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윤 May 21. 2020

아주 사적인 에너지발전소,더욱 사적인 우울패턴 연구소

조그맣고 보잘것없지만,  당신을 위해서 잠긴 글문을 엽니다.

아침 7시 반에 집을 나섰다. 또다시 길에서 예고 없이 폭우를 만날지 모르니 모자 달린 방수 잠바도 잊지 않고 챙겨 넣었다. 커피숍에서 커피는 조금만 넣은 카푸치노와 살구 마멀레이드 브리오쉬, 토마토 브레사올라 샐러드 빠니노 작은 것 하나를 부탁했다. ‘예쁜이’라는 기분 좋은 인사말과 따뜻한 미소는 덤으로 얻었다. 카푸치노는 손에 쥐고, 정갈하게 봉투에 담긴 브리오쉬와 빠니노는 백팩에 넣었다. 선물로 받은 미소도 작게 접어 입꼬리에 걸었다.     


어제 레스토랑 긴급회의, 일주일 남짓만 있으면 레스토랑 복귀다. 남은 하루하루를 휴가처럼, 이탈리아에 처음 온 여행자처럼 보내고 싶었다. ‘오늘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가자.’     


띠링! ‘그럼 정말 글에 쓴 것처럼 요즘 업이 걷기야? 레스토랑은 아직이고?’ 친구의 문자다.

그렇다. 레스토랑은 아직이다. 정말로 요즘 본업이 걷기가 된 것 같다.      


‘나는 왜 걸을까?’     


내가 베르나르 올리비에도 아닌데. 그는 퇴직 후 65세에 혼자 걷기 여행을 떠나 1099일 동안 12000km를 걸었다고 한다. 그냥 km를 날짜로 나누면 그는 하루에 약 10.9km를 걸은 셈이다. 나는 5월에 들어서는 하루에 20km 가까이 걷고 있다.     


나는 왜 걸을까?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살기 위해 걷는다. 삶을 지탱한 에너지를 만들어 내려고. 걸으면 하루를 버틸 힘이 생긴다.     


5월 4일 이전에는 식료품 구입 목적 이외에는 합법적으로는 집 밖을 나갈 수 없었다. 그 전에는 –그렇다, 나는 불법 보행자였다.- 좁은 샛길로만, 흙길로만, 포도밭 구릉 아래 눈에 띄지 않는 숨은 길로만 걸었다. 비가 오면 꼼짝없이 집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점점 마음이 답답하고 허해졌다. 아무 이유나 목적 없이 우울해지는 날이 늘었다. 급기야 너무나 우울한 나머지 해도 지기 전에 저녁 대여섯 시에 침대에 누워 하루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기도 했다.      


4월 말 어느 화요일 아침, 잠을 잘 자고 의식이 돌아왔는데 짜증이 났다. ‘잘 자고 나서 아무 이유 없이 어떻게 이렇게 우울할 수가 있지?’ 내 정신 상태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히 ‘아침 우울’이라는 구글 키워드로 검색을 했다. 


한 정신과 의사의 글을 찾을 수 있었다. 아침에 우울한 이유는 뇌가 방전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방전된 뇌의 충전 방법으로 몇 가지 제안을 했다. 우선 감정 조절을 하지 말고 받아들인 후, 다른 사람과의 따뜻한 연결, 혹은 자연이나 문화와의 교감을 통해 에너지를 충전하라는 게 그의 제안이었다.     


그의 생각을 다시 나의 문장으로 정리하니 이해가 되었다. ‘우울이나 불안, 초조 등 부정적 감정은 에너지가 고갈될 때 생길 수 있다. 그러니 에너지를 충전해라.’ 그가 말한 세 가지 에너지 충전 방법은 그러고 보니 힘들 때면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하던 것들이었다.     


푸른 풍경을 보거나 새소리를 들으면, 그 자연의 에너지가 내 영혼 속으로 즉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나도 생명이 있는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일까? 어떤 어댑터도 필요 없이 바로 찬란한 봄의 에너지가 흡수되었다. 힘들 때 포도밭 산책은 나에게 큰 에너지원이 되었다.     


작가가 이미 이 세상에 에너지를 가진 한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온 열정을 쏟아 쓴 글, 그림, 조각품 등을 보면 나도 모르는 내 속의 어떤 곳에서 활기찬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힘들 때든 힘들지 않을 때든 ‘다른 사람과의 따뜻한 연결’을 누가 싫어하랴? 대부분의 경우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전화 통화나 문자 메시지, 이메일도 도움이 되었다. 와이파이처럼 사람이 나누어주는 에너지를 공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계속 사람에게 기대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세 가지 방법들은 모두 외부에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해법이다. 외부가 아니라 내 내부에 에너지 발전소를 돌리거나 증폭시키는 방법은 없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의 경우, 걷는 동안은 우울이나 불안, 초조를 확실히 덜 느꼈다. 마치 내 속에 작은 자가 발전소 펌프가 내 걸음걸음을 따라 ‘퐁, 퐁, 퐁’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걷고 나도 여전히 우울했다. 나 스스로 우울함이 아주 위험한 상태라고 느껴졌을 때, 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아니, 어쩜 일어나자마자 우울하고 짜증이 치밀 수가 있냐고.  내 상태가 아무래도 위험하게 느껴진다고. 그나마 효과가 있던 걷기도 오늘은 별 도움이 안 된다고. 그러자 그는 내게 두 가지 조언을 했다. 


