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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이터 수첩 Apr 09. 2020

[김민정] 일상에 닿아 있는 궁금증에서 시작되는 특별한

2019_생생화화

일상에 닿아 있는 궁금증에서 시작되는 김민정의 특별한 영상시들


저 멀리 산등성이가 보이고, 바다이듯 호수인 듯.

전반적으로 푸른빛이 도는 화면에 오래된 필름에서나 볼 것 같은 노이즈가 없었다면

스틸이미지라 생각할 뻔 했을 만큼 정적이다.

그런데 저기 왼쪽 구석. 검은 점 하나가 꼬물꼬물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나인 줄 알았던 점이 둘로 벌어지면서,

그것은 점이 아니라 걷고 있는 두 명의 사람이었음이 분명해졌다.

아이인 듯 여자인 듯 성인인 듯 남자인 듯 보이는 두 인물간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앞서 걸어가는 성인 남자인 듯한 인물이 화면의 왼쪽 끝에 닿았을 때

영상은 끝이 나고 (100ft) 라는 제목이 올라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화면에는 작가를 비롯하여 배우와 제작진의 이름도 소개된다.

그 이름 옆에 각자의 발사이즈가 피트단위로 표기되어 있다.

말 한마디 없는 3분가량의 영상을 보는 내내, 시 한편을 읽은 기분이었다.


김민정의 영상작품들을 보면서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이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기대했다면 여지없 실망했을 것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계속 눈의 떼지 못하고 보고 있는 스스로에게 의아했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만약에 그래서 이 작품의 의미가 뭐냐고, 메시지가 뭐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뤄두자.

작품 <(100ft)> 는 더도 덜도 없이 거리륻 재는 단위인 피트(feet)에 대한 이야기다. 피트는 풋(foot), 즉 발에서 유래했다, 원래 성인 남자의 발 사이즈를 기준으로 했다지만, 나중에 인치와 조율해서 1피트는 12인치, 대략 30.48 센티미터로 통용된다. 성인 남자의 발 사이즈에서 피트가 유래했다는 이야기로부터 구상된 이 작품에는 1피트의 발 사이즈를 가진 성인 남자 다니엘 머피, 그리고 그와 함께 걸을 0.75피트 사이즈의 발을 가진 에리카 송이 등장한다. 이 둘이 같은 곳에서 동시에 출발해서 자기 발사이즈를 따라 걸어가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16미리 필름으로 촬영된 영상은 100피트 롤에서 끝나도록 설정되어 있다. 즉 다시 말해 1피트 발사이즈의 다니엘은 100피트 길이의 필름이 끝나는 지점까지 걸어가는 장면을 찍은 영상이다. 길이를 재는 피트라는 단위의 시작이 되었던 성인 남자의 발이 영화의 물리적 조건이 된 필름의 길이까지 절묘하게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그저 두 남녀가 광활한 자연을 배경으로 걸어간다고만 보았던 영상 안에는 이렇게 치밀하게 계산된 그/녀만의 기획이 있었다.


발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2015년 작업인 <푸티지 footage>다. 이 작업에서 김민정은 신체의 물리적인 길이를 영화상의 시간 측정도구로 치환시키고, 의학교과서, 예술서적, 무용서적, 패션, 역사 등등 다방면에서 수집한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들를 사용하여 영상을 만들었다. 다행인지 그/녀가 다녔던 CalArts 무용과에는 발목, 신체자세, 발에 관한 의학자료들도 많아서 틈나는 대로 도서관에 들러 마치 이미지 채집자가 된 듯 긁어모았다고 했다. <푸티지>는 마치 촉각을 다투는 운동경기의 기록을 재는 듯 보이는 시계판의 초침이 쉴 새 없이 빨리 돌아가면서 카운트가 시작된다. 8, 7.... 2. 그리고 마침내 이미지가 나타난다. 초침의 째각거림에 맞춰져 그/녀가 수집한 이미지들이 나타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뻐꾸기 시계소리가 들린다. 화면의 네 귀퉁이에서 끊임없이 변화되는 숫자와 이 같은 사운드의 재촉으로 인해, 관객은 어디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 있는 것도 해소해야 하는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 건조하고 무난한 발에 관한 이미지를 보는 마음이 부산해지고 초조해진다.


