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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May 27. 2020

다시는 없을 나의 토요일

스탑 버튼을 다시 한번 누른 듯,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2020년 5월 23일 토요일, 레스토랑, 와인바, 커피숍이 문을 다시 열었다. 우리 레스토랑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으니 며칠간의 여유가 있는 셈이다. 

올 해가 끝나기 전까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 분명한 토요일이다. 레스토랑 근무자들에게 주말에 쉰다는 건 꿈도 꾸지 못 할 일이다. ‘나의 토요일’이라니.......     

두 달 넘게 갇혀 있다가, 드디어 밖에서 누군가가 준비하고 서빙하는 무언가를 먹고 마실 수 있다니. 세상에. 사람 사는 세상으로 다시 시원하게 풍덩 뛰어드는 기분이란. 그 상쾌한 기분은 2020년 이 지구 상 어딘가에서 코로나 격리를 겪고 첫 외출을 한 이들만 알 수 있을 것이다.


에노테카에서 문자로 연락이 왔다. “코로나 때문에 문 닫기 전 마지막 손님이 너였다는 거 아니?” 마치 재오픈하는 첫날의 손님이 되어 달라는 프로포즈처럼 들렸다. 오후 5시 반쯤 예약을 했다. 

그들이 문을 닫기 전 날, 마지막으로 무슨 와인을 마셨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나에게 기억이란 놈은 역시 한 여름 아무데서나 나자빠져 잠드는 술 취한 개와 같다. 이럴 때 사진이나 메모는 도움이 된다. 두 달 전에 찍은 사진을 뒤적여보니, 3월 9일에 마셨던 와인은 두 개의 땅이라는 의미의 ‘도스 띠에라스 Dos Tierras’. 사랑에 빠진 이탈리아 남자와 스페인 여자가 함께 만든 시칠리아 산 와인이었다. 맞아, 그랬지.      


2달 만에 에노테카 나들이라니. 아, 뭔가 감격스럽다. 그런데 에노테카에 가까워오자 발걸음이 괜시리 비장해졌다. ‘저 에노테카는 밖에 테이블도 없고 실내에 있어야 하는데 괜찮을까?’ 마스크를 다시 꼭 맞게 고쳐 쓴다. 나만 이런 걱정을 한 건 아닌가 보다. 안이 아니라 에노테카 밖에서 플라스틱 컵과 그리시니를 손에 쥐고 와인을 홀짝거리는 두 남녀가 보였다. 마스크는 내려서 턱에 걸친 채였다. 그래, 마스크를 쓴 채로 와인을 마실 순 없지. 누군가 농담처럼 선보였던 마스크처럼, 작은 구멍을 내고 빨대로 와인을 마실 순 없지 않은가.

     

‘괜찮아요, 어서 들어오세요.’라고 말하듯 에노테카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챠오, 라가찌 Caio, ragazzi” 마스크 낀 얼굴로 에노테카 주인 커플이 반겨주었다. 불 켜진 가게, 벽을 가득 채운 와인들을 보니 마치 코로나 사태 따위는 내가 간밤에 잘못 꾼 꿈처럼, 마치 없었던 일인 양 싶었다. 에노테카 안에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좋아하는 창문 앞자리에 앉았다. 


벌써 날이 이렇게 무더워지다니. “무겁지 않고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와인으로 추천 부탁할게요.” 나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많이 마시는 편이다. 하지만 새로운 주, 도시를 가게 되면 꼭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맛본다. 베니스에서는 피노그리조, 사르데냐에서는 베르멘티노, 아말피에서는 알리아니코, 시칠리아에서는 에트나 로쏘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여행은 꿈도 꿀 수 없다. 꼭 코로나 비상사태가 아니라 해도, 휴가 기간이 아니고서는 어차피 레스토랑에 매인 몸이다. 그러니 가끔 에노테카를 갈 때는 그들이 추천한 새로운 와인을 맛본다. 오늘은 이 지역 와인이지만 무겁지 않은 2018년 산 프레이자다. 포도 품종이 같아도 와이너리, 생산연도에 따가 맛이 달라지니 와인을 맛보기 전에는 언제나 작은 설렘이 든다.      


아, 정말 우리 밖에 없는 걸까 싶을 때, 아페리티보를 즐기러 온 근처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노부부가 들어섰다. 한참 테이블을 넘어 큰 소리로 대화가 오고 갔을까? 역시 단골인 듯 환하게 웃으며 여자 손님이 하나 들어서 바에 앉는다. 와인 한 잔과 책, 퍽이나 어울린다. 혼자 와도 책이 있으면 적적하지 않겠다.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굵고 세찬 비가 내린다. 발이 묶였다. 와인 한 병이 바닥을 보일 때 즈음, 비도 그쳤다.     


레스토랑과 바들이 다시 오픈 한 첫날, 이렇게 돌아서긴 뭔가 아쉽다. 바르바레스코로 발걸음을 옮긴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 바르바레스코 탑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타나로 강은 웅장했다.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고, 일몰까지 온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탁 트여서 굽이굽이 흘러가는 타나로 강을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한참을 넋을 빼고 풍경에 취해 있었다. 


‘참, 교자가 먹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였지.’ 바르바레스코 무니치피오 광장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와인바가 있다. 탁 트인 광장으로 나와 앉으니 초저녁과는 다른 또 여유가 느껴졌다. 코로나 때문에 테이블은 충분히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었지만, 거의 모든 테이블은 만석이었다. 

두 달 만에 교자를 먹었다. 와인바에서도 야끼 교자에는 역시 시원한 맥주다. 교자와 맥주를 먼저 해치우고 한참을 만족스러운 미소로 앉아있었다. 

‘아! 와인!’ 수많은 페이지의 와인 리스트를 일일이 손님을 거칠 때마다 소독할 수 없으니 와인 리스트는 즉석에서 이메일로 전송받았다. 역시 바르바레스코에서는 바르바레스코가 아닐까? 2016년 산 바르바레스코 한 병을 주문했다. 


귀가 즐거웠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경쾌한 음악 소리, 잔이 부딪히는 소리, 웃음소리. 시원한 바람을 따라 답답했던 가슴 속도 시원해졌다. 숨을 멈췄던 세상이 다시 내게 속삭이는 듯하다.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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