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올해의 작가
신보슬(큐레이터)
백승우는 사진작가다. 하지만, 그가 찍어내는 사진은 어딘가 다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백승우의 사진은 ‘찍은’사진이라기보다 ‘그려내는’ 혹은 ‘만들어 내는’ 사진에 가깝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고, 컴퓨터 보정이나 합성이 더 이상 생소하지 않은 지금, 사진을 만들어낸다 한들 크게 문제될 것은 없겠지만, 그의 사진이 그저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는 ‘합성’에 그쳤다면, 굳이 애써 그의 사진에 대해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사진이 다른 사진들과는 꽤 많이 다르다는 것인데, 지금부터 그 다른 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의 사진이 어디가 다른 것인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진부하지만 사진의 사전적인 의미부터 짚어보기로 하자. 1839년 존 F.W 허셀 경이 처음 사용했다는 사진(Photograph)라는 단어는 ‘물체에 반사된 빛과 같은 전자기적 발광을 감광성 기록재료 위에 기록하여 얻은 빛 그림, 즉 광화상을 의미’한다. 사진의 어원이 빛을 의미하는 그리스 어 'φώς'(phos)와 펜 또는 붓을 뜻하는 'γραφίς'(graphis), 또는 그림을 뜻하는 'γραφή'(graphê)의 합성어라는 점을 볼 때, 사진의 출발은 확실히 ‘빛의 그림’이었다. 때문에 근본적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빛과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담아내는 카메라와 같은 장치/기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이러한 사진의 근본적은 부분들이 심하게 흔들렸다. 대상이 없어도 사진은 생산되고, 카메라가 없이도 사진이 만들어지고 유통된다. 사진이 조작되고, 변형되며, 범람하는 이 시대에 사진은 과연 무엇인가. 백승우의 작업은 이러한 의심에서 시작한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디지털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오리지널한 사진’을 찍는 행위가 마치 ‘물속에서 물총을 쏘는 것과 같이 무의미하게 느껴진” 시점에서, 사진작가로서 아니 아티스트로서 그에게 남아 있는 가능성은 무엇일까. 그것도 사진을 전공했고 제대로 찍는 사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작가에게 말이다.
백승우가 찾고 있는 대상을 찍어내는 것이 아닌 사진의 가능성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그 본격적인 출발이 된 <Blow up> 시리즈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2000년 백승우는 북한에 갈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기존의 북한 사진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사진을 찍겠다는 야무진 각오로 많은 필름을 준비했다. 하지만, 실상 북한에서 그가 다르게 찍을 수 있는 사진은 별로 없었다. 사진가와 동행하는 북한 가이드가 찍을 수 있는 것과 찍으면 안 되는 것들을 지시할 뿐 아니라, 찍은 사진들도 인화하여 검사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모두가 비슷한 아니 똑같은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북한에서의 사진 찍기는 더 이상 흥미로운 작업이 아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당시에 찍은 사진의 사진들을 박스에 넣어두었고, 사진들은 잊혀졌다. 4~5년쯤 지나서 우연히 프랑스에서 북한을 찍은 다큐멘터리 사진전시에 갔다가 낯익은 사진 한 장을 보았다. 꽃을 들고 있는 북한 소녀. 백승우는 그 소녀가 북한에서 만났던 소녀를 닮았다는 생각에 북한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다시 꺼내었다. 그리고 그 사진들을 확대했다. 그 과정에서 당시에는 보지 못했던 부분들, 감시원도 통제하지 못했던 순간과 장면의 기록들이 드러났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했다. 확대과정에서 사진들은 기이하게 잘리기도 하고, 초점이 나간 듯 뿌옇게 흐려지기기도 했다. 이런 사진들은‘잘 찍은’ 사진을 기대했던 관객을 종종 당황하게 한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인지 작가의 이야기는 무엇인지 쉽사리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목과 연결시켜 생각해본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블로우 업’이라는 제목은 이미 사진을 확대하는 행위 자체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좀 더 방점을 찍고 있는 지점은 블로우 업의 또 다른 의미, 즉 ‘폭발’에 관한 부분이다. 어떤 것이 폭발되었을 때, 그 전과 후의 물리적인 양태와 상황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일종의 파괴이자 동시에 생성이다. 마치 사진의 한 부분이 확대되고 잘리면서 원래의 인덱스를 잃어버리지만,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과 유사하다. 기존의 다큐멘터리 사진들이 북한에 대한 정보를 주는 혹은 작가의 의도가 분명한 사진들이었다면, <Blow up>의 사진들은 북한에 대한 그 어떤 제대로 된 정보도 주지 않는다. 대신 기존의 맥락에서 튕겨져 나와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사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기록, 지시적 의미들은 이러한 ‘폭발’과정에서 사라지만, 이미지 자체가 독자성을 가지게 된다. 이는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꽤 도전적인 질문이자 시도이고, 사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의심이다. 때문에, 단지 <Blow up>이 북한에서 찍은 사진들이라는 이유로 북한을 주제로 하거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주제의 전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듯하다. 이 시리즈에서 ‘북한’이 강조되었을 때, 작가가 의도한 여러 가지 본질적인 질문들을 무력하게 할 뿐 아니라, 종종 그의 사진을 오독할 여지를 남긴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Blow up>에서 중요한 것은 북한에서 찍은 북한 사진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대하는 기존의 태도, 혹은 사진의 본질에 관해 질문이기 때문이다.