작품을 다 보고나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숫자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 <(100ft)> 에서와 마찬가지로 <푸티지> 작업 역시 발에서 시작된 길이의 단위와 시간과의 관계, 그것이 물리적인 필름의 길이와의 연관성에 관련되어 있다. 이 작품 역시 원본은 16미리 필름으로 촬영되었는데, 16미리 필름에서 1피트는 40프레임이고, 1초는 24프레임이라고 한다. 여기에 맞춰 계산해보면 100피트는 4000프레임 되고 이를 시간으로 환치하면 166.5초다. 화면 왼쪽 상단에는 1부터 23까지 프레임의 숫자가 계속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오른쪽 상단에는 40프레임(즉, 1피트)을 나타내는 숫자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왼쪽 하단에는 몇 초인지가 카운트되는데, 전체 영상은 166.7초의 길이로 166에서 영화는 끝이 난다. 끝으로 오른쪽 하단에는 피트가 카운트 된다. 0에서 40개의 프레임이 지나는 순간 1로 숫자가 바뀌게 되고, 영화길이가 100피트이기에 100이 되는 순간 영화가 끝이 나게 된다. 언뜻 발에 관한 이미지들을 연결한 것 같은 파운드 푸티지 영상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이처럼 치밀하게 계산되고 계획이 담겨 있다.


사실, 작가에게 영상에 작동되는 숫자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작업을 해 본적이 없어서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글을 쓰는 중간에 작가는 아예 작품 이미지와 함께 화살표와 그림으로 설명된 해제이미지를 보내왔다. 몇 차례 작품을 되돌려 보고, 친정한 설명문을 읽어보니 조금 선명해졌다. 그렇게 어렵게 이해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숫자의 의미를 꼭 알아야 했을까? 숫자의 의미를 몰랐을 때에도 작품은 흥미로웠다. 그/녀가 모은 다양하고 방대한 이미지를 보는 것도 즐거웠으며, 초침소리와 뻐꾸기 소리, 그리고 계속해서 카운트 되는 숫자들에 의한 쫄림(?)도 좋았다. <(100ft)>가 하나의 서정시를 보는 느낌이었다면, <푸티지>, <푸티지, 카운트 푸티지>는 하나의 구체시를 보는 기분이었다.


<푸티지>와 <(100ft)>가 발에 대한 이미지를 너무 강하게 강조했기 때문인지, 일반적으로 김민정의 작품은 ‘16미리 필름의 물질성을 연구하면서 거리와 길이, 시간 단위 등의 표준 측량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옮겨왔고, 점차 매체와 상영환경이 갖는 관계, 빛과 갖는 관계에 대한 방향으로 진행 중에 있다’라고 소개된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을 보면 볼수록, 이러한 설명이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능력을 영화라는 장르와 필름이라는 물성, 표준 단위 등에 한정지우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오히려 그/녀가 가지는 엉뚱한 시선과 호기심이 단순하지만 치밀한 전략과 프로세스를 바탕으로의 진행이 김민정의 작품들을 더욱 특별하게 하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사실, 피트라는 단어가 발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상식적인 이야기다. 이런 주제로 기승전결도 드라마틱한 갈등구조, 내러티브도 없는 영상작업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그/녀만의 능력이다. 게다가 ‘발’에서 ‘피트’로 다시 ‘푸티지’로 자칫 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고, 단선적인 흐름이 식상할 수도 있는 직접적인 단어와 이미지와의 직접적인 연결이지만, 말장난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리서치의 집요함 때문이고, 작가가 나름대로 펼쳐내는 규칙들 때문이며,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일상에서 시작된 엉뚱한 호기심과 시선 때문일 수 있겠다. 확실히 김민정의 작품들의 출발은 늘 현실에 있고, 쉽고, 가깝다.


