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KR 회고
핵주먹 복서 마크 타이슨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맞기 전까지는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해외 살이도 그런 것 같다. 떠나서 충분히 살아보기 전에 그린 상상과 현실은 다르다. 어지간히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 현실의 펀치에 언젠가 두들겨 맞는다. 물론 나도 맞았다. 미국에서 보낸 지난 18년 동안 두루 멍들었다. 멍이 들고서야 이런 속마음이 보였다.
’내 해외 살이가 언젠가는 갑자기 확 펼쳐질 거라 늘 희망했었지.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그런 건 없었어. 그러니 그런 환상적인 것보다, 바로 여기 지금 누릴 관계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기꺼이 만나는 관계. 헛소리라도 솔직하게 떠드는 관계. 만나면 기분 좋은 관계. 점점 더 쌓여간다고 느껴지는 관계. 그런 관계를 충분히 만들고 싶다.’ 관계의 결핍 해소는 외로운 해외 살이의 펀치를 두들겨 맞은 내가 비로소 인정하게 된 니즈였다.
그러나 그걸 내 맘대로 채울 수는 없었다. 해외라는 환경이 그랬다. 사람들과 오래 영어로만 떠들다 보면 가끔 이렇게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고갱님. 하루치 잉글리시 토큰이 바닥났습니다.’ 내 모국어와 나고 자란 문화를 없는 것으로 여길 순 없었다. 영어로도 즐겁게 떠들 수는 있지만 한국어로도 떠들고 싶었다.
그렇다고 한국 사람을 원하는 대로 만날 수도 없는 곳이 해외였다. 교회나 일회성 네트워킹 모임에 가야만 볼 수 있었다. 드물게 만난다 하더라도, ‘난 특별해’ 병에 걸려있던 시절의 나는 자주 상대방을 판단했다. ‘당신. 해외까지 나와서 제대로 살고 있나요. 나처럼 특별한 길을 걸을 가능성이라도 있나요? 아닌 거 같은데요. 치이익 치이익. 이 선 넘지 마세요.’ 또, 자주 외면했다. ‘와. 이 사람은 영어도 잘하고, 스펙도 화려하고, 이미 특별한 길을 걷고 있구나. 난 아직인데. 부럽다. 만나지 말아야지. 그럼 이만.’ 판단도 외면도 하기 싫어서 자주 동굴에 들어갔다.
저 동굴에 스스로를 가둔 과거의 나를 꿈에서라도 다시 만나게 되면 우선 명치에다 한방 세게 때려 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난 특별해 병 스톱! 셀프 혐오랑 한국인 동족 혐오도 스톱! 치료를 위해서 달리기 레츠고! 먼저 사람들에게 환대하기 레츠고! 이 네 가지를 반복하면서 달리 해야 할 일도 레츠고! 달리 안 해야 할 일은 스톱! 지금 당장 레츠고!’
사실 이것들은 우연한 계기로 현실의 내가 실천한 액션이기도 하다. 코로나 때 우연히 달리기를 시작했다. 만능 포션인 달리기가 ‘난 특별해’ 병 치료에 도움이 되었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친구를 따라 네트워킹 자리에 갔다가 우연히 J를 만났다. 그와 스쳐 지나가는 사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린 달리기를 같이했다. 덕분에 친구가 되었다. 그길로 J와 나는 SFKR을 시작했다. 우린 둘 다 좀 뚝딱거렸으나 나머지의 합은 잘 맞았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SFKR에 오는 모든 사람들을 환대하자고 결심했다. 결국엔 내가 그렇게 환대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SFKR을 시작하고 러닝과 환대에 애를 쓴 지 2년 반이 지났다. 돌이켜보니 꽤 멋진 일을 해낸 것 같다. 무엇보다 내 관계의 결핍을 치료받았기 때문이다. 그 치료는 한 사람의 환대가 다른 사람의 더 큰 환대로 불어나면서 시작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SFKR은 달리기를 하는 곳이지만, 달리기만 하는 곳은 아니었다. 어느새 그곳은 오아시스처럼 느껴졌다. 그 오아시스에서 만난 여러 친구들 덕분에 비로소 이 해외 살이가 살만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때 치료가 끝났다. 해외까지 왔으니 얼른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저주에서도 해방된 기분이다. 이젠 아내, 의미 있는 직장, 좋은 날씨, 건강한 취미, 친구들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낀다.
그러니 이 글은 초대와 감사로 맺어야 할 것 같다. 해외 살이에 아무런 결핍을 느끼지 못한다고요? 축하합니다. 다음! 오. 사는 게 재미가 없다고요? 그렇다면 러닝을 추천합니다. 달리다 보면 재밌거든요. 런클럽 SFKR도 추천합니다. 혼자 뛰면 되는데 굳이 거기 왜가냐고요? 거기 다정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기 때문입니다. 러닝만큼이나 그런 이들이 모인 공동체가 해외 살이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달리기. 42.195km 달리기. 환대. 다정함. 그런 동화 같은 것들에 최대한 가까이 가보려고 애썼던 것이 제게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SFKR 친구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