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스페이스 xx
전시장이라는 무대, 그리고 그 안을 서성이는 관객을 향한 덫
신보슬 (큐레이터)
기계소리 가득한 공장 뒷켠에 있는 지하 전시장. 퀘퀘한 느낌마저 드는 계단을 내려가니 전시장 안에 장미냄새가 진동했다. 이토록 짙은 장미향을 맡아본 적이 있던가. 어쩌면, 향기에 질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오래전, 밀폐된 공간 안에 백합을 잔뜩 놓아두고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그 소설에서 유일하게 기억나는 딱 한 장면, 꽃향기에 질식해 죽는 어떤 여자. 그때는 향기로 사람을 죽인다니, 너무 허무맹랑한 설정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뜬금없게도 장미를 보고 그 장면이 생각났다. 슬펐다. 아마도, 뒤편에 있는 서슬 퍼런 단두대의 칼날이 곧 사그러질 화려함의 죽음을 말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래밭이 검어지고, 하얘지고, 파래지고 붉어졌다-무대 위의 쌍둥이 1막> (이하 <1막>) 을 보고)
일 년 전.
온갖 명품들이 화려함을 뽐내는 청담동 어느 골목 지하에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무대 위의 쌍둥이- 서막>,이하 <서막>) 명품 숍과 경쟁이라도 하듯, 전시장은 눈 둘 곳을 찾기가 어려울 만큼 빤짝빤작 했고, 환했고, 눈부셨고, 그 안에 놓여 있던 작품들 역시 빤짝빤짝했고, 매끈했다. 그런데 슬/펐/다.
반짝여도, 예뻐도, 화려하고, 향기로워도
김시하가 만들어 내는 ‘무대 위의 쌍둥이’의 이야기는 슬/프/다
아니, 슬픔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다.
무력함? 덧없음?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
관객은 김시하가 던져놓은 덫에서 쉽게 빠져나가지 못한다.
덫이다.
김시하의 전시는 관객을 향해 던지는 덫이다. 언뜻, 익국하고 예쁘다. 빤짝이는 조명도, 화려한 꽃도, 심지어 철창까지. 그러나 정작 오브제 각각의 의미를 알기 쉽지 않다. 정작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에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 자꾸 미끄러져 간다. 익숙하고 화려함에 매료되어 성큼 다가가지만, 쉽게 발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렇게 관객은 덫에 걸려든다.
덫의 저편에 꽃이 있었다.
꽃(혹은 식물)은 김시하의 작업에 자주 등장한다. 자신이 기획했던 <미아리 텍사스> 전시에도 커다란 죽은 나뭇가지가 버려진 기지촌의 허름한 전시장에 놓였었고, 여배우의 분장실을 연상케할 만큼 화사했던 <서막>에도 커다란 장미다발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장미가 작업실에서 말라가고 있을 때, <1막>의 장미는 단두대 앞에서 화려한 붉은 빛과 향기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단두대 앞의 장미도 서서히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 어떤 오브제보다 강하게 전시장을 가득 메웠던 ‘살아있음’의 향기는 서서히 (작가의 말에 의하면) 피비린내로 변하였다. 그렇게 삶의 향기로 시작되었던 전시는 죽음을 위한 레퀴엠으로 끝이 났다. 사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그 화려했던 장미의 붉은 빛이 퇴색되면서, 모든 것이 변하였다. 어쩌면, 전시장을 가득 메웠던 장미 향기에서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고 있었는지도. 그래서 슬펐는지도.
쌍둥이
작가는 쌍둥이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라 했다. 여자로, 엄마로, 아내로 그리고 작업을 하는 작가로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양가적 감정들의 현현(顯顯)이 그/녀의 쌍둥이라 했다. <서막>에서 김시하는 반짝이는 조명과 대칭적인 구도를 통해서 쌍둥이라는 개념을 꽤나 직설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의 시작이었을 뿐, 정작 그/녀의 쌍둥이는 상당히 추상적이고 은유적이다. 쌍둥이는 ‘닮았음’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닮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딪히고, 상충되고, 계속해서 서로에게서 이탈되고 벗어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마치 아내와 엄마로서의 삶을 살아야하는 자신과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이기심이나 소외 같은. 그래서 누군가는 김시하의 쌍둥이 이야기는 철저하게 사적인 감정과 경험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녀의 작업을 다소 온건한 페미니즘의 류로 묶어버리던가 혹은 여자들만의 이야기로 치부하려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비록 작업이 ‘여성작가’가 겪는 사적인 경험에서 출발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가 만들어낸 ‘쌍동이’의 무대는 여성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봤을 이야기일 수 있고, 사회적 약자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김시하가 만들어낸 그 사적인 무대위에서 관객은 선뜻 쌍둥이의 역할을 자처하거나, 쌍둥이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무대 위, 새장 혹은 철창이라는 굴레
김시하의 무대에는 새장을 닮은 오브제가 종종 등장한다. 예를 들어, <서막>에서 황금색으로 칠한 작고 화려한 새장은 전시장을 가득 메운 단두대가 설치된 철창이 되었다(<1막). 새장으로서의 철창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키워드들을 보여주는 느낌이었다면, 전시장을 가로지르는 철창은 관객을 아우르는 본격적인 무대가 된다. 철창 밖에 서면, 철창 안으로 들어가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감옥에 갇힌 듯 보이지만, 반대로 철창 안에서 보면, 철창 밖에 있는 사람들이 철창에 갇힌 듯 보인다. 누구도 갇혀있지 않고, 누구나 갇혀 있는 상황이다. 마치 의식하지 않으면 시스템(사회구조)의 벽을 느끼지 못하듯, 철창을 의식하지 않는 이에게 철창은 존재하지 않는 듯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번 세상의 벽에 부딪혀본 사람이라면, 사회구조의 부조리함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비록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시스템(철창)은 강력하게 존재한다. 작가로서의 삶을 꿈꾸던 작가지망생 여학생이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면서 작가로서의 삶을 박탈당할까봐 두려워 했던 그 마음이 마주했을 법한 철창, 누군가에게는 안전한 울타리이지만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대한 굴레. 철창은
다시, 무대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