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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May 22. 2020

요리 안 하는 요리사

행복은 살 수 없다. 하지만 와인은 살 수 있다.

아침에 6시쯤 눈이 떠졌다. 어제 무리한 탓인지 온 몸이 쑤시고 팔다리를 펴기도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어제는 아침 7시 반부터 꼬박 12시간을 쉴 새 없이 움직였으니. 아주 천천히 일어나 침대를 정리했다. 주름 없이 반듯하게 침대보 정리를 하고 나면 하루 일이 구김 없이 잘 풀릴 것 같다.  

    

집은 나선 시각은 8시 반. 어제보다 한 시간이 늦다. 덕분에 집을 나서자마자 어제에 이은 강렬한 햇살 세례에 피부가 다시 벌겋게 익기 시작했다. 5km 정도 걸었을까? 자주 쉬었다 가는 교회 처마 아래 그늘에 앉았다. 도무지 햇살 아래로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교회 그늘에 앉아 미뤄두었던 몇 가지 용무를 보았다. 두 달 넘게 닫혀 있던 도서관에 전화해 책 반납 방법을 묻고, 아무리 전화해도 받지 않는 CISL 대신 인터넷으로 세금 정산 정보를 검색했다. 올 해는 길었던 자택 격리 기간 때문에 7월 30일에서 9월 30일로 세금 정산 기간이 연장되었다. 아직 급하게 예약을 하지는 않아도 된다.     


오늘까지 꼭 7일, 그 후 다시 출근이다. 5월 말에야 레스토랑이 문을 여니, 여름휴가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아! 지금 이 기간에 남부 아말피에 친구들을 보러 갈 수 있다면?’ 급하게 정보를 검색했다. ‘오, 이런...... 6월 3일 국경을 여는 날이 되어서야 주 경계도 함께 풀린다니’ 6월 3일 전까지는 주를 넘어서 가려면 이유가 인정되는 통행증이 있어야 한다. 가볍고 환하게 부풀었던 마음이 '픽' 하고 갑자기 꺼져버렸다.     


햇살은 너무나 따갑고, 공기는 뿌옇고 무겁다. '흠...... 모라 언덕을 거쳐 바롤로까지 가고 싶었는데.'  


이런, 농부들이 하는 일을 보니 며칠 동안은 포도밭 근처로 걷지 않는 편이 좋다.       

지난주 까지만 해도 농부들은 필요 없는 포도 순을 따내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이 자라는 포도 덩굴을 하나하나 지지대에 묶는 일을 했다. 요 며칠은 포도밭 일꾼들의 일이 바뀌었다. 포도밭에 약을 치는 일이 시작된 것이다. 통유리가 달린 작은 자동차 뒤에는 커다란 팬이 달려 있고 거기서 분수처럼 약품들이 뿜어져 나왔다. 어떤 약품인 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살충제가 아닐까?      


오늘은 오래 걷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생긴 셈이다. 이렇게 나왔는데 아쉽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좋아하는 와이너리다.  “아, 저번에도 왔었죠? 다음에 오면 포도밭을 구경시켜 줄게요. 지금 약을 치고 있어서 며칠 동안은 근처에 안 가는 게 좋아요. 하하하 그러게요...... 약을 쳐야 한답니다.” 와이너리 안주인은 약을 친다는 말을 본인이 해 놓고 겸연쩍은 모양이었다. 요즘은 워낙 유기농 와인이 대세니, 약을 준다는 말을 하기가 조심스러울 게다. “저 돌체또 한 병, 아니 두 병 살게요.” 어제 햇빛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어깨 때문에 무겁게 등짐을 지기가 부담스러웠는데, 막상 와인병을 마주하니 한 병만 사려던 마음을 바꾸었다. 날이 더워지니 네비올로가 부담스럽고 도수가 낮은 돌체또가 좋아진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한바탕 찬물 샤워를 했다. 찬물로 샤워를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내가 내는 비명소리인데도 그 괴상한 소리에 웃음이 났다. 어제의 강렬한 햇살이 어깨와 얼굴뿐만 아니라 눈도 태운 모양이었다. 눈이 아주 꺼끌꺼끌했다.      


잠깐의 낮잠 후, 108배를 시작했다. 어제에 이어 이틀째다. 어제는 20배가 채 못 되어 갈 때 ‘아이고야, 죽겠구나’ 소리가 절로 나왔다. 20대의 겨울 첫 지리산 등반에서 배웠듯이,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다. 하다 보면 해진다. 어찌어찌 팔다리를 후들후들 떨어가며 108번의 굴신을 끝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몸이 가뿐했다. ‘겨우 어제 하루 했을 뿐인데, 몸이 이렇게 빨리 적응하다니.’ 23분 56초에 108배를 끝냈다. ‘스물 하나, 스물둘, 스물 하나..... 스물 하나? 이상한데?’ 108배를 할 때 자주 느낀 어려움은 절을 한 횟수가 헛갈린다는 거다. 오늘은 배에서 내는 큰 소리로 씩씩하게 숫자를 세면서 절을 했다. 그랬더니 헛갈리는 일이 없었다. 마지막 108배 소리는 배에 더 힘을 주어서 아주 통쾌하게 질렀다.     


