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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의 삶

새집에 이사 온 이후

by 김붕어

썸 타는 기간과 N년차 연애의 일상이 다르듯, 새집을 계약했을 때의 내 마음과 7개월이 지나 현실 파악이 끝난 지금의 마음도 다르다. 막 이사를 왔을 때는 의욕이 넘쳤다. 빈 땅에 웨딩베뉴를 만들어 내 결혼식을 거기서 올릴까. 아니면 금문교가 보이는 뒷마당 코너에 우정(亭友)이라는 정자를 만들어 볼까. 어떤 날에는, 집에 딸린 축구장 1/4 크기만 한 땅을 개발해서 부자 되는 꿈을 막 꾸고 그랬다. 지금은 좀 다르다. 지금은 그저 이 집의 집사가 되어 하루하루를 땜질하는 기분이다. 이 집의 주인은, 와이프도 와이프가 데려온 고양이 워토도 아니다. 진짜 주인은 뒷마당과 인근 야산에 사는 짐승들이다.



우리가 새집에 이사 온 이후로, 놈들은 확실히 살맛이 났다. 얘네 물 마시는 일이 쉬워졌다. 그래서 매일 야밤에 온갖 짐승들이 우리 집 앞마당 연못까지 온다. 연못은 정수기다. 지금까지 뿔 달린 사슴, 뿔 없는 사슴, 결혼 선물로 받은 홍백 장미나무의 꽃을 전부 뜯어먹은 개같은 사슴, 코요테, 여우, 들고양이, 다람쥐, 스컹크, 물 마시다가 연못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너굴맨 등이 다녀갔다. 내가 연못에서 물 마실 일은 없건만, 둥둥 떠다니는 개구리밥을 건져 올리는 일은 내 몫이다.


연못 안에는 모기고기가 산다. 원래 거기다 뭘 키울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쥐구멍을 찾으러 온 카운티 전염병 전문가가 수십 마리를 공짜로 줬다. 걔넬 연못에 넣으니 그냥 알아서 잘 크고 있다. 처음엔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 이젠 개구리밥을 펄 때 손톱만 한 것들이 휘리릭 지나가는 게 눈에 띈다. 잘 자라는 걸 보니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도 된다. 모기고기는 모기 유충을 먹고 자란다. 모기 유충이 얼마나 많길래. 이렇게 잘 크는 거냐. 아직 이 집의 첫 여름이 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모기 군단이 몰려올까 약간은 두렵다. 모기고기를 위해서 연못의 수심이 내려가면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사실 야생동물 물 먹이기와 모기고기 키우기는 놀이에 가깝다. 동물원에서 동물을 보듯, 귀엽다고 사진도 찍어주고 그런다. 하지만 역시 할 일이 있었다. 숨은 빌런이 있었다. 내 가슴팍까지 자란 괴물 잡초를 다 뜯고 보니, 뒷마당의 진짜 면모가 드러났다. 뒷마당의 숨은 주인은 땅두더지였다. 거긴 땅두저지 제국이었다. 놈들이 거기 그렇게 많이 사는 줄도, 앞니로 식물 뿌리를 다 뜯어 먹는 줄도, 쉬는 날도 없이 매일 땅굴 확장 공사를 하는 줄도, 뒷마당 흙을 밟으면 느껴지는 쿠션감이 그 아래에 있는 땅굴 때문인 줄도 전부 몰랐다. 집을 사면 관리할 거리가 생길 거라는 것은 알았다. 그중 하나가 땅두더지 잡기인 줄은 몰랐다.


놈들이 퍼올린 흙더미가 그렇게 눈에 거슬렸다. 처음으로 계엄령을 내리고 땅두더지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어릴 적 문방구 앞에서 하던 두더지 게임과는 완전히 달랐다. 100원 넣으면 시작하던 게임과는 다르게, 현실의 땅두더지들은 리듬에 맞춰 튀어나오지 않았다. 놈들은 이층 덱에서 내려다볼 수만 있었다. 덱에서 마당까지 내려가면 곧바로 땅속으로 꺼졌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구멍에다 물도 부어보고, 태양광 울트라 소닉 땅두더지 퇴치 디바이스를 땅에 박아보기도 했지만, 그건 전부 헛발질로 판명 났다.