“극심한 우울증 환자들에게 의사들이 달리기를 권한 대요.” 

그럴 수 있겠다. 느린 걸음을 따라 천천히 만들어지는 에너지도, 심각한 우울함 앞에서는 금방 소진될 터였다. 그렇다면 발전소가 더 빨리 돌아가면 된다. 조금 더 우울한 날은 빨리 걷거나 더 오래 걸었다.


“뭔가 일을 만들어 봐요.” 

아! 그 해법은 새로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하는 것. 걷기나 달리기처럼 그 역시 내 속에 에너지 발전소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냥 걷기만 하다가, 걸으면서 이탈리아 어로 된 역사나 문학 강의를 찾아 듣기 시작했다. 하루에 못 해도 세 시간은 걸으니, 매일 세 시간 동안 듣기 연습을 하는 셈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아졌다.      

글쓰기도 다시 시작했다. 처음에는 백지 위에 토해내듯이 타이핑을 해서 숨겨두고 나만 보았다. 나조차 보지 않고 잊어버리거나, 어디 둔 지도 모르고 영영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러다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하고 몇 개의 글을 올렸다.     


그런데 나를 공격하는 우울이란 놈은 너무나 강력했다. ‘그래, 누가 그랬지, 그저 그런 글은 네 일기장에나 쓰라고. 나도 이런 잡문이나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띠링!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작가님, 다음 글은 어제쯤 볼 수 있나요?’      


응? 아...... 어제 레스토랑 회의 끝나고 부랴부랴 케이크를 만들어 멀리 알따 랑가 Alta langa로 친구 엄마 생일 초대를 가느라 브런치에 글을 올리지 않았다. ‘내 글을 누가 기다린다고.....’ 하는 생각도 있었다.       


‘언니, 왜 글을 안 올리셨어요? 아침이 되면 언니 글 알람이 와 있어요. 하루 30분 정도 언니 글을 읽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이라구요.’     


‘네가 쓰고 내가 읽으니 넌 작가야.’     


오, 이런. 하루 글을 올리지 않았더니 아끼는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시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차만 있으면 여기저기 가 볼 텐데......?’ 내가 그동안 무슨 이런 약한 생각을 했었나? ‘다리만 있으면 되지! 간다!’ 라 모라 La Morra 쪽에서 언제나 보던 곳, 오늘은 카스틸리오네 팔레또 Castiglione Falletto 로 가보자. 오후 2시까지는 구름이라더니, 비탈길을 오르는데 햇살이 정면으로 얼굴을 강타한다. 오늘 기미 주근깨 꽃잔치가 열리겠다. 그래도 좋다. 제군, 준비됐나? 쫄지 말고, 고!



저는 다른 사람에 비해 외로움도 우울도 초조도 불안함도 더 많이 느끼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씩씩하게 멋있게 잘만 살아가는데, 왜 나만 이럴까 자괴감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속을 툭 터놓을 수 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저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울하거나, 외롭거나, 불안하거나, 초조하거나, 슬퍼도 됩니다. 실은 저도 그렇거든요. 그 우울이라는 놈이 출몰하는 조건, 취향, 습관, 출입경로를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저는 스스로 심각한 상태라고 생각되면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기분이 나아지는 작은 일’을 시도해 봅니다. 포도밭 언덕길을 걷거나, 친구에게 전화를 하거나, 산책길을 갈 때 만나는 주황색 털과 검은 털이 섞인 개 빌리에게 인사를 하러 갑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록합니다. 돌아보면 ‘우울의 패턴’을 파악할 수 있을까 하구요. 조그맣고 사적인 보잘것없는 글이지만, 저의 글이 이 지구 상에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에너지가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진은 직접 찍은 사진만 올립니다. 직접 찍은 사진을 쓰지 않을 때는 따로 언급하겠습니다. 오늘 글의 커버 이미지는 2020년 5월 20일 수요일 카스틸리오네 팔레또 Castiglione Falletto 에 위치한 체레또 Ceretto 의 브리코 로케 Bricco Rocche 포도밭과 와이너리 정문입니다. 저의 모든 글과 사진은 출판용입니다. 저작권을 존중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친구야, 나 알바 다녀왔어." "무슨 알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