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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이터 수첩 Sep 23. 2018

[통쫘] 그녀는 이제 ‘통쫘’입니다.

 <통쫘전>, 레이저

그녀는 이제 ‘통쫘’입니다. 


왠지 쎈 언니처럼 보여서,

왠지 나랑은 좀 안 맞을 거 같아서,

몇 번을 봤지만 인사할 수 있는 기회를 슬쩍 피해갔다.

만나야 하는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다고 했던가.

그렇게 몇 년을 돌고 돌아와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사람을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고 했던가.

처음 만났던 날, 초록색 소주병을 앞에 두고 우리는 언니동생을 먹었다.


그 날 구혜영은 구혜영과의 이별을 준비 중이라 했다.


이름: 사람들이 나라는 존재를 기억하고 알아가는 방식. 


구혜영

그러고 보니, 혜영이라는 이름이 왠지 그녀의 개성에 비해 너무 평범한 것도 같다 싶다. 

사람의 삶은 이름 따라 간다던데

그녀가 작가로서의 삶에 마음을 부대끼는 이유가 어쩌면 이름 탓은 아닐까.

(그녀의 부모님께 죄송했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은 신보슬이다.

신보슬.  한번 들으면 잘 안 잊게 되고 이쁜 이름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고운 이름 자랑하기 대회(옛날에는 이런 대회도 있었다)에서 한글상도 탄 이름이다. 하지만, 학생 출석부에 이름이 한자로 올라 가 있던 시절, 한글 이름은 유독 눈에 띄여 늘 제일 먼저 불리는 이름이었다. 짐작했겠지만 70년대 보슬이란 이름은 특이했고, 당연히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같은 이름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저 이름을 들은 사람들은 늘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흰 눈이 보슬보슬 내려옵니다’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정작 부모님은 눈이 보슬보슬 내리는 것인지,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것인지 신경도 쓰지 않으셨지만, 난 늘 궁금했다. 내 이름이 비에서 왔는지 아니면 눈에서 왔는지.

대학을 다니면서 나는 지하철 1호선, 세칭 지옥철을 다고 다녔다. 입학하고 얼마 안 지나서였으니 91년 쯤이었던 것 같다. 서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앞에 앉은 할아버지께서 쯧쯧 혀를 차시더니 

“요즘 것들은 애들 이름을 맘대로 지어”

당시 유행이었던 책 둘레에 쓴 학번과 이름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인 것 같았다.

그러고는 뚫어지게 보시더니, 대뜸 생년월시를 물으셨다. 흥미가 돋은 나는 술술 말씀해 드렸다. 

“장군 사주야”


“그런데, 나라가 원치를 않네”

옆에 앉은 아저씨가 킥킥 웃으셨다. 

아마도 지루한 지하철에서 할아버지와 나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풀어내시는 일장 연설. 

요약하면 이름은 내가 부르는 경우보다, 남이 불러주는 것을 듣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 듣다보면 그런 사람이 되어 간다는 요지였다. 그래서 사주를 잘 보고 부족한 것을 이름으로 채워줘야 한다는. 나는 사주가 쎈 장군 사주인데, 그 사주가 여자에게 가서 기운을 받지 못하는 데다가 대운도 받쳐주지 않는데, 이름마저 약해서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보슬할머니는 좀 웃긴다. ‘보슬보슬’불리다 보면, 70세가 되어도, 90세가 되어도 왠지 철이 들지 않은 그런 아이 같은 할머니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암튼 그 뒤에도 뭐라 말씀을 하셨던 것 같은데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장군 사주인데 나라가 원치 않는다는 말이 워낙 쎘던지라.


내 이름은 나탈리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에겐 나탈리라는 이름이 있다. 어쩌다 얻게 된 세례명. 하지만 그 세례명이 너무 촌스러운 것 같아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 그런데 그 세례명을 영어이름으로 사용한 후부터 국제 프로젝트를 많이 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이름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이름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면, 그날 그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녀는 구혜영이었습니다.

