히 세상에 있었더라도 우리가 선배를 이렇게 떠올리기나 했을까?” 내내 선배 A의 빈소를 지켰던, 선배와 각별했던 H가 8시간이 떨어진 수화기 너머에서 말했다.
“이런 이야기 나눌 사람이 너뿐이다.” H가 말했다.
“저도 친구라고 부를 사람은 거의 없어요. 아무 생각 안 하고 그냥 툭 하고 아무 생각이나 맥락 없이 이야기해도 들어줄 사람.”
몇이나 될까? 세상에. 내 헛소리에 웃어 주거나, 살다가 아주 가끔은 날 떠올려 줄 사람.
살면서 선배 A를 자주 떠올리진 않았지만, A는 지금도 대학가 주점,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아야 하는 낮은 나무 식탁 앞에 있다. 두툼한 누꺼풀로 눈이 안 보이게 웃으면서.
우리는 아직도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