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유학
2학기 역시 주인공은 뭐니 뭐니 해도 스튜디오 수업이었다. 첫 학기의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스튜디오 1·2 경험 때문에, 두 번째 학기도 긴장을 바짝 한 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게임 관련 주제가 아니었고, 처음 접해보는 난해한 툴 때문에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다. 스튜디오 3를 맡은 교수님들도 한결 친절해 보였고, 정규 수업 시간은 줄어든 대신 1:1 미팅이 늘어나 마음이 조금은 편안했다.
스튜디오 3의 전체 주제는 지난 학기 Grad Lab의 Future of Work를 이어 진행된다고 했다. 나름 흥미로운 토픽이라고 생각했다. 최종 결과물은 7주차, 일종의 중간고사 시점에 짧은 영상을 제작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예상대로 엄청난 양의 리서치, 워크숍, 개별 프로젝트 디벨롭 과정을 거쳐야 했다.
첫날 수업에서 교수님이 가장 강조한 말은 “뻔한 클리셰를 피하라”, “단순히 책상 앞에 앉아 일하는 모습이 아닌, ‘일(Work)’이라는 개념을 훨씬 넓게 탐구하라”, “미디엄의 한계를 넘어서라”였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조언은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즉, 솔루션을 찾으려 하지 말고) 질문을 찾아라”였다. 이 말은 내 뇌리에 깊게 박혔고, 이후 어떤 개인 프로젝트를 하든 늘 중심 모토가 되었던 것 같다.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 질문을 찾으라는 가이드는, 결국 wicked problem의 철학과 같은 맥락이었다. Wicked problem이란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려 하기보다, 문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디자인적 태도다. 예전에 CCA(California College of the Arts)의 Interactive Design 전공 지원을 고민하며 관련 에세이를 준비했던 기억도 떠올랐다(결국 다른 이유로 지원하지는 못했지만). 완전한 문제 해결이라는 것은 사실상 모순에 가깝기 때문에, 단편적 해결책보다 창의적 접근과 비판적 사고를 가르치려는 학교의 철학이 자연스레 느껴졌다.
그 시기 나는 원격으로 풀타임 수업을 듣고 있었고, 2020년 입학생 중 우리 과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첫 학기 내내 나를 괴롭힌 것은 시차보다도 고립감이었다. 과제가 막힐 때 하소연하거나 도움을 구할 친구가 없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특히 physical computing 수업은 스트레스가 극심해서, 과제를 이해하지 못할 때면 마치 망망대해에 혼자 떠 있는 듯한 막막함이 들었다. 아마 이런 경험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의 관심은 “혼자 일하는 사람들”로 향했던 것 같다.
기술 발전으로 노동 구조가 점점 긱 경제화될 것이고, 앞으로 집에서 혼자 일하는 플랫폼 노동자가 증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하루 종일 혼자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고립감을 느끼지 않을까? 이 질문이 프로젝트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질문은, “리모트로 일하는 사람들끼리 친밀감을 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였다.
리서치 중 가장 큰 영감을 준 것은 Jeremy Bailenson 박사님의 연구였다.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심박수를 서로 공유하자 친밀감이 증가했다는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이런 기술이 미래에 보편화된다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아이디어는 점점 확장되어,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 사용된 기술이 오히려 개인정보 노출이나 감시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까지 나아갔다.
최종적으로 내가 만든 결과물은, 상대방의 신체 반응을 엿볼 수 있는 회사 면접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한 짧은 영상이었다. 친밀감을 높이는 기술이 언젠가 사생활 침해와 감시의 도구로 변질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최종 발표 날에는 영국의 미디어 아티스트 Ilona Gaynor가 게스트로 초대되어 본인의 독특한 작업을 소개해주셨고, 기꺼이 크리틱에도 참여해주셨다. 지난 학기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홀로 원격으로 수업을 듣는 나에게 돌아오는 피드백은 많지 않았다. 당시 우리 과는 친한 친구들끼리 품앗이하듯 피드백을 주고받는 분위기였는데, 나는 친구가 없었기에 크리틱 때마다 어색한 정적을 감당해야 했다. 일로나의 피드백을 기대했지만, 내 작업은 그녀의 흥미를 끌지 못했던지 조용히 지나가 약간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내가 선택한 주제를 리서치하는 과정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고, 결과물에도 나름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사실 처음 과제가 주어졌을 때만 해도, 이렇게 애매모호한 주제로 대체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지 막막함이 컸다. 게다가 뻔한 결과물을 절대 만들지 말라는 교수님의 당부를 워낙 많이 들은 터라, 새로운 무언가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리서치해야만 했다.
하지만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다양한 논문과 책을 헤매다 보니, 어느 순간 나의 흥미를 사로잡는 주제와 질문에 자연스레 도달하게 되었다. 아마 이때 처음으로 리서치가 왜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아이디어의 방향을 바꿔줄 수 있는지를 실감했던 것 같다.
이렇게 나의 2학기 스튜디오 수업의 첫 장이 마무리되었다. 모호한 과제를 명확한 컨셉의 결과물로 구체화하는 경험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고, 매일 불평만 하던 미디어 디자인 과가 지닌 진가를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