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윤 Aug 22. 2022

언어폭행 로드킬 금지!!!

말로도 때리지 말라



마당놀이로 유명한 손진책 연출님의 극단 미추 연극 학교 생활을  때였습니다.


극단 미추는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한 언덕 위에 위치해 있었어요. 지하철 마지막 구간 북의정부 역에서도  시간에   지나는 버스를 타고,   시간은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죠


당시 저는 20대 초반이었고, 대학을 휴학하고 양주로 올라갔었습니다. 극단 아래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방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집을 구하기가 어려워 코딱지 만 한 부엌 하나, 화장실 하나 딸린 단칸방에서 연극학교 동기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어요.  당시 극단과 다른 세상을 이어주던 저의 다리는 한 시간에 한 대 지나가는 51번 버스였습니다. 북의정부 시내라도 가게 되는 날이면 연극 학교 동기 몇과 소중하게 버스 시간표를 손에 쥐고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추울 때는 손을 호호 불고, 발을 동동거리면서 말이죠.  “안녕하세요.” “예, 어서 와요. 이 아가씨들은 언제나 밝아서 좋아. 또 의정부?” “네.” “어서 앉아요, 이제 출발하니까.” 친절한 버스 운전기사의 인사는 외출을 더 즐겁게 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꽉 찬 연극 학교 일정에서 쉬는 날 외출은 꿀맛이었어요.


하지만 대개 시골 버스들은 일찍 끊기게 마련입니다. 북의정부 시내에서 늦게까지 맥주라도 한 잔 하는 날이면 극단 근처까지 오는 버스를 놓치기 일쑤였어요. 대안은 극단에서 30-40분 걸리는 곳까지만 가는 다른 버스를 타는 거였죠. 어둠 속에서 걸어야 했지만 동기들이 함께여서 무섭지 않았어요. 달이 환한 날은 달빛 아래, 다 같이 판소리 연습을 하며,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걸었답니다.


  그런데 그 길은 우리만 다니는 평화로운 오솔길이 아니었어요. 마지막 몇십 분의 구간은 인도도 없는 길, 대형 트럭이 쌩쌩 속도를 내서 달리는 무서운 길이었죠. 가드레일에 바짝 붙어 일렬로 걸을 때면 종종 도로가에 형체를 알 수 없이 납작하게 쥐포 꼴이 된 작은 동물의 사체가 보일 때가 있었어요. “어멋, 깜짝이야! 이것 봐. 고양인지 갠지 모르겠다.” “어머, 어떡해, 불쌍하다.” “얘, 남의 이야기가 아니야. 우리도 이 꼴을 당할지 누가 알겠니? 가드레일에 더 바짝 붙어서 걸어봐.”놀란 가슴을 달래며 한 줄로 한 줄로 바짝 붙어 걸었습니다.


의정부로 가는 버스 기사들이 언제나 친절하신 분만 있는 건 아니었어요. 가끔은 아주 불친절한 기사도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 묵묵부답. 그런 운전기사들은 우리에게만 불친절한 게 아니었습니다. “의정부 까요?” “그래, 의정부 간다. 새끼야, 돈 내! 야! 빨리 앉아! 넘어지면 누굴 곤란하게 하려고! 하여튼 깜둥이 새끼들은 안 돼.” 돈 셈이 느려 꾸물대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야, 너’하며 험한 말을 사납게 내뱉던 기사가 있었어요. 아무 이유도 없이 욕을 듣던 승객은 근처 공장에서 일하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람 같았습니다. 한국말이 어눌해선지 대꾸도 제대로 하지 못 하고, 사나운 기세에 기가 눌려 한 마디도 대거리하지 않고 자리에 가서 앉더군요.  ‘대체 피부색이 뭐가 문제람?’ 지금 같으면 “아저씨,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듣기 불편하네요.”하고 한 마디 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는 그저 그 기사와 내가 같은 한국인이라는 게 부끄럽고 그 외국인에게 미안할 뿐이었어요.


