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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이터 수첩 Apr 14. 2020

[안준] 찰칵! 셔터로 얼어버리는 시공간, 어디에도..

2018. 안준 단행본, 더 레퍼런스

찰칵셔터로 얼어버리는 시공간어디에도 없는 그 곳     


신보슬 (큐레이터)     


찰칵! 셔터를 누르는 순간 렌즈의 눈이 깜박이고, 외부 시공간은 얼어붙는다. 그렇게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장면이 탄생한다. 기계의 눈과 사람의 눈 사이에서.      


사과다, 사과! 저 뒤로 파란 바다와 파란 하늘이 닿아 수평선을 만들고, 전경에는 숲이 있다. 숲과 바다와 하늘, 세 개의 레이어를 배경으로 마치 보이지 않는 프레임에 걸려 있는 대관람차의 캐빈(Cabin)처럼 사과들이 멈춰 서 있다. 이처럼 그/녀의 카메라 셔터가 눌러지면 흐르던 시간이 잠시 얼어버리고,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장면이 나타난다. (<One Life #029>, 2017)     


사과를 찍은 초기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그래비티 02>(2013)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시공간의 얼어 붙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시간은 일정하게 흘러간다지만, 살다 보면 어떤 시간은 아주 느리게 슬로우 모션으로 다가오는가 하면 어떤 시간은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그리고 어떤 때는 정지. 나만 두고 시간이 포즈(pause) 할 때가 있다. 아주 비현실적이게도. 


그/녀의 <셀프 포트레이트>(2009)를 보았을 때도 그랬다. 사진 속에는 몸의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타이트한 짧은 코발트 블루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가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려고 한다, 이미 한쪽 발은 떼었다. 곧 공중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왠지 땅 아래로 곤두박질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허공에 있을 것 같다. 보고 있는 내 발끝이 저릿하고 심장이 간질거린다. 떨어져 죽는다면 무서워야 할 텐데 오히려 경쾌하고 가볍다. 인간이 육체를 벗어나면 그런 느낌일가. 그냥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 온, 아니면 이 세상이 아닌 곳을 가는 어떤 지점 혹은 엘리스가 회중시계를 찬 토끼를 따라 동굴로 들어가는 찰라. (<Self-portrait>, 2009)     


이처럼 안준의 사진은 여기도 저기도 아닌 곳에 머문다. 물론 그/녀도 여느 작가들처럼 대상을 향해 포커스를 맞춘다. 하지만, 결과물로의 사진에는 여기도 저기도 아닌 여기와 저기의 사이, 어디에도 없는 그곳이 찍혀있다.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 그래서 심지어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그 지점. 안준은 그렇게 보이는 곳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One Life> 시리즈에서도 그랬다. 허공에 뜬 사과를 찍었다고는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과를 찍은 것이 아니다. 던져진 사과로 인해서 일상의 공간이 바뀌는 그 지점, 익숙하면서도 낯선, 무중력의 공간 같은 그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오래 전 마그리트는 그림으로 이런 공간들을 그렸었다. 안준의 사진에서 마그리트의 그림이 연상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안준의 사진이 마그리트 그림의 사진적 ‘구현’으로 본다면 그/녀의 사진이 가지고 있는 많은 의미의 층위들을 놓치게 될 것이다. 회화와는 달리 사진은 대상-작가-카메라의 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때문에 카메라와 렌즈의 개입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때로는 그 개입이 만들어 내는 우연이 작품에 주요하게 작용한다. 그렇다고 카메라 뒤에 있는 작가의 ‘눈’, 작가의 ‘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놀랍게도 기계의 눈이 담는 대상에는 언제나 작가의 ‘마음’이 베어나기 때문이다. 


작가의 마음, <Self-Portrait>에서 <Gravity> 그리고 <One Life>로 이어지는 그/녀의 사진들은 카메라 뒤에 있는 작가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것이 사진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잘 보여준다. 얼핏 화보처럼 트랜디하게 보이는 <Self-Portrait>이지만 어딘지 모르는 불안함이 감지된다. 아마도 20대 초반, 여자 작가로의 삶에서 오는 불안이지 않았을까. 이러한 특징은 사과를 허공에 던지고 찍은 사진들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초기 이 작업에는 <Gravity>라는  제목이 붙었었다. 그래서인지 중력에서 반하듯 공간에 정리된 사과와 일상의 공간이 함께 하면서 보이는 긴장감이 더욱 도드라진다. 다시 말해 당시 사진에는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현상’이 눈에 띤다. 하지만 그 무렵, 안준은 결혼을 하여 새롭게 가정을 꾸렸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등 이런저런 개인사를 겪는다. 그리고 그런 변화들은 자연스럽게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던 것 같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사진을 허공에 던지고 찍는 사진이지만, <One Life> 제목의 사진들이 훨씬 서정적이다. 


<Gravity>와 <One Life>는 작가의 가족들이 허공에 사과를 던지고 그/녀가 사진으로 찍은 일종의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혹자는 누가 사과를 던졌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시스트나 아르바이트생과 작업을 했어도 동일한 결과가 나왔을까? 비슷한 사진은 나왔을지 몰라도 아마 사진이 가지는 감성 온도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비록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프레임 밖에서 웃고 즐기면서 함께 작업하는 작가와 가족의 느낌이 고스란히 사진에 남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진은 종종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담기도 한다.     

안준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이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은 무엇일까 싶었다. 사진 한 장이 어떻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는 사람이 있는 공간을 줌-아웃, 줌-인하여 들어가는지 신기했다. 사진이 보여주는 대상은 분명한 데, 관람자가 사진 속 공간의 그 어느 사이에 있게 되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사과를 던지는 사람들의 공간, 던져진 사과의 공간, 그리고 배경의 공간이 하나의 사진으로 보이지만 각 공간마다의 ‘틈’을 잘 살려낸다. 그래서 풍경사진 혹은 정물사진인 듯 보이는 사이에서 관람자의 초상사진을 만난 것 같은 적잖은 당혹감마저 생긴다. 매우 건조하게 보이지만 한편으로 알 수 없는 말랑한 서정성도 바로 어디에도 없는 그 사이의 공간에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안준의 사진은 레이어가 많아서 한마디로 말하기 쉽지 않다. 사진을 찍는 방법도 독특하고, 사진으로 담아내려는 생각도 남다르다. 하필 수많은 상징을 내포한 ‘사과’이기에 아마도 사과에 대한 것만으로도 글 하나는 충분이 나올 것이다. 그래서 작품에 대한 글은 이렇듯 늘 불충분하다. 네 번째 다시 쓰기를 한 이 글에서도 여전히 놓치는 것이 많다. 그/녀의 사진이 담고 있는 어디도 아닌 그 곳에서 나는 아마 다섯 번째 글을 쓰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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