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by 마징가

한국 근현대 화가인 김창열(金昌烈, 1929~2021)은 평생을 물방울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지난달 김창열 화백의 생전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가 개봉되었다. 몇 해 전 신정근 교수님께서 쓰신 김창열 화백의 전시 서문을 여러 번 읽으면서 화가가 그린 물방울에 내포된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며, 한국 근현대 회화사에서 김창열은 많은 주목을 받아왔기에 그를 조명한 영화의 상영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러던 중, 성곡미술관에서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장면을 모은 사진전이 있어 미술관을 찾게 되었고, 마침 영화 홍보를 위한 감독과 대화의 자리가 진행되고 있어 인터뷰를 관람할 수 있었다. 영화는 김창열 화백의 둘째 아들인 김오안 감독과 프랑스인 브리짓 부이요 감독이 공동으로 연출했다. 김오안 감독은 늘 말을 아끼던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서 이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감독은 인터뷰 내내 통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느리더라도 한국말로 대답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꾹꾹 눌러 대답하는 그의 대답에서 아버지의 예술세계를 온전하게 대중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심이 느껴졌다.


영화는 화가 김창열의 말년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한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의 모습과 그 세계를 담아냈다. 김오안 감독의 동료 작가인 브리짓 부이요 감독이 그를 돕겠다고 자청해 공동연출이 이루어졌다. 브리짓 부이요 감독은 화장기 없는 얼굴에 하얀 니트에 까만 바지를 입고 젊은 사람들도 소화하기 어려운 멋스러운 부츠를 신고 있었다. 소위 사람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말인 아우라(Aura)가 느껴졌는데, 단단하고 고요한 감독의 분위기는 아마도 그녀가 살아온 삶의 모습과 피사체를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에 대한 영화가 어떤 장면으로 시작했으면 좋겠냐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화가 김창열이 물방울을 그리게 된 이유에 주목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대신 면벽수행(面壁修行)을 하고 자신의 눈꺼풀을 자른 달마의 이야기, 자신의 팔을 자른 혜가의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아침마다 노트에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필사하는 화가의 모습, 손주를 보고 함께 환하게 웃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 하얀 벽을 마주보고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통해 영화에서 화가는 도인의 이미지로 혹은 어린아이의 이미지로 보여진다.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김창열은 어린 시절 6.25전쟁을 겪으면서 눈앞에서 인간의 죽음을 여과 없이 보았고, 동료와 친구들의 죽음 속에서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미아리고개에서 국군의 머리가 고무풍선처럼 굴러다니는 장면과 눈앞에서 동료가 포탄을 맞아 사지가 떨어져나가는 것을 목격했으며, 한국전쟁 중 북한지지자로 오인 받아 처형될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목숨을 걸고 홀로 38선을 넘을 때 기도했다고 한다. 신이 있다면 제발 나를 살려달라고. 삶과 죽음의 순간을 오가면서 그는 한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두려움을 모두 경험했을 것이며, 그의 물방울은 그의 생에 있어서 전쟁과 역사의 상흔에 얽힌 트라우마와 뗄 수 없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트라우마에 대한 상처와 위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트라우마라는 말의 가장 오래된 뿌리는 ‘뚫다’라는 뜻의 그리스어다. 트라우마에 의해 인간은 꿰뚫린다. 정신분석 사전은 그 꿰뚫림의 순간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충격의 강렬함, 주체의 무능력, 효과의 지속성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으로는 실감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젠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었을 때에야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 …… 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런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상상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대상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례출판(주), 2018, 42~43쪽.


신형철의 트라우마에 관한 말처럼 김창열은 평생을 꿰뚫린 채 살았고, 무죄한 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공유하기 위해 더 치열하게 물방울을 그려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방울을 그리는 건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라는 김창열의 말은 반대로 “모두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지속해온 평생 물방울을 그리는 작업은 지난한 우리의 역사에서 스러진 죽은 자를 위한 진혼곡이라고 설명되기도 하고, 눈물일 수도 있다고 말해진다. 그의 물방울은 역사와 죽어간 이들을 기억하고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 1913~2005)는 ‘기억을 치료하려면 도리어 사실들의 흔적을 간직해야 한다’고 말한다. 죽은 자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공감할 때, 진정한 애도와 아픔의 극복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김창열의 물방울은 개인의 기억과 역사의 재현이자, 성찰이다. 그 과정의 끝에서 마침내 평온을 찾은 투명하고 영롱한 물방울은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닐까.


이 글은 2022년 10월 14일 <웹진 오늘의 선비>에 기고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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