초기작인 <커피 타임>에서도 역시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난다. 두 개의 하얀색의 커피 잔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고, 그 안에 실로 연결된 하얀 작은 인형이 앉아있다. 누군가 와서 커피를 따르자 인형은 점점 커피색으로 물들어가고, 두 여자의 수다가 시작된다. 한국어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각각의 커피 잔 안에 영문자막으로 표현된다. 오늘 10시까지 수업하는 날 아니냐는 질문에 청강인데 오늘 그냥 일찍 왔다며 뚝, 끝나버리는 대화. 그리고 텍스트로 처리되는 대화의 전모. 이 이야기는 작가가 외국에 유학 간 첫 해에 엄마와 나누었던 스카이프 통화를 녹음하여 재편집한 것이라고, 대화에 나오는 커피살 돈이 없다는 그 불쌍한 남자는 자신의 아빠라고 덤덤하게 텍스트로 마무리 한다. 시종일관 커피 잔에 자막으로 표현되는 대화, 점점 커피색으로 물드는 인형. 흥미롭게도 김민정은 커피타임이라는 정직한(?) 제목을 통해 감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엄마와의 일상적인 대화를 시각적, 후각적, 청각적으로 풀어내었다. 영상을 보는 내내 소소한 일상의 티타임에 초대된 느낌이 드는 것은, 그 어디에도 작가가 무리한 편집이나 과한 메시지를 담으려고 애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커피타임>은 일종의 산문시 같았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작업들은 대부분 그/녀가 유학시절에 작업한 작업들이었다. 언어적인 관심은 아마도 그/녀가 이방인으로써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관심이었을 것이고, 일상에 닿아있는 것 역시 주어진 상황 안에서의 가능한 범위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온 후 좀 더 익숙하고 친숙한 환경에서의 작업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가 궁금했다. 뒤늦게 듣게 된 신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좀 달라진 새로운 작품을 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The Red Filter is Withdrawn”>라는 제목부터가 명쾌한 단어로 군더더기 없던 기존 작업의 제목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이 작품의 제목은 미국의 유명한 실험영화 감독인 홀리스 프램튼 Hollis Frampton이 렉쳐 퍼포먼스에서 이야기했던 어두운 곳에서 이미지를 보는 영화의 순간과 영사된 이미지 자체에 대한 의미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김민정은 눈 앞에 펼쳐지는 사회적 현상이나 사건, 풍경 등을 바라볼 때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이 작품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했다.


그/녀는 제주로 가서 일본군 자살특공대 계획으로 만들어진 진지동굴 안에서 밖을 촬영했다. 동굴 안에서 밖을 보면 동굴의 크기만큼 이미지가 보인다. 마치 카메라 홀 같은 동굴 입구에 붉은 필터를 달면 안에서 밖을 볼 때 이미지는 온통 붉게 보일 것이다. 전시장에도 유사하게 붉은 장막이 설치되고, 관객은 이를 통해서 이미지를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기존 작업들과 같이 장소에 덧붙여진 역사적인 내러티브, 아무 말을 하고 있지 않는 풍경이라 하더라도, 과거의 흔적을 지우거나 무시할 수 없는 그런 곳으로 갔다. 그 과정에서 홀리스 프램튼이 말했던 렌즈 앞에 붉은 필터를 끼우고 빨간색을 본다면, 빨간 색으로 된 영화라면 과연 볼 것은 없는 것인지. 그의 이야기를 은유로 가져와 풀어내려는 영상이 궁금해진다. 왠지 이번에는 조금은 장대해진 서사시를 보게 될 것만 같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평이하게 전개되는 김민정의 작업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궁금해하는 관객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작품이 꼭 의미나 메시지가 있어야만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작품을 통해서 전혀 보지 않았던 세상의 구석을 보고, 전혀 생각지 않았던 것을 잠시 생각하게 된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김민정의 작품을 본 후 피트라는 단어만 보면 그/녀의 작품이 떠올랐고, 작품을 보는 동안 함께 동요되었던 감정선을 느꼈다면 그러면 되는 것이 아닐까? 모든 예술이 거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김민정의 작업처럼 어떤 예술들은 일상에서 종종 간과되는 어떤 순간들을 몇 개의 단어로 포착하여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시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이미 알고 있는 단어인데 시인에게 가면 다른 색을 입는 것처럼, 보면 볼수록 김민정의 작업은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요리조리 다른 각도로 보여주면서 시를 닮아 있다.



https://vimeo.com/minjung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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