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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이터 수첩 Sep 25. 2018

[방&리] 해리, 예술가되기를 연습하다

해리1)예술가 되기(becoming artist)를 연습하다.     


# Scene 1. 어떤 오해&리의 작업은 어렵고불친절하다.

관객은 종종 방&리의 작업 앞에서 무엇을 봐야 하는지, 어떤 메시지를 읽어야 하는지 난감해 한다. 자연스레 작품이 어렵고 뭔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한다. 사실이다. 방&리의 작업에는 현대사회는 물론 세계사에 대한 엄청난 레퍼런스들이 있다. 그뿐이 아니다. 소위 미디어아티스트이기에 꽤 복잡한 프로그래밍과 기술적인 언어들도 난무한다. 이 모든 것을 다 찾아보고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여기까지도 참아보겠다. 문학을 한 방자영 덕분인가. 그들의 작품에는 꽤 많은 은유와 수사들이 있다. 게다가 미디어아트라고는 하는데, 블링블링한 테크놀로지와 장비는 보이지 않고, 연극 무대의 한 부분이 전시장에 놓여 있는 느낌이다. 제목에서 힌트를 얻을까 하면, 알고 있었다는 듯, 모호하게 빠져나간다. <Revision History X>, <Cul-de-sac>, <Elephant in the living room>, <Farm: Friends & Twitterers>, <Bury your head in the sand like an ostrich>, 의미심장한 듯 보이는 이 제목들은 작품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 그들의 작업은 어렵다. 그리고 친절하지 않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작품은 쉬워야 하는가? 친절해야 하나? 확실히 그들의 작업은 한눈에 읽히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의 작품이 어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그들의 작품을 읽기 위한 프로토콜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Scene2. 컬렉티브 그리고 협업의 함정 

 “우리는 이미 한 배를 탔다. 언제풍랑을 만나 좌초할지 모르지만, 

   그 긴장감과 두려움이 공동 작업에 힘을 실어 주는 것 같다”(방&리)     


방&리는 방자영과 이윤준 2인으로 구성된 컬렉티브다. 방자영은 문학을 전공했고, 이윤준은 시각예술을 전공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공부했고, ZKM에서 활동한 덕택에 미디어아티스트라는 레이블이 그들에게 따라다닌다. 뉴미디어, 리서치, 디자인 등을 기반으로 작업하며,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설치는 물론 키네틱 라이트, 데이터 프로세싱, 비디오 모자이크 영상 등 다양한 형식을 작업으로 소화하고 있다. 확실히 혼자가 아니라서 가능한 다양한 형식적 실험과 의미의 풍성함이 그들의 작품에서 드러난다. 


뿐만 아니다. 이미 듀오 컬렉티브인 그들 주변에는 많은 미디어아티스트 친구들이 있다. 다양한 기술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필요할 때 적절히 모여서 함께 작업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종종 컬렉티브인 방&리는 임시적 컬렉티브를 구성하여 작업하면서 공연이나 무대연출과 같은 새로운 영역으로의 확장을 모색하기도 한다. 

확실히 컬렉티브이기에 가능한 작업들이 존재한다. 의견조율의 과정과 상호이해의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규모 있는 작업을 진행하기에 컬렉티브는 유용하다. 그러나 컬렉티브는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한시적일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확고하다고 생각했던 ‘믿음’과 ‘신뢰’는 생각보다 유약하다. 어렵게 만들어낸 성과 앞에서 사람들은 종종 배신을 하고, 오해가 쌓여 등을 돌리기도 한다. 아무리 오래된 컬렉티브라고 하더라도 때론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깨지기도 한다. 그렇게 우정은 생각보다 쉽게 금이 가기도 한다. 그들의 작업이 ‘우정’에 큰 비중을 두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 Scene3. 우정에 관하여

 “우정은 두 명 이상의 사람 사이의 협동 관계를 말할 때 쓰이는 용어이다.”

(위키피디아)     


아마도, 방&리의 작업에 그렇게 많이 등장하고 있는 ‘우정’은 그들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즐겁고 신나게 아이디어를 공유했었을 테고, 생각지 못했던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문제를 풀어갔던 행복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들이 언제나 해피엔딩으로만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해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Friendship is Transparent>가 ‘Friendship is not transparent’으로도 읽히는 것은 지나친 감정이입일까?


