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승무원이 무척 하고 싶었다. 자유로이 여행을 다니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고 기내에서 착착 승객을 응대하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승무원들이 20대 중반에서 늦어도 20대 후반에는 승무원이 되는 데에 비해 나는 30대 초반에 되었으니 다른 이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
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면서도 딱히 노력하지는 않고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며 불평만 하다가 다른 회사에 들어가서도 늘 방황하며 20대를 보냈다. 승무원이 되기를 바라는 동안 자의적, 타의적 우여곡절이 있었고,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회의감으로 마음 한편에 우울한 마음이 있었다. 20대의 나는 당시에는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 억울했고, 남들에 비해 되는 게 없다 느꼈고, 해결할 방법이 하나도 안보였기에 너무 답답했다.
그러다 정말 운이 좋게 30대가 되어 승무원이 되었고, 간절히 원했던 만큼 더 만끽하며 보냈다. 이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체력적으로 힘들었고, 단순 노동이었고, 생전 생각도 못 해본 중동이라는 곳에서 향수병을 느끼기도 했다.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지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일 수도 있지만 20대가 아닌 30대에 오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직장 생활도 해봤고, 집을 떠나 자취도 해봤고, 해외 살이도 해 봤기에, 20대의 내내 붙은 버팀 근육들이 카타르라는 쉽지 않은 곳에서도 잘 살 수 있게 힘이 되어주었다. 또한 어둡고 힘든 시기를 지낸 뒤에 얻게 된 일이기에 더욱 이 직업에 대해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팬데믹이 터지고 나를 포함한 전 세계의 승무원들은 한 치 앞도 모른 채 불안한 미래에 시달렸다. 종국에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승무원들이 줄줄이 해고되고 항공업계 전체가 마비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나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바로 플랜 B를 위해 공부했다. 암흑 같은 미래를 기다리며 더 이상 시간 낭비하기 싫었고, 한번 이 해고를 겪으니 불나방같이 살고자 했던 지난날의 꿈은 완전히 지워버리고 직업의 우선순위로 안정성으로 꼽게 되었다.
그렇게 1년 동안 열심히 취업을 준비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당연히 합격할 거라 믿었던 시험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실수로 낙방을 했고,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해고도 모자라 불합격, 그리고 점점 줄어드는 통장 잔고와 여전히 보이지 않는 미래… 하나만 일어나도 버거울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니 마치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기분이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혼자 공부만 하느라 위축된 생활을 바꾸려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시험 결과를 듣던 날 나는 사무실에서 친하게 지내던 직원 앞에서 참았던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나쁜 짓 안 하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어려운지, 왜 이렇게 앞이 안 보이는 터널이 자꾸 생기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즈음 나는 늘 1년 전의 행복했던 나를 떠올리며 왜 이런 일들이 연달아 일어날까, 신을 원망하고 또 대상이 없는 모든 원망을 이어나갔다. 그 해 7월의 하늘은 유난히도 맑고 파랬는데 내 마음은 늘 어둡고 비가 내렸다.
그렇게 하루하루 얼이 빠진 사람처럼 지내다가 나는 그냥 한번 있어보기로 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인생이 꼬였을 땐 바꾸려고 애쓰기보다 그냥 다 내려놓고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다시 계획을 세우고 준비할 힘도 없이 지쳐버렸을 땐 조금 내려놓되 오늘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기로 했다.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 나를 보살피는 것, 이를테면, 밤낮이 바뀌지 않고 아침 시간에 일어나기, 매일 한 끼 식사다운 식사를 챙겨 먹기, 해가 있을 때 산책을 하기, 생각이 많아지려 하면 몸을 바쁘게 움직이기, 괜찮아질 거고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믿어보기 등 그런 식으로 나는 불안으로 요동치는 중에 내 마음을 다스리려고 부단히 나를 다독였다.
그러던 중 나는 회사에서 리조인하라는 연락을 받았고 도망치듯 카타르로 돌아왔다. 그러나 마음의 준비 하나 없이 도망치듯 와서 그랬던 것일까 돌아와서도 한동안 나는 온전히 즐기기보다 걱정과 불안이 더 큰 마음으로 보냈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 현저하게 줄어든 관광객, 어딜 가든 작성해야 되는 코로나 서류들…그런 것들은 마음을 더 심란하게만 했다. 언제 돌아가야 하지? 돌아가면 뭘 해야 되지? 한국이 아니라면 어디로 돌아가야 하지? 등등 나는 다시 시작한 비행과 여행을 즐기기는커녕 매일 머리를 꼬아대는 고민만 거듭하며 지냈다. 나는 분명 예전의 내가 행복했던 그 자리로 돌아왔는데 모든 것이 변해있었다. 심지어 내 마음까지도. 그런 마음이 가득하다 보니 나는 사람을 대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기계처럼 감정 하나 없이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과 여행 중 일만 남아버린 이 직업을 대하기 시작했고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정말 갑자기 나의 승진 소식을 듣게 되었다. 보통 우리 회사의 경우는 비즈니스 승진은 2~3년이 지나면 하게 되는데 코로나 때문에, 그리고 아마 다가오는 월드컵 때문에 더 일찍 승진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입사와 재입사한 크루들 중에서도 거의 첫 발주자로 승진을 하게 된 것이니 굉장히 운이 좋은 편이다. 승진 메일을 받던 날, 얼떨떨함과 동시에 기쁨이 밀려왔다. 비즈니스에서 일해보고 싶었지만 생각도 못해본 것이기도 했다. 비즈니스로 갈 수나 있을지도 몰랐는데 그것도 이렇게나 빨리 기회가 오다니!
시험에 실패했던 순간부터 카타르에 다시 왔던 때, 그리고 다시 비행을 하면서 힘들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과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이런 일이 있기 위해서, 더 많이 기쁘게 느끼기 위해서 그동안 그런 힘든 일들이 있었구나 싶었다. 당연히 당시에는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말이다. 그 시기에 나는 우는 날도 많았고, 내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남들의 사소한 말에도 두 번 세 번 꼬아 생각하기를 자주 했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뻔하지만 정말 진리인 말처럼 돌이켜 보면 지금 이런 일이 있으려고, 또 지금을 훨씬 더 행복해하려고 그 시간들을 겪어왔던 것 같다.
나는 결코 슬럼프를 이겨냈다고 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나는 매일 고통스러웠으니까. 그저 이 시간들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버티는 근육이 생겼다고나 할까. 인생에서 좋은 일들만 일어나면 그것 또한 행복할 테지만 인생의 폭풍을 겪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그 과정에서 더 단단하고 튼튼한 마음의 근육을 만들어줄 것이고, 이는 앞으로의 인생에서 훌륭한 버팀 근육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잘만 버텨낸다면 슬럼프는 한 사람이 좀 더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나는 데에 필요한 근육이자 자양분이 되어줄 것이다. 앞으로도 슬럼프는 올 수 있겠지만 나는 여태껏 차곡차곡 쌓아 올린 버팀 근육으로 견뎌낼 것이고 나아가 더 강한 근육으로 한 단계 뛰어넘기까지 할 것이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또다시 슬럼프가 온다면 당장은 매일 울면서 신을 원망하고 신세 한탄으로 울부짖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