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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나 Oct 06. 2024

단어 채집하기

올해 내가 애정한 단어들


단어 ‘허송하다’는 ‘허무하다’, ‘허비하다’, ‘낭비하다’, ‘소비하다’, ‘소모하다’, ‘망했다’ 보다 낫다. 모두 무언가를 헛되게 썼다는 뜻이지만, 어째서인지 내게는 허송하다의 어감에만 죄책감이 덜 느껴지기 때문이다. 단독으로 잘 쓰지 않는 단어라서 그런 건가. 한편, ‘허송하다’와 ‘죄송하다’는 라임도 맞다. 그래서 이 단어를 적으면 허송하는 나를 대신해서 단어가 사과하는 것 같다. ‘죄송합니다. 이번 쿼터를 헛되게 보낸 이 허송한 애송이를 대신해서 직장 매니저님께 제가 사과드립니다.’ 나는 내 상냥한 대변인 같은 이 단어를 애정한다.



추석은 지났고, 수확 시즌인 10월이 왔는데, 나는 올해의 봄여름을 마음껏 허송해서 딱히 수확할 게 없다. 허둥지둥 살기보다는 대체로 둥둥 떠다녔다. 포착한 목표물을 쫓기보다는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지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아무래도 쓸모는 없어 보이지만 그 나름 쾌감이 있는 일에 매달렸다. 그중 하나는 마음에 드는 단어 채집하기다. 웹툰, 드라마, 소설, 논픽션, 시, 밈, 블로그, 논문 따위를 읽다가 내 이마를 탁 치는 단어를 만나면 별도로 기록했다. 허송하다도 그렇게 채집한 단어다. 격식 있고, 우아하고, 입 밖으로 내뱉으면 재밌고, 여러모로 개이득인 단어를 채집하는 건 즐거웠다.



모든 단어를 어감 때문에 채집하지는 않았다. 적은 글자 수로 같은 뜻을 표현할 수 있는 경제적인 단어도 적극 모았다. 예컨대, ‘예컨대’라는 단어가 그렇다. 이 단어는 ‘예를 들어’와 똑같은 뜻이지만 한 글자 더 적다. ‘예를들어’라고 잘못 띄어 쓸 위험도 없다. ‘예를 들어’의 자리에 ‘예컨대’를 대신 적으면, 마치 옷에 붙은 보푸라기를 떼어내는 느낌이다. 솔직히 사소한 디테일이다. 그러나 보푸라기를 싹 없앤 글은 마치 세탁소에 맡긴 옷처럼 깔끔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즉’, ‘과연’, ‘혹은’, ‘한편’, ‘예컨대’ 같은 단어들을 모으고 애용한다.



사실 한자어 만큼 경제적인 단어가 잘 없다. 그러나 한자어는 순우리말 단어보다 대개 더 딱딱하게 들린다. 그래도 묵직한 한자어가 더 잘 맞는 경우가 물론 있다. 여러 사람이 길게 줄지어 서다는 뜻의 ‘도열하다’가 군대 예식을 묘사하는 경우가 그렇다. 작년 7월, 6.25 전쟁 국군 전사자의 유해가 7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특별수송기의 활주로 위에는 레드카펫이 깔렸고, 검은 넥타이를 맨 대통령과 예복을 입은 장병들이 그 수송기 앞에 흐트러짐 없이 도열했다. 예포 21발이 발사됐고, 도열한 이들은 경례를 했다. 곧이어 79살의 동생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낭독했다. “임락이 형님! 가슴이 벅찹니다. 긴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이라도 돌아오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이 예식을 다룬 기사에서 ‘도열하다’를 처음 접했는데, 그 단어에게 고마웠다. 이 격식 있는 한자어가 말랑말랑한 순우리말 동의어보다 돌아온 전사자를 더 잘 예우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역시 순우리말 단어가 좋다. 특히 내밀한 이야기를 친절하고 솔직하게 들려주자는 에세이 장르의 규칙에는 순우리말 단어들이 꼭 맞는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올해는 순우리말 의성어와 의태어를 많이 모았다. 대롱대롱, 허둥지둥, 아등바등, 가릉가릉, 두런두런, 두근두근, 수런수런, 모락모락, 몽글몽글, 말랑말랑, 말캉말캉, 옹알옹알, 나지막이, 두둠칫, 츄르릅, 깔깔, 빙긋, 둥둥, 등등. 이 단어들이 본뜨는 경험을 올해 풍성히 체험한 것 같아서 기쁘다. 가릉가릉 우는 고양이 워토와 옹알거리는 조카와 보낸 시간, 나랑 여자친구 빼고 전부 동성애자였지만 한참을 깔깔 웃었던 파티, 늘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지만 위태롭지는 않았던 일터의 순간들. 이런 시간에는 충만한 행복감이 내 주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어감이 좋은 단어, 경제적인 단어, 순우리말 의성어/의태어 외에도 별별 단어를 다 수집했다. 내 여자친구의 매력을 설명하는 것 같은 단어 ‘관능미’, 고갈되지 않는 창고라는 의미의 ‘무진장’, 걸작의 반대말인 ‘태작’, ‘입이 댓 발 나왔다’라는 표현의 ‘댓’과 ‘발’, 난장판과 개판 사이의 어딘가인 ‘아사리판’, 한때 사랑했다는 기쁨과 결국 잃어버렸다는 슬픔이 반반씩 섞인 포루투칼어 ‘사우다지’. 달빛이 밤바다에 만드는 특별한 윤슬인 문글레이드(Moonglade).



이 모든 주옥같은 단어들이 죽지 않고 계속 쓰이면 좋겠다. 적어놓고 보니, 주옥같다는 단어도 참 주옥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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