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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타샤 May 09. 2023

마트 인류학



보통 승무원들이 하는 비행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현지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있는 레이오버 비행과 약 4시간 이내의 목적지에 갔다가 바로 새로운 승객을 태워서 돌아오는 턴 비행으로 나뉜다. 레이오버 비행은 체류지에서 시간이 있기 때문에 여행 같은 비행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레이오버 비행이라고 무조건 나가서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호텔이 공항 근처에 있는 경우 도심까지 나가기가 멀기 때문에 비행 후 피곤에 절은 몸으로 나가기란 어지간한 의지 아니고서는 어렵다. 또한 현지의 환경이나 치안 문제로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한 달 로스터(비행할 곳과 시간이 있는 비행시간표)를 보면 평균적으로 나가서 여행할 수 있는 곳은 2 곳, 많으면 3곳 정도 될 것이다.

나갈 수 있는 체류지라면 여기저기 둘러보며 여행을 하기도 하고 이미 여러 번 다녀간 곳이라면 관광은 하지 않고 그곳의 좋아하는 식당을 찾아가서 식사만 하고 돌아오기도 하는데 어느 경우든 꼭 빠뜨리지 않는 것은 바로 마트에 들르는 것이다.


내가 사는 도하는 모든 식재료가 수입품이다. 사막에 위치한 나라다 보니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농사를 짓기가 어렵기 때문에 가까운 요르단부터 저 멀리 멕시코까지 다양한 도시에서 먹거리를 수입한다. 덕분에 돼지고기와 술, 그 외 마약류들을 제외하고는 음식이나 심지어 식물을 가지고 입국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 물론 도하에도 웬만한 식재료가 다 있고 마트도 많지만 아무래도 대부분이 수입산이다 보니 신선도가 좀 떨어지고 가격이 비싸다. 그래서 도하뿐만 아니라 중동에 근무하는 승무원들은 장 보기 괜찮은 레이오버 비행(대표적으로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이 있다)을 가면 그곳에서 한가득 장을 봐서 돌아온다.

나 역시 처음에는 그 지역에서 생산된 신선하고 다양한 식재료를 사고 싶어서 장을 보러 마트에 갔다. 스페인에서는 오렌지와 올리브, 이탈리아에서는 치즈와 허브, 독일에 가면 빵과 채소류 등 유럽의 마트에서 탐스럽게 진열된 식재료를 골라 담는 재미는 무척 크다.  그런데 이 ‘마트 가기’가 이제는 나갈 수 있는 체류지라면 반드시 하는 필수 일정이자 마무리 일정이 되었다. 주로 독일, 스페인에서 보던 장보기는 이제 루마니아, 체코, 나아가 케냐,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나라에서 한 번쯤 들어본 명소를 간다면 거기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로 붐비는 관광지일 것이다. 하지만 마트는 정말 그곳의 현지인들의 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마트야 말로 그곳 사람들의 일상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일상을 살아가고 어떤 문화를 가졌는지, 현지 사람들은 무엇에 관심이 많은 지 가장 쉬우면서 동시에 면밀하게 접해 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마트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식료품 코너는 현지 사람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쏠쏠한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몇 가지를 살펴보자면 카타르의 마트에 가면 대추야자가 정말 많다. 대추야자로 만든 초콜릿을 비롯한 디저트가 많은데 이는 대추야자가 카타르의 특산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타르 사람들은 아라빅 커피(커피와 카드멈 등의 향신료를 섞은 커피)와 곁들여 먹는다. 또한 카타르 마트에는 남아시아(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 북아프리카(모로코, 튀니지, 알제리, 이집트) 순으로 식료품이 엄청 다양하게 많고 꼭 필리핀 식료품 코너가 빠지지 않고 있는데 이는 카타르에 남아시아, 북아프리카, 필리핀 사람들이 인구가 많은 것을 반영한다.

스페인의 마트에 가면 오렌지가 어마어마하게 널려있다. 먹음직스럽게 생긴 오렌지는 묶음으로 팔기도 하고 낱개로 골라 담을 수도 있다. 게다가 오렌지 옆에는 오렌지 착즙기와 공병이 크기 별로 있어 즉석에서 오렌지 100%의 순수 오렌지 주스를 만들어 구입할 수 있다. 스페인 사람들이 얼마나 오렌지에 진심인지, 스페인의 기후와 환경이 오렌지 농사에 적합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부활절 즈음에 독일의 마트에 가면 토끼 모양의 초콜릿과 선물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독일에서는 토끼가 부활절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마치 성탄절의 산타클로스처럼 독일에서는 부활절에 토끼가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예쁘게 장식한 삶은 계란과 더불어 부활절 토끼는 독일인들에게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또 남아공의 마트에 가면 대단한 크기의 와인 코너가 있다. 남아공 원산지의 만원 이하의 저렴한 와인부터 높은 가격대의 와인까지 골고루 진열되어 있다. 친숙한 이름의 와인부터 듣도 보도 못한 와인까지 색색이 한쪽 벽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을 보면 남아공이 세계 와인 시장에서 무섭게 떠오르는 와인 강자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의 마트에는 살사, 과콰몰리와 같은 멕시코 음식을 시작으로, 전 세계의 대표적인 식재료가 그 종류는 적더라도 다 섞여 있다. 이는 미국은 전 세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이룬 나라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또 과자나 음료수들이 이렇게 크다고? 싶을 정도의 대용량 제품이 많은 것을 보면 왜 미국에 비만이 많은 지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 나라의 특색이 깃든 식재료 코너를 지나 생필품 코너에 들어서면 인간인 우리가 각자 다른 음식을 먹으며 살아가지만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자신의 생활 주변을 꾸미기 위해 애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친환경을 뜻하는 ‘eco friendly’ 문구가 적힌 제품들, 플라스틱 대체제로 만든 제품들이 많아지고 반려동식물을 위한 물건들을 보면 점점 더 많은 전 세계 사람들이 지구와 동식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여성 용품이 즐비한 곳에서는 여성이라면 어떤 피부색이든, 어떤 머리 색이든, 어떤 형태의 몸을 가졌든 일정한 나이가 되면 한 달에 한번 생리라는 고통을 겪는다는 공통점을 새삼 느끼게 된다. 장난감 코너 앞에서 우는 아이와 화를 겨우 삭이는 부모의 모습은 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친숙한 광경이다. 또 연말즈음에 운동 용품 앞에서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새해 목표가 몸만들기 구나 싶어서 공감의 미소를 띠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각 나라의 마트는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과 문화로 가득 채운 공간이라서 저마다의 색깔이 있고 개성을 갖춘 모습이지만 동시에 마트를 다 둘러보고 계산대로 향할 때면 비록 각 나라의 사람들은 그곳의 환경에 따라먹는 것이 다르더라도 결국 인간은 비슷한 생각과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우리는 모두 다른 외형을 하고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른 문화를 배웠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에서 시작되고 또 이는 우리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마트는 그것을 가장 잘 증명하는 곳으로, 인간인 우리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곳이다.

마트 구경이 재밌는 이유는 접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다른 곳에서도 같은 결론, 결국 인간이라는 우리가 서로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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