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탑 버튼을 다시 한번 누른 듯,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2020년 5월 23일 토요일, 레스토랑, 와인바, 커피숍이 문을 다시 열었다. 우리 레스토랑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으니 며칠간의 여유가 있는 셈이다.
올 해가 끝나기 전까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 분명한 토요일이다. 레스토랑 근무자들에게 주말에 쉰다는 건 꿈도 꾸지 못 할 일이다. ‘나의 토요일’이라니.......
두 달 넘게 갇혀 있다가, 드디어 밖에서 누군가가 준비하고 서빙하는 무언가를 먹고 마실 수 있다니. 세상에. 사람 사는 세상으로 다시 시원하게 풍덩 뛰어드는 기분이란. 그 상쾌한 기분은 2020년 이 지구 상 어딘가에서 코로나 격리를 겪고 첫 외출을 한 이들만 알 수 있을 것이다.
에노테카에서 문자로 연락이 왔다. “코로나 때문에 문 닫기 전 마지막 손님이 너였다는 거 아니?” 마치 재오픈하는 첫날의 손님이 되어 달라는 프로포즈처럼 들렸다. 오후 5시 반쯤 예약을 했다.
그들이 문을 닫기 전 날, 마지막으로 무슨 와인을 마셨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나에게 기억이란 놈은 역시 한 여름 아무데서나 나자빠져 잠드는 술 취한 개와 같다. 이럴 때 사진이나 메모는 도움이 된다. 두 달 전에 찍은 사진을 뒤적여보니, 3월 9일에 마셨던 와인은 두 개의 땅이라는 의미의 ‘도스 띠에라스 Dos Tierras’. 사랑에 빠진 이탈리아 남자와 스페인 여자가 함께 만든 시칠리아 산 와인이었다. 맞아, 그랬지.
2달 만에 에노테카 나들이라니. 아, 뭔가 감격스럽다. 그런데 에노테카에 가까워오자 발걸음이 괜시리 비장해졌다. ‘저 에노테카는 밖에 테이블도 없고 실내에 있어야 하는데 괜찮을까?’ 마스크를 다시 꼭 맞게 고쳐 쓴다. 나만 이런 걱정을 한 건 아닌가 보다. 안이 아니라 에노테카 밖에서 플라스틱 컵과 그리시니를 손에 쥐고 와인을 홀짝거리는 두 남녀가 보였다. 마스크는 내려서 턱에 걸친 채였다. 그래, 마스크를 쓴 채로 와인을 마실 순 없지. 누군가 농담처럼 선보였던 마스크처럼, 작은 구멍을 내고 빨대로 와인을 마실 순 없지 않은가.
‘괜찮아요, 어서 들어오세요.’라고 말하듯 에노테카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챠오, 라가찌 Caio, ragazzi” 마스크 낀 얼굴로 에노테카 주인 커플이 반겨주었다. 불 켜진 가게, 벽을 가득 채운 와인들을 보니 마치 코로나 사태 따위는 내가 간밤에 잘못 꾼 꿈처럼, 마치 없었던 일인 양 싶었다. 에노테카 안에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좋아하는 창문 앞자리에 앉았다.
벌써 날이 이렇게 무더워지다니. “무겁지 않고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와인으로 추천 부탁할게요.” 나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많이 마시는 편이다. 하지만 새로운 주, 도시를 가게 되면 꼭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맛본다. 베니스에서는 피노그리조, 사르데냐에서는 베르멘티노, 아말피에서는 알리아니코, 시칠리아에서는 에트나 로쏘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여행은 꿈도 꿀 수 없다. 꼭 코로나 비상사태가 아니라 해도, 휴가 기간이 아니고서는 어차피 레스토랑에 매인 몸이다. 그러니 가끔 에노테카를 갈 때는 그들이 추천한 새로운 와인을 맛본다. 오늘은 이 지역 와인이지만 무겁지 않은 2018년 산 프레이자다. 포도 품종이 같아도 와이너리, 생산연도에 따가 맛이 달라지니 와인을 맛보기 전에는 언제나 작은 설렘이 든다.
아, 정말 우리 밖에 없는 걸까 싶을 때, 아페리티보를 즐기러 온 근처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노부부가 들어섰다. 한참 테이블을 넘어 큰 소리로 대화가 오고 갔을까? 역시 단골인 듯 환하게 웃으며 여자 손님이 하나 들어서 바에 앉는다. 와인 한 잔과 책, 퍽이나 어울린다. 혼자 와도 책이 있으면 적적하지 않겠다.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굵고 세찬 비가 내린다. 발이 묶였다. 와인 한 병이 바닥을 보일 때 즈음, 비도 그쳤다.
레스토랑과 바들이 다시 오픈 한 첫날, 이렇게 돌아서긴 뭔가 아쉽다. 바르바레스코로 발걸음을 옮긴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 바르바레스코 탑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타나로 강은 웅장했다.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고, 일몰까지 온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탁 트여서 굽이굽이 흘러가는 타나로 강을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한참을 넋을 빼고 풍경에 취해 있었다.
‘참, 교자가 먹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였지.’ 바르바레스코 무니치피오 광장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와인바가 있다. 탁 트인 광장으로 나와 앉으니 초저녁과는 다른 또 여유가 느껴졌다. 코로나 때문에 테이블은 충분히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었지만, 거의 모든 테이블은 만석이었다.
두 달 만에 교자를 먹었다. 와인바에서도 야끼 교자에는 역시 시원한 맥주다. 교자와 맥주를 먼저 해치우고 한참을 만족스러운 미소로 앉아있었다.
‘아! 와인!’ 수많은 페이지의 와인 리스트를 일일이 손님을 거칠 때마다 소독할 수 없으니 와인 리스트는 즉석에서 이메일로 전송받았다. 역시 바르바레스코에서는 바르바레스코가 아닐까? 2016년 산 바르바레스코 한 병을 주문했다.
귀가 즐거웠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경쾌한 음악 소리, 잔이 부딪히는 소리, 웃음소리. 시원한 바람을 따라 답답했던 가슴 속도 시원해졌다. 숨을 멈췄던 세상이 다시 내게 속삭이는 듯하다.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