짐작했듯이, 방&리에게 ‘우정’은 핵심키워드이다. 그러나 단순히 개인적인 경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 않다. ‘우정’이라는 보편적 감정의 근본을 짚어보고, 그것이 어떻게 사회안에서 작동하는지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2012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있었던 <Nonzerosum Society> 2)전시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전시에서 방&리는 광섬유 다발로 만들어진 <Friendship is Transparent>라는 작품과 더불어 전시장 입구에 <Friendship, 1945-> 이라는 묘비명을 설치했다. 1945년은 방&리의 작업에 주요 레퍼런스로 등장하는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이 쓰여진 해이기도 한데, 이 작품이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의 배신을 바탕으로 하는 우화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우정의 죽음을 알리는 이 묘비명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 전시에서 방&리는 ‘우정’이라는 단어와 함께 조명작업으로‘약속’이라는 단어도 등장시키는데, 우정과 약속이라는 것이 정치인들의 연설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방&리가 작업에서 말하는 ‘우정’이라는 것이 그저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일차원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Freindship is Universal

우정에 대한 다른 작업 중 <FRIENDSHIP IS UNIVERSAL>은 아주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이 작품은 디지털 폰트를 변형한 구조물 위에 설치한 조명 모듈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언뜻 보면 잘 감지되지는 않지만, 조명의 밝기와 깜박임 등은 다양한 전자 신호를 받아들여 움직임과 사운드, 데이터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반응하는 인터랙티브 라이트 설치작품이다. 방&리에게 우정이란 일종의 공통감정으로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협동적 관계 형태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우정’의 개념은 물리적인 공간이나 사회적 배경, 인종이나 개인의 관심사와 같은 차이를 넘어 사이버공간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 문장이 1980년대 초반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미국 TV 드라마인 <브이 V>에서 외계인들이 지구인들과의 화해를 도모하려고 만들어 붙였던 포스터에 나오는 문장과 동일하다는 점은 오늘날 인터넷을 기반으로 문화나 국적, 거리의 한계를 넘어서 네트워크가 확장되는 세상에 시사하는 바가 남다르기도 하다. 테러와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 시대, 모두가 동시에 연결되는 지구촌이라는 오늘, 여기에서‘우정’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미니멀한 조명의 깜빡임은 ‘우정’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라고, 세상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라고 재촉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 Scene4. 테크놀로지 기반의 사회가 투명한 사회라는 환상

얼마 전 구글 메일에서 알림메시지가 왔다. 무료사용 용량을 거의 다 사용했으니, 이제 유료로 전환해야 한다는 메일이었다. 유료전환을 하지 않으려면 메일박스를 정리해야 하는데, 수년간 써왔던 메일함을 정리한다는 것은 수고스러운 일이었다. 아마 꼬박 며칠은 걸릴 것 같았다. 대부분의 주요 첨부파일들은 저장했지만, 그렇다고 막상 메일박스의 메일을 지우려는 왠지 불안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메일 계정을 유료로 전환했다. 구글은 나의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다. 지인들의 연락처와 스케줄(구글 캘린더), 주요 서류(구글 드라이브), 심지어 여행가서의 내 방문지(구글 지도). 언제 어디서나 이 모든 것들에 접근할 수 있는 이 투명한 사회가 문득 무서워졌다.

Lost in Translation @Nabi

방&리의 <Lost in Translation> 역시 유사한 경험에서 비롯된 작업이었다. 2012년 4월 구글 번역 API FAQ페이지에는 구글 번역 API 버전 1 서비스가 더 이상 제공되지 않으며, 버전2로 새로운 유료 서비스로 대체되었다는 공지가 떴다3). 문제는 구글의 번역 API 버전1 서비스가 중지되면서 트위터 계정을 통해서 몇몇 언어로 번역하여 피드했던 가변적 스크린플레이(Variable Screenplay)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영어로 생성된 대사들이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트윗 되어야 했는데, 서비스 중단으로 인하여 원문 그대로 영어로만 피드 되고 있었다. 


사실 구글이나 소셜미디어 회사들이 오픈소스로 제공하던 서비스를 중단하거나 유료로 전환하면서 발생하는 이러한 일들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유료계정으로 전환했듯이 투덜거리면서 전환하거나 탈퇴한다. 하지만, 방&리는 이러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작업화하기로 했다. 그렇게 만들어 진 것이 <Lost in Translation>이다.