사진에 만드는 혹은 사진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유사한 하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의 질문은 북한과 관련된 다른 시리즈는 <Utopia>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어느 날 백승우는 일본인 작가와 함께 일본에 있는 북한관련 상품들을 파는 레인보우통상이라는 가게에 들렀다.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와 배용준의 브로마이드, 류시원의 사진이 함께 걸려 있는 곳, 북한의 군가에서부터 조용필의 앨범이 있는 그 가게에서 이데올로기나 국가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모든 이미지들은 그저 소비되는 상품이었을 뿐. 백승우는 그 이상한 가게에서 북한 정부가 찍은 건물사진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북한 건물들을 찍은 사진들과 남한 건물을 찍은 사진들을 뒤섞어 ‘어디에도 없는’ 건물들을 ‘구축’했다. 의도적으로 독일 바우하우스의 미니멀리즘적인 건축이나 포포바의 드로잉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특징들을 차용했다. 여기에서 실재하지 않지만, 실재할 것만 같은 느낌은 ‘사진’이라는 매체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실재에 대한 흔적이 만들어낸 우리들의 고정관념일 뿐이라고 작가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허구의 건물들에 ‘유토피아’라는 제목을 붙였다. ‘유토피아’가 낙원을 의미한다면, 남한과 북한의 건물들이 만났다고 낙원은 아닐 테지만, 유토피아의 어원이 ‘없다’라는 의미의 ‘ou’와 장소를 의미하는 ‘topos’가 만나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 허구의 건물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그렇게 단순하지 만은 않은 것 같다.
<Utopia> 시리즈 중 <Utopia-#032>(2011)는 그가 사진이라는 매체에 가지고 있는 의구심,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 변화된 사진제작의 지형에 대한 의구심을 잘 보여준다. 백승우는 유토피아 시리즈의 사진 하나를 13개로 분할한 다음 13개 국가에 보내어 인화를 요청했다. 동일한 수치의 사진데이터를 보내고, 공통된 인화지를 지정해주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변경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예상했듯) 조금씩 다른 색감과 톤의 사진들이 돌아왔다. 이 작업은 종종 거대한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차이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디지털테크놀로지에 의해 빚어지는 그릇된 인식, 그리고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작업들은 완벽하게 동일할 수 있다는 오해와 환상에 관한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실제로 그에게 되돌아온 서로 다른 화질의 사진들처럼, 사진을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은 어디에서도 동일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라는 점을 13개의 조각난 작품은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완성된 결과물은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Re-Establishing Shot> 도 작가의 태도적인 면에서 유사하다. 사방으로 뻗어 있는 도로, 빼곡한 건물들은 어딘가 있음직한 도시의 사진이다. 하지만, 이 사진은 전 세계 수많은 도시들의 편린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어디에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도시의 모습인 것이다. 도시에 대한 많은 사진들 중에서 유독 이 시리즈에 눈이 가는 이유는 그 도시의 구조적인 면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도 언급하듯이 도시라는 것은 역사적이거나 사회적 배경과는 상관없이 거의 모든 곳에서 유사하게 작동한다. 그래서 <Re-Establishing Shot>는 컴퓨터 합성으로 만들어진 없는 도시의 사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도시’라는 현대사회를 지탱하는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초상사진처럼 다가온다. 사진 속 도로와 빌딩들 하나하나에 대응하는 대상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수십 개의 조각난 편린들은 이미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세상을 구성하였고, 그것이 대상을 지칭하던 말든 이미 새로운 가상의 이미지 세상 안에서 새로운 의미구조를 만들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Blow up>이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으로 작업했고, <Utopia>가 우연히 발견한 사진이지만 적어도 출처가 상대적으로 분명한 사진들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 <Memento>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혹은 출처가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아카이브 바탕으로 작업을 전개한다. 물론 여기에서도 작가는 일관되게도 사진이라는 매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본질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과감하게 왜곡시키는 장치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되묻는다. 이 작업에서 백승우는 사진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떨어져, 마치 사진의 의미가 어떻게 만들어지며, 기억이라는 것과 기록이라는 것이 어떻게 사진에 작동하고, 어떻게 관객에게 이미지와 의미가 소비되는지를 살펴보려는 관찰자처럼 상황만을 만들어 놓고 슬쩍 사라진다.
