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의 시간성과 관계성
작가의 말. 이 글은 갯벌을 도구적 관점에서 벗어나 존재론적으로 바라보는 생태철학적 전환을 제안합니다. 갯벌생태학자와 생태철학자의 대화 형식으로 총 3화로 나누어서 정리했습니다.
“8,500년.”
갯벌생태학자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이 갯벌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간입니다. 마지막 빙하기 이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시작된 긴 여정이지요.”
생태철학자는 발아래 갯벌을 내려다보았다. 회색빛 표면 아래에는 수천 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지금도 이 갯벌은 연평균 1mm씩 쌓이고 있습니다. 1년에 1mm. 인간의 감각으로는 거의 느낄 수 없는 속도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갯벌의 시간입니다.”
갯벌은 여러 시간을 동시에 살아간다. 지질학적 시간으로는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되고, 생태학적 시간으로는 하루 두 번의 조석 리듬을 따르며, 계절마다 다른 생명의 순환을 반복한다. 이 겹겹의 시간들이 갯벌이라는 존재를 구성한다.
“황해의 평균 수심은 44m에 불과합니다. 이 얕은 바다에서 여름철 몬순 강수로 인해 강으로부터 유입된 퇴적물들이 조류를 타고 이동하고, 수많은 섬들 주변에 쌓이면서 우리 갯벌이 만들어졌습니다.”
생태학자가 설명을 이었다.
“대조차, 다도해, 몬순기후. 이 세 요소의 만남이 세계적으로 독특한 한국 갯벌의 지형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갯벌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종종 어긋난다.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갯벌을 인간은 수년 만에 간척해 왔다.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간척사업으로 우리나라 갯벌은 약 절반이 사라졌다. 간척 이전 약 5,000㎢로 추정되던 갯벌 면적은 현재 2,443㎢로 줄어들었다.
“새만금 간척사업을 아십니까?”
철학자가 물었다. 생태학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1991년 시작된 새만금 사업은 33.9km의 방조제로 갯벌 약 4만ha를 막아 농지와 담수호를 조성하는 사업이었습니다. 여의도 면적의 140배 규모였지요.”
“그 결과는요?”
“갯벌 생태계의 급격한 변화, 어업 생산량의 감소, 수질 오염… 여러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갯벌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의 그물망 한가운데 있다. 육상생태계와 해양생태계를 연결하는 매개자이며, 무수한 생명들이 서로 얽혀 있는 복잡한 시스템이다.
“동아시아-대양주 철새이동경로를 아십니까?”
생태학자가 물었다.
“뉴질랜드에서 겨울을 보내고 시베리아 번식지로 이동하는 도요류와 물떼새류가 우리 서해안 갯벌에서 봄과 가을에 먹이를 보충합니다. 이 이동경로에는 5천만 개체 이상의 이동성 물새들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중 32종은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갯벌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은…”
철학자가 말을 이었다.
“그 지역의 생태계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철새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군요. 전 지구적 생태네트워크의 한 마디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갯벌의 관계성이다. 보이지 않는 연결의 그물망. 갯벌의 저서생물들은 서로를 먹고 먹히며 복잡한 먹이그물을 형성한다. 갯벌은 육지로부터 영양염류를 받아들이고, 바다로 유기물을 내보낸다. 홍수의 물을 흡수하고, 태풍의 피해를 완화한다.
“그렇다면 갯벌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철학자가 물었다.
“2019년 해양수산부는 갯벌의 생태계서비스 가치를 연간 17조 8,121억 원으로 추산했습니다. 탄소 흡수, 수질 정화, 재해 방지… 이런 기능들을 화폐 가치로 환산한 것입니다.”
“하지만…”
“네,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생태학자가 동의했다.
“갯벌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것이 핵심 질문입니다. 갯벌이 인간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보전해야 하는가, 아니면 갯벌 그 자체가 내재적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중해야 하는가.”
두 사람은 다시 갯벌을 바라보았다. 물이 빠져나가면서 드러난 표면 위로 작은 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들은 그저 존재한다. 그 자체로.
“존중의 윤리학이 필요합니다.”
철학자가 말했다.
“도구적 가치를 넘어서, 갯벌 그 자체를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갯벌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요.”
생태학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망원경을 다시 들어 올렸다. 저 멀리 철새 한 무리가 갯벌 위를 날고 있었다. 수천 킬로미터의 여정 속에서 이곳은 생명의 쉼터였다. 인간의 시간이 아닌, 갯벌 자신의 시간 속에서.
* 메인 이미지는 인공지능 이미지입니다.
참고문헌
1. 한국의 갯벌 세계유산센터 (2021). 한국의 갯벌 형성과정. https://www.getbolworldheritage.org
2. 순천만국가정원 (2025). 갯벌 형성과정. https://scbay.suncheon.go.kr
3. 국가지도집 제2권 (2020). 철새의 이동 경로. 국토지리정보원
4. 동아시아-대양주 철새이동경로 파트너십 (2025). 철새 이동경로. https://foundation.eaaflyway.net
5. 류종성. (2021, 9월 18일). 한국갯벌, 절반이 사라졌다. 프레시안
6. 해양수산부. (2021, 12월 20일). 우리 갯벌의 생태계서비스 가치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새만금 간척사업.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