<Lost in Translation>은 번역 데이터가 처리되고 소비되는 과정을 피카사 API에 연동시킨 실시간 모자이크 영상과 구글 번역 API 를 사용하여 시각화했다. 그리고 오픈소스를 표방하여 한때 무료로 제공되었던 서비스가 유료로 전환되면서 번역과정에서 의미가 상실되는 지점과 그에 대한 비용지출에 대한부분들도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FAQ>의 경우에는 이미지가 언어로 처리되거나 전환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사용자들이 소셜미디어 상에 무심코 생성해내는 이미지들과 메시지가 만들어내는 비디오 모자이크 영상은 관객에게 일상에 침투해 있는 미디어의 위력, 프라이버시에 대한 이슈들을 생각하게 한다. 


얼핏 단순하게 보이는 (때로는 별 의미 없이 보이기도 하는) 스크린상의 이러한 이미지들은 소유와 공유, 오픈소스, 집단 지성, 사생활보호권, 소비자의 권리, 지적재산권 등 오늘날 테크놀로지 기반의 사회가 작동하면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이슈들을 내포하고 있다. 방&리의 말처럼, 오늘날 다양한 소셜미디어 기반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많이 소통한다고 믿고 있으나, 사람들은 그저 흘려버리는 이 상황들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음을, 이러한 상황들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방&리는 작품을 통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여전히 소통은 자유롭지(free) 않으며, 무료(free)가 아니다’      


# Scene5. 거실/서재라는 무대와 모듈화된 작품들따로 또 같이

“우리 스스로 작업을 할 때, 진척이 있는지 자주 묻곤 한다. 소셜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데이터 비주얼리제이션을 통한 미학적 접근 방식을 한 예술이 때로 의미를 상실한 것처럼 보일 때, 또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작업이 일종의 시위(demonstration)처럼 보이면서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 이 질문은 아직 유효하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우리는 더 근원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집단(collective)의 이름으로 공유한 정보와 데이터들은 어떻게 처리되며 소비되는지 가끔 정책(policy)이 바뀔 때마다 개인정보와 공유의 수위를 다시 조정해야 할 때,“간편하고 손쉬운 사용자 환경”이 무엇인지 묻게 된다. 현대인의 철학, 삶의 방식, 언어와 소통 방식까지 바꾸었을지 모르는 인터넷은 사회의 상호의존성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방&리 작가노트에서)     


현대미술에서 질문은 중요하다. 특히 민주주의와 투명성으로 위장하고 있는 테크놀로지 기반의 사회에서 현대예술은 (그리고 그것이 미디어아트라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 사회가 무수히 많은 조각들로 파편화되어 있어 커다란 그림과 구조의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울 때, 질문은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그 질문은 방식을 달리해야 한다. 세상이 변했기에 지금까지 해 왔듯 단일한 논리적인 방식으로는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의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 다양한 층위에서 동시다발적인 질문과 답이 이루어져야 한다. 복잡해진 세상에 맞춰.


Friendƨ in the living room

방&리의 작품들이 흥미로운 것은 변화하는 세상을 향해 부단히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만의 방식의 질문이기에 익숙해지기는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다. 그들은 하나의 작품에 하나의 메시지를 담지 않는다. <Elephant in the living room>4), <Friendƨ in the living room>, <Transparent Study>과 같은 작품들에서 잘 드러나듯이 관객이 들어설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놓고, 모듈화 된 작품을 이리저리 짜 맞추면서 다양한 질문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쏟아낸다.  


먼저 <Elephant in the living room>은 거실이라는 무대에서 출발한다. 카펫과 의자, TV가 있는 여기는 거실이다. 거실로 설정된 공간은 ‘이미지의 장소이자 행위의 무대이다. 또한 반전의 공간이자 영화와 연극의 공간이며, 미디어라는 거울이 비추는 곳’이다. 거실은 토론의 역사에 등장하는 소품들을 변형 재구성한 모조품가구와 집기들, 조명과 TV 모니터, 비디오 카메라 등으로 꾸며졌다. 그리고 거실에 놓여있는 코끼리 상(象)이라는 글자 조각은 수천 개 구멍과 연결된 광섬유 다발을 통해 프로젝션 되고 있는 모자이크 영상을 텍스트 메시지로 전달한다. 


