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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이터 수첩 Nov 13. 2018

[허산]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진짜와 가짜의 ....

허산_일상의 특이점들_가나아트 한남

너무 일찍 도착했다. 문이 열리지는 않았지만, 한 눈에 전시장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전시장 가운데 기둥이 있고, 맞은편 벽에는 청 테이프가 붙어있다. 어? 어떻게 청 테이프가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지? 그리고 보니 왼편에는 검은 색 마스크가, 오른편 벽면에는 하얀 봉지에 묘목처럼 작은 나무 같은 녀석이 담겨져 걸려 있다. 저쪽 좌대위에는 컬러풀한 종이컵 세 개가 포개져서 쌓여 있다. 공간의 특성상 들어가지 않아도 다 볼 수 있었지만, 왠지 가까이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일상의 특이점들> 전시장에서, 2018)     


가나 아트 한남에서 열린 허산의 개인전 <일상의 특이점들>는 작가 개인에게 있어 이행적 전시-기둥 시리즈에서 다음 작품으로의 이행-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런던 유학시절부터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던 ‘기둥 시리즈’는 작가 허산을 사람들에게 인지시키는 아주 중요한 작품이면서도 동시에 그 시각적인 임펙트가 너무 강하여 그로부터의 탈피가 쉽지 않은 과제였다. 작가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이행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실제 기둥 같은 ‘가짜’의 기둥을 만들어 전시 공간에 ‘접합’시킨 후에 다시 그 한 귀퉁이를 부수고 그 안에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듯 오브제들을 숨겨놓았다. 이처럼 이미 관객에게 익숙한 기둥시리즈와 함께 브론즈로 제작한 일상의 오브제들을 배치해 놓았다. 공간읽기에 능한 작가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설치된 기둥과 오브제 사이에서 관객은 잠시 멈칫한다. 어디까지가 진짜 공간이고, 어디부터가 작가의 계획인 것인지 구분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언뜻 전혀 달라진 작품처럼 보이지만 <일상의 특이점들>에 전시된 작품들 여전히 진짜와 가짜. 실재와 허구. 일상과 예술의 경계의 지점에 서 있다. 물리학 용어에서 가져온 ‘특이점’은 일종의 변곡점으로 상태가 기하급수적으로 변화하는 지점을 뜻한다고 한다. 아마도 작가는 전시장 가운데 있는 (가짜) 부서진 기둥과 부서진 기둥의 잔해물인 듯 추정되는 부서진 자재들을 시작으로 마스킹 테이브, 마스크, 못, 비닐봉투와 나무, 청 테이프로 대충 벽에 붙여 놓은 듯한 정체모를 오브제들을 통해서 관객이 일상에 잠시 쉼표를 취하기를 바랬던 것 같다.      

물론 일상과 예술의 경계 허물기라는 그의 목표는 갤러리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견고한 의미로 인해 도달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전시장에 들어온 관객은 이미 공간 안에 있는 오브제들이 작품임을 인지한다. 그리고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비닐봉지 않아 담겨진 브론즈 식물은 한눈에 진짜가 아님이 들통난다. 너무나 진짜 같지만 어색하게 걸려 있는 마스크, 떨어져야 마땅한데 떨어지지 않고 벽에 꼭 붙어 있는 마스킹 테이프. 구겨져서 주저앉아야 하지만 여전히 간격을 잘 유지한 채 좌대위에 포개진 종이컵. 세심하게 살펴보면, 이 모든 것들은 이미 스스로 (갤러리 공간 안에서) ‘예술 작품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색어색한’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지점. 그 지점이 바로 허산이 말한 상태가 변이되는 변곡점인 ‘특이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특이점을 위해 교묘하게 덧붙여진 공간 때문에, 관객은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실제로 작품인가를 알 수 없다. 늘 그렇듯, 허산의 공간은 한 번에 읽히지 않는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가 만든 이미지의 공간인 듯도 보이고, 이미지의 공간 안에서 또 다른 진짜와 가짜들이 엮여 있다. 가깝게 다가갔다가 뒤로 물러났다가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조금은 방황하면서 조금씩 공간을 읽어갈 수 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크리스 버든은 조각의 매력은 회화와 달리 관객이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점,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객의 움직임을 유발하는 점이라고 했는데, 버든의 조각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 이어가자면, 허산은 개별 조각 작품들을 잘 조합, 배치하여 조각을 만드는 동시에 공간을 조각하고 있는 모른다. 그래서 매 전시가 장소 특정적이고, 공간에 조응한다. 때문에 그의 전시는 어쩌면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닌 몸으로 반응해야 하는 전시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관객이 조각 안(전시공간)에 있으면서 조각 작품들을 밖에서 바라보는 일종의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밖에 이어지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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