얼마 전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외국에서의 동양인 차별이 큰 이슈가 되었었죠. 아무 이유도 없이 동양인들의 혐오의 대상이 되어 욕지거리를 듣거나, 폭행을 당하거나 했었죠.  그 뉴스를 보며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분노했었나요?


다행히 제가 지내는 지역은 이탈리아의 작은 시골 마을이라 여태껏 그런 대우는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락다운 기간 동안 기분 나쁜 일이 한 번 있었습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대형 마트, 락다운 기간에는 줄을 한 시간은 서야 들어갈 수 있는 그야말로 좁은 문이었죠. 마트 수위들이 무슨 어깨에 계급장을 단 듯 고개가 뻣뻣해지던 때였어요. 한참을 기다려 슈퍼에 들어가도, 즉석으로 얇게 썰어 파는 프로슈토며 다양한 지역 치즈를 원하는 중량대로 사려면 신선 코너에서 또 번호표를 뽑아야 했습니다. 번호표를 뽑고 오랜 기다림 끝에 기쁜 마음으로 “Buongiorno 안녕하세요.” 밝게 인사했다. 그런데 신선 식품 코너의 한 점원이 제 인사도 무시하고 대뜸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Dimmi! cosa vuoi? 말해, 뭘 원해?”라고 내뱉었습니다. 이탈리아는 한국처럼 극존칭을 사용하는 나라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를 언제 봤다고 대뜸 내뱉듯 반말인가 불쾌했어요. 동양인을 향한 멸시를 느끼기 충분했거든요.  “Mi scusi, ma ci conosciamo? 죄송하지만 우리가 아는 사이였던가요?” 하고 톡 쏘아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기분은 망친 뒤였고, 논쟁을 하기에 제 뒤의 줄은 너무나 길었습니다. 시간을 허비하며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저도 밝은 목소리를 거두고, 사무적이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프로슈토를 주문하고 돌아섰습니다. 무사히 장은 보았지만, 그 순간 단 몇 초의 대화로 저는 이미 하루 기분을 망치게 되었어요.


  다음날 우연히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태리 인인 동료는 말했어요. “, 내가 이태리 인으로써 대신 사과할게. 가끔 그런 예의 없는 사람들이 있어. 그러니 슈퍼마켓에서나 일하지. 네가 이해해.” 제 속상할  알고, 그렇게 말했겠지만, 저  동료의 말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러니 슈퍼마켓에서나 일하지.’라니요? 정확히  직종에 대한 폄하였습니다. 하지만 기껏  대신 화를 내는 동료에게 무안을 주기도 주저되었습니다.  결국 “네가 대신 화를 내준  고마워. 그런데 생각해보니  직원도 많이 피곤했겠다 싶어.”하고 대꾸하고 말았죠. 다시 생각해보니 코로나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직장이 문을 닫아 어쩔  없지만 쉬는 마당에, 슈퍼 직원들만 끊임없이 과로를 해야 하니  신경질이 아주 조금 이해가 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제  불똥은 아니었죠. 그리고 제 동료도 그런 식의 말은 하는  아니었습니다. 우리 식당에  먹으러 온 누군가가  동료를 보고 “그러니 레스토랑에서나 일하지.”하면  아인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대꾸를 했을까요?



요 몇 년 사이 한국에서 갑질 관련 낯 뜨거운 뉴스를 종종 날아왔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이나 말로 상처를 주고받을까요?


백석리의 동물들이 영문도 없이 납작하게 죽어나갔듯이, 이유도 없이 누군가가 언어 폭행으로 다른 사람을 로드킬을  , 현장에서 저는 몇 번이나 침묵으로 방관자가 되었을까요


저도 지위와 상황을 이용해 주위를 살피지 않고 기분 내키는 대 누군가를 대하지는 않았을까요?  마디 말로 사람의 기분을 납작하게 만들어 로드킬  일은 없었을까요?     


나의 예의는 상대방은 물론 나 자신에 대한 존중이고 보호라고 생각합니다.


예의 있지만 분명하게  말은 하는 사람, 누군가 말로 사람을 해치려 할 때 “잠깐만요!”하고 멈추라고, 빨간 신호등 하나 켤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작가의 이전글 무더웠던 이탈리아, 한여름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