방&리는 이 작업이 이미지의 삶과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정보화 시대는 모든 것에 접근할 수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본질적인 것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우리가 당면한 문제나 실체가 너무 크고 복잡하여 파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없다고 믿거나 없다고 믿는 척하는 모습을 변화하는 이미지와 이미지 대상 자체인 코끼리의 은유를 통해서 보여준다.


<Friendƨ in the living room>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프린드(freind)’5)개념을 바탕으로 전개된 작업으로 현대예술은 물론 현대사회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우정과 협업, 공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작품에는 모자이크 제너레이팅 영상과 연결된 광섬유 작업인 <Can’t take my eyes off you>와 <You are my sunshine, my only sunshine> 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유투브 사용자들이 올린 샘플들을 리믹스해서 실시간으로 재생되고, 이는 또 다시 라이트 작업과 연동되어 전시장을 채운다.


이 작업 역시 무대는 거실이다. 여기에서 친구들이 있는 ‘거실’이라는 공간은 사적인 공간을 넘어 소셜미디어와 개인, 거대기업과 클라이언트, 네트워크 사용자 사이에 발생하는 사건들을 떠오르게 하는 공간을 재현한다. 방&리는 이렇게 조합된 거실을 통해 협업과 공존, 우정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이고, 어떻게 앞으로 지속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토론하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토론 역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역사를 통해 지금껏 무수히 많은 토론들이 있어 왔으며, 그 토론들이 협력과 공존, 우정의 가치에 대해서 역설해왔지만, 여전히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토론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토론에서 중요한 것은 정해진 답이 아니라, 토론을 통해 에둘러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깊이 있는 사고, 토론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방향성이기 때문이다. 작가노트에서도 언급하듯, ‘작업을 통해서 대화할 수 있다면 – 그리고 거의 예술적 가치에 근접한 윤리적인 삶은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 토론의 과정 자체는 가치 있는 삶의 규율이 되어 법적, 사회적, 문화적 관습의 제약을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Transparent Study>를 위해 설정된 무대는‘서재’이다. 서재의 중심에는 책장처럼 보이는 설치물이 있고, 여기에 그동안 예술에 대해서 리서치 했던 자료들과 그 과정에서 수집되었던 것들, 컬렉션, 레퍼런스 카드들이 있다. 네온라이트로 만든‘Friendship’이라는 단어도 보이고, 거리, 시간, 사색이라는 단어도 보인다. <Elephant in the living>에서 보았던 코끼리 상(象)도 있다. 영상과 모니터, 폐쇄회로 카메라도 있다. <Friendƨ in the living room>에서 보았던 염소 해리도 다시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책장이라는 구조물은 중요하다. 일차적으로 책장은 도서관, 문명사회, 지식의 정보 등을 의미한다. 도서관이나 문명사회는 일반적으로 견고하고 거대한 건물로 상정한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에서의 도서관, 지식의 창고는 투명하다고 방&리는 생각한다. 때문에 책장은 공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벽이 되기도 하고, 문이 되기도 한다. 철재골조의 열린 구조로 만들어진 책장은 안과 밖을 연결하면서 단절시키기도 하고, 화면의 이미지를 반사하기도 하고, 투영하기도 한다.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아닌 투명한 공간으로 기능한다. 물론 투명하다는 것이 꼭 긍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서재란 원래 사적이고 개인의 취향이 드러나는 내밀한 공간이다. 투명하다는 것은 모든 것들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투명성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사적인 공간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외부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빅 데이터로 대변되는 정보화 사회, 정보의 공개와 공유와 같은 문제들을 다시 마주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Elephant in the living room>이나 <Transparent Study>와 같은 작품들은 테크놀로지 기반의 사회에 대해 은유적으로 언급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모습이 이대로 괜찮은 것이냐고 관객에게 질문한다. 기존의 많은 미디어아트 작품들이 정보화 사회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기술을 전면에 드러낸다던지, 아니면 사회고발형식의 액티비즘을 표방했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방&리의 작업은 상당히 은유적이고 간접적이고 개성있는 형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의 내용적인 면도 흥미롭지만, 여기에서 종종 간과되는 것은 작품에 포함된 또 다른 작품들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작품은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그 안에 다른 작품들과 다양한 작은 소품들이 마치 모듈화 되어 작동한다. 개별 작품으로도 기능하지만, 무대화된 설정공간에서 함께 작동하면서 메시지를 강력하게 하기도 하고, 목소리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마치 단일한 주제에 대한 다양한 변주처럼 개별 작품들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작품은 하나의 해석에 고정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질문과 문제에 열려있다.     