절체조 후 다시 한번 찬물 샤워. ‘흠...... 그런데 이상하다.’ 걷기도, 절체조도, 찬물 샤워도 다 좋았는데  이상하게 그때뿐이다. 마음이 점점 꽁치 통조림처럼 바닥으로만 가라앉았다. 때맞춰 서향인 창문으로 햇살이 다시 강하게 집안으로 내리 꽂혔다. ‘아, 이러지 맙시다.’ 급히 창밖 셔터를 내렸다. 순식간에 어둠이 찾아왔다.   

  

갑자기 땅으로 떨어진 마음을 주워 올리려고 남부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친구도 목소리가 어두웠다. “병아리 때문에. 어제는 20마리였는데 오늘은 10마리야.” 친구는 매일 닭들을 풀어준다. 그런데 솔개가 있는지, 산짐승이 있는지 병아리가 계속 없어진단다. 친구가 하루 종일 지킨다고 옆에 있었는데도 저녁에 닭들을 닭장으로 넣을 때 세어보니 병아리가 반이나 사라졌다나. 오늘 친구의 슬픔은 잃어버린 병아리 10마리 무게보다 컸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목소리가 다시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지금부터 음악을 틀고 춤을 추면서 저녁 준비를 할 거야. 와인도 한 잔 하고. 오늘은 방금 밭에서 따온 브로콜리로 파스타를 할 거야. 넌 뭐 먹을 거니?” 아, 이미 내 마음은 그 브로콜리 파스타 접시를 앞에 두고 친구와 식탁에 마주 앉아있었다. 


“난 그냥 와인이나 한 잔?” 오랫동안 아무것도 만들어 먹지 않았다. 그동안 살짝 씻거나, 물기를 털거나, 통조림을 열거나, 포장지를 벗겨서 자르는 정도의 수고가 들어가는 것만 먹었다.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업으로 삼게 되면서, 혼자 있을 땐 전혀 요리를 하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아침에 모카포트에 커피를 끓이거나 우유를 데울 때 가스불을 켜는 게 다였다. 

그런데 친구와 통화를 하고 심각하게 허기가 졌다. 샐러드, 참치캔, 삶은 계란, 이런 거 말고 ‘뜨거운 프라이팬에서 막 꺼낸 노릇노릇하게 잘 구운 무언가’가 먹고 싶었다. 이리저리 뒤져 찾아낸 거라곤 시들시들한 주키니 호박과 더 시들한 펜넬이 다였다. 시든 부분을 잘라내고 프라이팬에 팬 실링을 조금 한 후 오븐에 넣었다. 냉동실에서 찾아낸 작은 빵 한 덩어리도 오븐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낮에 그 멀리서 백팩에 담아 온 와인도 꺼냈다. 돌체또. 피에몬테 사람들에게 데일리 와인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와인이다. 채소가 노릇노릇 구워지는 냄새가 퍼지니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제대로 준비한 음식을 먹지 않아서 내 영혼이 소진되었던 걸까?’ 그저 시들어빠진 채소 두 가지를 굽고, 냉동해뒀던 빵을 오븐에 다시 구웠을 뿐이데, 기분이 좋아졌다. 한 잔의 와인이 감사하다.       



소박한 혼밥도 품격 있게


남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을 하지만, 정작 저는 제게는 음식을 대접하지 않고 지내왔군요.  그저 소금간만 해서 구워낸 주키니와 펜넬 구이도 감사하기만  합니다.

이탈리아 제 첫 집주인은 혼자 사는 프랑스 인이었어요. 이베뜨는 프랑스 인을 섭외해 이탈리아에서 전시회를 기획하는 일을 했죠. 예술가들을 초대해 떠들썩하게 파티를 벌이는 걸 좋아했어요. 하지만 혼자 있을 땐, 그녀도 아주 간단하게 당근 샐러드, 통 호두 세 알, 흑밀 빵, 브레사올라 같은 걸 먹었답니다. 

그녀는 자신을 대접할 줄 알았어요. 1시에 점심 식사를 할 거라면, 12시쯤 미리 기본 준비와 테이블 세팅을 해놓는 거죠.  배가 고파질 무렵이면 마치 다른 사람이 준비해 둔 것처럼, 여왕처럼 우아하게 식사를 하는 그녀를 보았습니다. 소박한 혼밥도 품격 있게 먹는 법을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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