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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타샤 Dec 30. 2022

잘려 나간 시간들

아주 뜨거운 바람으로 5분을 넘게 말려도 여전히 축축한 채로 손끝에 엉켜있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당장 이 잘라 치워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르는 게 아니라 잘라 치워 버리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다) 성격상 긴 머리를 잘 못 견디는 데도 불구하고 머리카락이 이렇게 긴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외국에 살다 보면 머리를 하고 싶어도 마음에 드는 미용실을 찾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에 그저 머리카락이 기는 동안 방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씩 한국에 갈 때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미용실을 가는 것이다.


해 지는 밤이면 가을이 물씬 풍기던 9월, 드디어 인천 비행을 받았다. 스케줄에서 ICN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미용실을 예약했고 머리를 말릴 때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고 이 거추장스러운 것들과 헤어진다며 참을 인을 새겼다.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왔고, 들뜬 마음으로 새하얀 미용실에 들어섰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거지꼴이 따로 없었고 이렇게까지 못생겨 보이는 건 정리가 안된 머리 탓이라며 애써 위로했다.  분무기에서 시원한 물이 퍼지고 얼굴에 살짝 닿는 차가운 물방울에 움찔했다. 물에 젖어 물미역처럼 늘어진 머리를 보며 이걸 잘라내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지! 마음이 무척 들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미용사의 망설임 없는 가위질에 한 움큼 잘려나간 머리카락들이 새하얀 타일 위로 떨어지니 마음이 이상했다. 속이 시원할 거란 기대와 달리 막상 바닥에 흩어진 머리카락들에 아쉬움이 깃든 채 마음이 꽤 무거웠다.

머리카락이 아까워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10센티가량 잘린 머리카락에는 그 간의 시간들이 담겨 있었고, 그 시간이 무심히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머리카락이 잘리듯 시간도 기억도 싹둑 잘려나가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 위를 덮어버린 다는 게 다소 허무하게도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지난 1년은 꽤 힘들고 어두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간간이 좋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그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충분히 즐기지 못할 만큼 마음은 늘 조급했고 불안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시간이 잘려나가는 것은 홀가분해야 할 것만 같은데 막상 그렇지도 않았다.

그 마저도 내 삶의 일부였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또한 소중한 무언가로 받아들였기 때문인 걸까. 바닥에 흩어진 까만 시간들 사이로 마음의 돌덩이가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긴 머리를 싹둑 자를 때는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일 거라는 추측하는 것도 켜켜이 쌓여온 시간을 잘라내는 것이라서 그런 걸까.

 

미용사는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내 머리카락을 잘라 나갔고 나는 도대체 이 마음이 무엇인지도, 왜인지도 모른 체 무겁게 앉아 있었다. 거울 속의 나는 어떤 표정으로 앉아있는지 모른 채 서걱거리는 가위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특별한 스타일링은 없이 그저 단정하게, 묶일 만큼 잘랐다. 커트를 마친 미용사는 웨이브를 할 건지 물어보았고, 보통은 집에 가서 잘 거니 그냥 젖은 머리만 말려달라고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평소와는 달리 끝에 살짝 웨이브를 넣어달라고 했다. 같은 얼굴, 같은 옷, 그러나 조금은 성숙해지고 단정해진 듯한 내 모습을 보면서 옅은 미소를 지어보았다.


그냥 나였다.

1년의 시간이 지났고, 여러 일이 있었고 머리는 짧아졌지만 나란 사람은 그대로였다. 계산을 마치고 미용실 문의 여니 머리 위로는 아직은 뜨거운 한낮의 태양이 쏟아졌다.


뭐든 다시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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