# Scene6. 어떤 오해에 대한 짧은 해명

확실히, 방&리의 작품들에는 세세하게 따져봐야 하는 레퍼런스들이 많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몇 시간째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을 다시 뒤적거리고, 희생양이 나오는 성경구절을 찾아봤는가 하면, 그들의 작업노트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봐야 했다. 작품 어디에서도 작가의 의도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단서들만이 있을 뿐이다. 방&리의 작업이 어렵다는 오해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방&리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 작품에 있는 각각의 오브제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찾아내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다. 이것은 작품을 보는 부수적인 수고이자 부록 같은 즐거움이다. 오히려 세팅 안에 들어가 주인공이 되는 것, 마련된 거실에 앉아 세심하게 준비된 디테일을 즐기는 것, 꾸며진 서재에 들어가 책장에 놓여 있는 이미지들을 바라보면 된다. 그들이 던져놓은 단어들을 연결 짓고, 느낌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방&리는 의외로 친절하게 많은 단서들을 던져 놓았다.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방식의 감상법이 낯설기 때문이다. 일단 시작하면, 방&리의 이야기는 명쾌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알 수 있는 그런 경험을 닮아 있다.      


# Scene7. 그래서, ‘예술가 되기를 연습하는 예술가 6)

적어도 현대사회에서의 예술가란 세상을 향해 적절하게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들이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본질에 접근하고자 한다는 것이고, 세상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방&리는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예술가이다. 그들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테크놀로지가 보여주는 화려한 외모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사회의 삐걱거림을 주목한다. 그리고 이대로 괜찮겠느냐고 질문한다.


방&리는 미디어아티스트이다. 때론 그들의 작품이 그저 쉽게 볼 수 있는 설치작품처럼 보이더라도, 그 이면에는 사운드와 라이트를 제어하는 첨단 기술을 비롯한 다양한 기술들이 사용된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기술적인 부분 때문에 미디어아티스트라고 하는 아니다. 방&리는 일관되게 테크놀로지 기반의 사회가 작동하는 구조와 시스템, 그리고 이러한 사회가 불러오는 변화라는 주제에 대해 작업해왔다. 미디어아트가 다양한 미디어와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뿐 아니라, 그것이 야기하게 될 변화에 대해 질문하고 언급하는 것이라 할 때, 방&리는 확실히 미디어아티스트이다. 


하지만, 방&리는 조금 다른 미디어아티스트다. 많은 예술가들이, 미디어아티스트들이 최종적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이들은 늘 과정 중에 있다. 개개의 작업들은 마치 커다란 무대 위의 소품 같아 보이기도 한다. 물론 소품이라 하더라도 독자적인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지지만, 방&리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소품들이 어우러져서 만드는 무대이고, 상황이다. 그것은 특정 멜로디에 대한 끊임없는 변주이다. 그래서 방&리의 작업은 늘 진행 중이다. 진행 중인 작업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그들은 ‘예술가 되기’를 연습하는 예술가다. 서슴없이 과학자나 사업가들과도 협업을 진행하며, 그 과정에서 상처받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즐거움에 설레기도 하면서 매 순간 ‘예술가 되기’를 하고 있다. 


진행형의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그림이나 조각과 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것과는 다르다. 세상에 혹은 주어진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할 줄 알아야 한다.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해야 하고, 시스템의 구조를 인지해야 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급변하는 시대에 예술가의 예민한 통찰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예민한 통찰 역시 진행형이다. 그것은 끊임없는‘예술가 되기’의 연습이다. 그 연습이 축적되면서 의미 있는 작업들이 생겨난다. 지금, 방&리가 하고 있는 것처럼.