결국 땅두더지 헌터 톰을 고용했다. 그를 추천한 옆집 이웃인 조애나 왈. 톰은 덫을 대충놓고 이주 후에 돌아오는 애송이들과 다르다고. 톰은 땅에 귀를 대고 땅두더지 발걸음 소리를 엿듣는 경지라고. 자기도 마침 고용하려던 참이었다고. 같이 힘을 합쳐서 놈들을 완전히 몰아내자고. 확실히 담벼락을 공유하는 조애나와 합을 맞추는 게 좋아보였다. 담벼락을 넘나드는 놈들까지 싸그리 잡을 기회였다. 톰을 불렀다.


톰이 설명한 땅두더지 잡는 법에 땅에 귀를 대는 액션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그의 설명은 신뢰가 갔다. 톰 왈. 물기가 남은 이 흙더미에 주목하라고. 여기 땅두더지가 다녀갔다고. 사실 이 흙더미는 고속도로 엑싯 같은 거라고. 그 아래를 파다 보면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땅굴이 나온다고. ‘ㅗ’ 요렇게 생긴 엑싯과 땅굴을 찾아서 땅굴 좌우를 향하는 단방향 덫을 놓으면 된다고. 과연 헛소문이 퍼질 정도로 톰은 고수였다. 마리당 85불. 자기가 잡지 못하면 내가 지불하는 비용은 일절 없다고 했다. 그에게 일을 맡겼다.


톰은 한 열 마리 잡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땅두더지를 어디서 85불 보다 싸게 사 와서 내게 되파는 건지, 톰은 삼주 동안 무려 스물 다섯마리를 잡았다. 조애나 땅에서도 한 열다섯 마리 잡았다고 했다. 한 마리 할인을 받아서 2000불 가까이 내고, 톰에게는 서비스 스톱을 부탁했다. 돈 2000불의 효력이 미미했기 때문이었다. 이층 덱에서 내려다보면 물기가 남은 흙더미들이 여전히 보였다. 휴가철 여행 비용보다 더 큰 돈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떠나던 날, 톰은 자신의 땅두더지 잡는 비법을 내게 알려주었다. 디그 딥. 깊이 파라고. 이 일에 숏컷은 없다고. 그러나 그는 땅두더지 몰아내기도 인간이 능히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며 응원했다. 은퇴 전에는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 싸웠던 활동가 다운 말이었다. 딱히 응원은 되지 않았다. 정 힘들면 자신을 다시 부르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떠났다. 그리고 땅두더지를 퇴치하는 일은 내 일이 되었다. 가끔 한 마리 잡을 때마다, 85불 아꼈다고 기뻐해야 할지, 아님 이놈을 내 손으로 잡은 걸 슬퍼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 너른 땅의 집사로서 내가 땜질해야 할 문제들은 많다. 그러나 새집에 이사 온 지 1년이 되는 올가을에는 처음으로 큰 프로젝트에 도전할 예정이다. 뒷마당에 부엉이 가족을 입주시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을 짝짓기 시즌 전에 붱이 집을 짓고, 나무 상단에 올리고, 붱이 집 뷰가 좋게 나무 가지를 쳐야한다. 내가 새집에 홀딱 반했던 것처럼, 한 마리의 수컷 붱이를 반드시 홀려야 한다. 그래야 수컷 붱이가 둥지를 트고, 암컷 붱이를 초대할 테니까. 물론 그게 애를 쓴다고 꼭 일어날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꼭 일어나도록 간절히 바랄 이유가 있다. 책지피티 왈. 부엉이는 땅두더지를 일년에 수백에서 수천 마리나 잡아먹는다고 한다. 마리당 85불. 사그라들었던 땅 개발 의욕이 갑자기 솟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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