구혜영은 중앙대학교 조소과를 나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골드스미스를 나왔다. 이후 광주비디어아트 비엔날레, 베니스 등 차지도 넘치지도 않게 전시를 이어오고 있는 걸 보면 그렇게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도 없다. 잠깐 예술가들과 함께 했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얼굴을 알리기는 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그것은 그저 해프닝이었고, 작가로서의 그녀의 삶에 큰 변화나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런 밋밋함이 싫었을까.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또 다른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려는 지금, 구혜영은 다른 이름을 찾는다.

이전 작품들을 돌이켜 보면, 구혜영은 이미 꽤 오래전부터 구혜영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던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이 ‘소비되는 것, 죽음, 인생무상’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말하는 죽음, 인생무상은 연속극에 흔히 등장하는 과장된 눈물과 회환, 슬픔으로 점철된 감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광란, 오락과 여흥이 혼재하는 익살스럽고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지극히 구혜영스럽게. 


헤어짐의 준비는 <네가 볶아 먹은 멸치 장례식>(2000)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날 밥을 먹다가 반찬으로 나온 멸치조림 사이에서 집을 위아래로 쩍 벅리고 죽은 멸치를 발견했는데,  늘 먹던 멸치조림, 그 많은 멸치 중에 유독 죽음이 억울하기라도 한 듯 무서운 얼굴로 죽은 보였던 멸치를 잊을 수 없어 멸치의 관을 짜고 장례식을 치렀다. 죽은 정자를 기리는 장례식 (<두 번 다시 속지 않겠다>,2005)도 치렀다. 이처럼 영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죽음’과 ‘장례식’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고, 자신의 장례식인 <장례연습 Funeral Practice>라는 시리즈로 이어졌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은 검은 정장 차림의 안내자들에게 환영과 감사의 인사를 받는다. 악수를 건네고 와인 한 잔과 불 켜진 양초를 받고 자리로 안내되어서야 비로소 뭔가 석연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다. 단상 앞에 높인 샌드위치 박스에 들어있는 샌드위치 사이에 끼여진 작가의 편안하게 잠든 얼굴. 관객은 자신이 문상객이었음을 알게 된다. 엄숙해야 하고, 슬퍼야 하고 진지해야 하는 죽음 앞에서 샌드위치 복장의 작가를 만나고, 샌드위치 광고문을 추도사로 낭독하는 모습을 보면서 맘껏 웃지도, (작가의 죽음을) 슬퍼하지도 못한다. 아마도 장례식에 왔던 어떤 관객은 이후에도 샌드위치만 보면 구혜영의 장례식 연습을 떠올릴지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아주 시간이 많이 흘러 작가의 부고를 듣게 된다면, 그 장례식 연습의 그 날을 생각하며 피식 웃을지도 모른다. <장례연습>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일상적으로 그녀를 보내기 위한 준비였던 것 같다.


이제 그녀는 “통쫘”입니다.

이미 구혜영은 구혜영과의 이별을 연습했고, 준비했고. 이별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은 새로운 이름과 함께 시작하기로 한다. “통쏴”. 이 이상하고 얄읏한 이름. 이름 같지 않은 작가의 새 이름은 추첨을 통해 우연히 결정된 자음과 모음이 만들어졌다. 당연히 의미 같은 것은 없다. 아무 의미 없는 이름 ‘통쏴’. 이제 막 새로운 출발에 섰기에 아직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백짓장 같은 그 이름은 꽤 잘 어울린다. 이제 그녀는 “통쫘”로 화가의 삶을 살아가려 한다.


조소과를 전공했던 구혜영이 영상작품을 만들고 퍼포먼스를 하면서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종횡무진 달렸다면, ‘통쏴’는 붓을 들고 명작의 앞에 앉았다. 왜 하필 그림인지, 왜 모사인지 굳이 묻지 않았고, 애써 그럴듯한 답을 찾지도 않았다. 

성별도 국적도 가늠치 못하게 하는 철저하게 중립적인 이름으로 그저 새로운 챕터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을 뿐이다. 아마도 명작을 따라가는 붓결마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그 예술가의 삶에 대해 물을 것이고,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해가며 화가 ‘통쫘’의 길을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 한걸음에 응원과 지지를 보탤 뿐이다.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 또 다른 기회에 담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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