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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나 Oct 23. 2024

샌프란시스코 달리기 모임 운영진에게 바치는 글

샌프란시스코 달리기 모임(SFKR) 이야기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는 진실이자, 내가 실리콘밸리 SFKR 달리기 그룹을 만든 이유 하나는 이것이다. 나는 솔직히 달리기 그룹의 덕을 보아 여자친구를 만들고 싶었다. 당시 나는 온라인 데이팅 앱의 무한 퍼스트 데이트 지옥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 지옥에서 비상탈출하지 못하면 이대로 거북목 대머리 테크 아조씨가 될 것만 같았다. 이 진단이 아주 엉터리는 아니었던 것이, 내 뇌피셜 샌프란 강동원이었던 지인 K 조차 이렇게 말했다. ‘실리콘밸리 취업 보다 더 어려운 게 뭔 줄 알아? 그건 이 동네에서 연애하기야.’

(모임 운영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던 시절, 모임 운영에 회의감을 느끼고 개인 훈련 집중하기를 고민하던 나)


솔로 지옥의 문을 빠개고, 실리콘 행복 밸리로 입장할 내 행복 회로의 설계도는 대강 이랬다. 모임을 만들자. 그럼 달리기 좋아하는 사람이 오겠지. 거기서 잘 달리는 러너가 되자. ‘러닝맨 오빠’가 되자. 그럼 일요일의 교회 오빠처럼 내게도 뭐든 생기겠지. 나는 그렇게 K가 내 머릿속에 주입한 절망 회로의 코드를 뽑아, 그걸 단숨에 내 머리 밖으로 내다 버렸다. 대신 이 행복 회로를 부리나케 돌리기로 작정했다. 발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한번 가보자 Go.’


그러나 이 설계도는 완벽하게 불량이었다. 모임 초기에 제 발로 오는 사람은 없었다. 억지로 납치한 지인들은 속속 탈출했다. 내가 애초에 상상했던 이미지에서조차 나는 점점 더 멀어졌다. 나는 점점 더 헬스장 관장님 같은 캐릭터가 되어버렸고, 때론 그룹에 폐를 끼칠까 두려운 초심자를 더 두렵게 했다. 처음 온 사람에게 이제껏 정기런을 달리다 포기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다 오지도 않았는데 자꾸 다 왔다고 했다. 10km를 겨우 달리는 이에게 ‘이미 하프 레디’라고 했다. 나는 어설펐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 기대했던 것들은 대부분 일어나지 않았다. 연애에 대한 내 기대도 빠르게 증발했다. 연애에 관해서는 진.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다 한 번씩 기적은 일어나는 것 같다. 나는 모임 밖에서 기적처럼 여자친구 첼시를 만났다. 첼시와 나는 더 기적같이 러너 커플로 변신했다. 우리 둘은 자주 SFKR 모임에 나갔다. 덕분에 나는 우물쭈물하며 여성 멤버를 직접 케어할 필요가 없어졌다. 첼시가 자연스럽게 나를 대신했다. 내가 느끼기에 냉장고 냉동칸 같았던 단톡방의 사정도 약간이나마 나아졌다. 내가 냉동칸에서 떠들며 이가 시리다고 느낄 때, 첼시는 내가 올린 카톡에 하트 이모지를 따숩게 붙여줬다.


사실 기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진짜 기적은 따로 있었다. 우리 모임에는 정말 근사한 사람들이 하나 둘 드래곤볼처럼 모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손오공처럼 기를 써서 이들을 모은 것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행운의 호박처럼 귀한 사람들이 알아서 굴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든 인연이 감사하지만, 특별히 감사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내게 그냥 호박이 아니라 황금 호박 같은 사람들이다. 그 황금 호박 같은 사람들은 바로 SFKR 모임 운영을 나와 분담하는 SFKR 리더십 사람들이다.


SFKR 리더십 사람들의 존재는 내게 정말 기적 같다. 그들은, 누가 돈을 주지 않는데도, 바쁘게 살자면 한없이 바빠질 수 있는 실리콘밸리의 삶을 사는데도, 모임의 정기런이 다른 날도 아니고 일요일 아침인데도, 베이 브릿지 다리를 매번 건너와야 하는데도, 여기가 대학도 직장도 아니니 타인에게 딱히 친절할 필요가 없는데도, 내가 ‘이분이 스트레칭 리드입니다’ ‘새로운 여성 리더입니다’ ‘롱런을 리드해 줄 올해의 신인왕입니다’라며 합의하지도 않은 감투를 씌워도, 한국인이 정이라 부르는 마음보다 더 넉넉한 마음으로, SFKR 모임 운영을 마치 자기 일처럼 분담했다. 나는 그 리더십 모두에게 감사하다. 그 마음에는 여기 충분히 적을 수 없는 이유들로 가득하다.


드래곤볼을 모으면 기적을 바라며 소원을 비는 게 국룰인 법. 그러나 이미 여자친구와 황금 호박 SFKR 리더십을 얻은 내게는 더이상 소원으로 바랄 기적이 없다. 이기적인 마음 하나를 굳이 말하자면, 나는 이들이 SFKR에 리더나 러너로 내년에도 남길 바란다. 하지만 이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내가 다시 누군가의 바지 끄덩이에 매달리게 되더라도 괜찮다. 이미 올해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년에 일어날 기적을 빈다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빌겠다. 솔로는 연인을 찾고, 돈을 원하는 이는 돈쭐이 나고, 직장인은 마음의 평화를 얻고 승진을 하길. 아. 물론, 달리면서 부상도 입지 않길. 이 모든 소소한 기적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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