1) <Friendƨ in the living room> 이후 방&리의 작업에는 종종 박제된 염소 해리가 등장한다. 해리는 희생양을 의미하는 동시에작가 자신의 페르소나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해리라는 이름은 탈출마술의 대가로 유명했던 해리 후디니(Harry Houdini)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그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헝가리계 미국인 마술사이자 난국마술사스턴트 맨 배우연기자이다. 1926년 10,몬트리올 맥길대학교를 방문한 후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서 자신의 배를 얼마든지 때려도 끄덕없다고 장담했다그러나 그는 조슬린 고든 화이트헤드라는 학생의 펀치를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그 사건 때문이었는지 그는 맹장괴저와 복막염으로 펀치를 맞은지 이틀 후인 1031일에 사망했다그의 나이 52세였다. (위키피디아)

해리 후디니는 종종 escape artist라고 불렸는데&리는 여기에서 scapegoat, 즉 희생양(원어를 직역하면 희생염소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관례적으로 양이라 부르기 때문에 scapegoat는 희생양으로 번역했다)의 개념을 가져왔다일반적으로 희생양이라고 하면 순결한 양/염소을 생각하지만, 여기에서 방&리가 참조하는 양은 때묻은 양/염소의 개념이다성경에 의하면 레위기 16:7-10에는 두 마리의 양/염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하나님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하나님을 위하여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하나님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 지니라” 아사셀을 위해 뽑은 염소는 광야로 내몰려져 하이에나와 같은 들짐승에게 희생된다.

&리는 이 희생양광야로 내몰리는 때묻은 양/염소를 자신들(예술가)의 메타포로도 사용한다고 말한다.

2) 제로섬’은 1971년 Lester C Thurow의 <제로섬 사회 The Zero-Sum Society>가 발간되면서 유명해진 용어로 게임이론이나 경제학 분야에서 주로 쓰인다. 제로섬은 승자의 득점과 패자의 실점을 합치면 반드시 ‘0’이 된다는 논리로, 이와 반대되는 경우를 ‘넌 제로-섬 Non Zero-Sum’이라 한다. ‘넌제로섬’ 경우 합계가 0이 아닌 경우들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참가자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윈윈’의 가능성도 있다. 물론 반대로 모두에게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도 가능하다. 방&리는 이 전시에서 우정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윈윈’의 가능하에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그러한 ‘넌제로섬의 사회’가 언제나 낭만적인 장밋빛만은 아닐 것이고, 쉽게 도래하지도 않을 것임에 대해서도 암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3) “Google Translate API v1 is no longer available as of December 1, 2011 and has been replaced by Google Translate API v2. Google Translate API v1 was officially deprecated on May 26, 2011. The decision to deprecate the API and replace it with the paid service was made due to the substantial economic burden caused by extensive abuse.”
(excerpt from Translate API FAQ, https://developers.google.com/translate/v2/faq, Last updated April 20, 2012.)
4) ‘방안의 코끼리’라는 표현이 있다. 방 안에 코끼리가 있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코끼리를 방안에서 빼내야 하기는 하는데, 덩치도 크고 힘도 쎈 이 녀석을 빼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른 척 하고 넘어가자니 찜찜하고, 해결하려고 하면 뭔가 일이 더 복잡해질 것 같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문제지만, 선뜻 나서기는 곤란하여 모르는 척 하는 민감한 사안을 ‘방안의 코끼리’라고 말한다.
5) 소설에서 동물들이 인간의 언어를 배울 때, 영어의 “friend”를 i 와 e 의 자리를 바꿔 쓰고7 계명 중 어떤 S 하나를 거꾸로 뒤집어쓰면서 철자 오류를 범하는 에피소드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6)“역사의 기관차, 혁명에는 바퀴가 달려있다. 바퀴는 정교한 장치로 맞물려 있고 무수한 톱니(gear)들과서로 엮여 있다. 발전기(generator)와 전동기(motor)는 속도를 내면서 바퀴를 굴린다. 어느 순간 계속 회전하며 전진하는 힘은 우리를 앞으로 가게 하지만 노선이 변경되기 전까지 이 속도와 굴레 안에서 정지하지 못한다. ‘프로덕션’이라는 프레임에서 이 기관차는 그런 운명을 맞이하도록 설계되었다. 우리도 역시 프로덕션이라는 산물의 일부여서 스스로 나사(screw)를 조이며 예술가 되기(becoming-artist)를 연습(practice)하는 중이다. 누군가는 예술가 만들기(making-artist)를 하는 곳에서 우리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건, 변화를 꿈꾸고 있다.” (<깊은 한숨, TV에 나오지 않는, 바퀴 달린 혁명> 작가노트에서 인용)


[브릴리언트 크리틱]에 게재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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