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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나 Sep 17. 2024

갈 만큼 가고, 갈 데까지 가고, 그러고도 더 가버리기

올해 달리기 회고

갈 만큼 가는 러너는 현명하다. 솔직히 세상에 달리기 말고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미룬 설거지, 미룬 업무, 미룬 이직 준비, 미룬 연말 여행 계획, 미룬 강아지 배변패드 갈기, 미룬 만화책 읽기, 미룬 드라마 정주행, 그리고 미룬 연애.


냉장고 야채 칸에서 싹을 틔운 양파처럼 오래도록 방치한 이 모든 걸 할 시간은 없기에, 적당히 달리는 사람은 영리하다. 갈 만큼만 가면, 건강을 챙기면서 요새 유행하는 취미도 적당히 체험해 볼 수 있다. 갈 만큼만 가면, 달리다 피부가 숯검댕이가 되는 부작용도 피하고, 살을 빼려다 오히려 포스트-달리기 과식으로 살이 쪄버리는 역효과도 면할 수 있다. 뭐든 적당히 하는 게 대체로 편하다.


그럼에도 갈 데까지 가는 러너가 있다. 세상에 할 일은 언제나 많지만, 지금 내가 애쓸 일은 그 모든 것이 아니라 바로 달리기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내 주변에는 달리다 발톱이 빠져도, 하나가 아니라 서너 개가 빠져도, 퇴근하니 이미 금요일 저녁 7시인데도,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달리기가 삶에 실상 별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올해에만 벌써 1000km, 2000km, 심지어 4000km 넘게 가버린 러너들이 적지 않다. 자기 갱신과 기록 경신을 거듭하며 갈 데까지 가는 러너에게는 그 나름의 멋이 있다. 그들은 달리기의 광인이다. 미칠 광 자와 빛날 광 자가 두루 어울리는.


그러나 그렇게 무진장 달리기 위해서는 그 한 가지에만 끈질기게 매달려야 한다. 분야를 막론하고 갈 데까지 가는 사람들의 비결이자 비밀이 바로 이것이다. 단 한 가지에만 집중하기. 다른 할 일은 내버려 두기. 이 자세를 무조건 현명하다고 볼 수 있을까. 무언가에 집요하게 애쓰는 자세는 멋지지만, 그걸 무조건 현명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집요함은, 냅두면 도망가는 시간을 뭐라도 하며 보낸다는 점에서는 현명하지만, 정작 진짜 해야 할 일까지 미루면서 효용이 별로 없는 한 가지에만 집착한다면 어리석다. 돈벌이나 커리어에 올인하는 결정도 비슷하다. 그건 사회적 경제적 효용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는 현명하지만, 자칫하면 건강이나 젊음을 잃고 돈만 많은 대머리 싱글 거북목 중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리석다. 그러니 집요함의 대상이 중요하다.


하지만 집요함의 대상, 그러니까 갈 데까지 가고자 하는 목표가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해석될 리는 없다. 무엇이 현명하고 무엇이 어리석은 지는 각자의 삶이라는 맥락 안에서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두루뭉술한 총론과 다른 러너 이야기는 그만하고, 내 이야기를 하겠다.


나는 갈 데까지 간 러너는 아니지만, 갈 데까지 가고 싶었다. 그러다 정강이 부상을 입었다. 조금만 달려도 시린 정강이를 케어하느라, 지난 한 달간은 아예 달리지 못했다. 올해의 남은 석 달도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달리기를 멈춘 시간은 이게 다 무슨 의미였을까를 회고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이마를 도끼로 치는 듯한 각성이 왔다.


나는 올해 1300km를 넘게 달렸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달리기가 내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일이거나 지금 내게 가장 도움 되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 잡아먹는 하마라고 보는 편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내가 달리기에 매달린 이유가 있었다. 충족하지 못한 욕구 때문이었다. 솔직히 내게는 늘 무언가에 끈질기게 애써서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고 싶은 마음,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있다. 빠져들기 쉽고 훈련 성과가 빠르게 보이는 달리기는 그런 시간을 보내기 위한 손쉬운 수단이었다.


이마를 도끼로 치는 듯한 각성은 이것이다. 좀 과격하게 말하면 달리기는 나의 도피처였다. 달리지 않고서는 그런 시간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터에서는 그런 시간을 가끔 누리기는 해도, 원하는 만큼 누리기는 힘들었다. 집안일을 미루지 않고 해치울 때마다 작은 성취감은 느꼈지만, 그걸 ‘해낸 일’이라 자신 있게 부르긴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마치 게임에 빠진 아이처럼, 해야 할 일까지 미룬 채 달리기만 할 때가 적지 않았다. 달리면서 도파민 샤워를 하고, 달린 후에 온수 샤워까지 하고 나면, 별 쓸모는 없지만 나름의 성취를 이룬 것 같은 기분이 충분히 들었다. 그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올해 나는 내게 쉽게 느껴지는 일에만 집착해 온 것 같다. 내 집요함의 대상이었던 달리기는 이미 수년간 달린 내게는 쉬운 일이었다. 나는 쉬운 일을 하면서 어렵게 느껴지는 일을 피한 것이다. 사실 내가 수시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게 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렵게 느껴지는 일은 하기 싫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정한 것들은 갈 데까지 가볼 대상으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도피의 수단으로 더 적절한 대상이다. 갈 만큼 가고, 갈 데까지 가고, 그러고도 더 가버릴 만큼 애쓸 만한 대상은 지금 내게 힘들게 느껴지는 일이다.


힘들기 때문에 솔직히 하기 싫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고, 그래서 남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은 그 일이야말로 내가 끈질기게 매달려야 할 대상이다. 그러니 올해의 남은 석 달 동안에는 그동안 달리느라 미룬 일을 하겠다. 달리기의 영역에서는 올해 갈 만큼 갔고, 부상을 입은 몸으로 갈 데까지는 가보았으니, 이제는 방향을 틀어서 조금 더 가보겠다. 쉽게 느껴지는 일이 아니라, 어렵게 느껴지는 일에 새롭게 부딪혀보겠다. 바로 그 영역에서 '해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무언가를 건져 올리고 싶다.


추신. 갈 만큼 가고, 갈 데까지 가고, 그러고도 더 가보려는 사람들에게 추석이 충분한 휴식의 시간이 되었길.


*: 이 글의 제목은 김영민. <가벼운 고백>. 김영사, 2024. 144쪽 페이지의 단문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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