2011년 작가는 미국의 한 벼룩시장에서 5만 여장의 슬라이드 필름 사진을 구입했다. 한 때는 누군가의 추억이고 기억이었을 이 사진들을 중 2700여장의 사진을 추려내었다. 그리고 8명의 지인들을 초대했고, 그들에게 각각 8장의 사진을 고르게 했다. 참가자들은 자신이 고른 사진들을 각자 정한 순서대로 배치하고, 나름대로 사진에 스토리를 담아 제목을 지었다. 2015년에는 2011년에 선택된 사진 60여장을 의사, 변호사, 미술평론가, 큐레이터, 배우, 공학자 등 각기 다른 직종의 8명에게 보내고, 다시 8점을 골라 첫 번째와 동일한 방식으로 선택한 사진에 따라 각자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도록 요청하여 선택된 사진과 내러티브가 전시되었다. <Memento>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작업은 일차적으로 ‘기억’에 닿아있다. 사진은 종종 기억의 보조 장치로 간주된다. 그러나 비록 사진이 찍혔던 순간은 생생하게 이미지로 포착할 수 있다하더라도, 당시의 감정이나 느낌 상황은 시간`이 지나면서 곧잘 왜곡된다. 특히 사진을 찍힌 대상이나 찍은 주체로부터 일탈된 사진에서 ‘기억’의 의미는 처음과 같지 않다. 게다가 그 사진이 전혀 무관한 제 3자에게 전해지는 경우, 새로운 이야기와 추측, 상상이 발동한다. 여기까지가 <Memento>의 객관적인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질문이 생긴다. 작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상황을 세팅하고 바라보는 관찰자인가. 실제로 작가는 5만장의 사진을 구매했고, 참가자를 선택했다. 나머지 결과물들은 모두 참가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선택과 스토리다. 당연히 참가자들이 만들어 낸 스토리는 사진이 원래 가지고 있던 의미나 맥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사진에 다른 내러티브를 담고 있고,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거짓인지도 불분명한 상황을 보는 관객의 심정이 편치 않다면, 이 모든 세팅의 주인공인 작가는 누구보다 가장 적극적인 창작자임은 분명한 것 같다. 모름지기 사진이라는 것은 사실의 기록이고, 찍힌 대상과 뗄 수 없는 내러티브의 맥락이 있으며, 견고한 인덱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믿음을 흔들었다면, 이 작업이야말로 백승우가 그 언제보다 적극적인 작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백승우의 작업은 자신이 찍은 사진을 가지고, 혹은 기존의 아카이브를 통해서, 포토숍과 디지털 조작을 하던 간에 제3자의 개입을 통해서 각각의 시리즈의 결과물의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사진이라는 매체의 본질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사진이 더 이상 사실의 기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에, 아니 사진이미지의 사실성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시대에 애써 이런 수고스러운 작업을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작업이 아니어도 사람들은 사진 이미지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사진이미지는 언제나 조작할 수 있는 가능성에 열러 있음을 알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역할이 새로운 관점을 열어 주는 역할, 이미 알고 있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것을 의식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의 수고스러운 작업들을 좀 더 주목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Blank Medium>는 그동안 진행해온 작업의 연장에서 사진, 나아가 이미지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 그의 질문들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전시제목인‘공백매체’란 기준이 되는 데이터만 이미 기입되어 있고, 나머지 공간은 비워둔 데이터 매체를 말한다. 64기가 메모리 카드의 경우 4기가 정도는 프로그램 등을 구동할 수 있게 하는 변형불가능한 절대적 데이터가 들어있고, 실제 사용하는 용량은 60기가 정도이다. 이때 이 60기가 비어 있는 공간을 지칭하여 공백매체라고 한다. 작가도 언급했듯이 ‘사진’을 하나의 매체로 이해한다면, 사진으로 작업하는 행위는 아마 이 비어있는 공간, 아직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는 공간을 메워가는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매체의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지속적인 의심을 근간으로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진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변화된 사진 지형에 대한 실험은 공백을 메꿔가며 그만의 매체를 만드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Betweenless>, <Framing from within>, <Wholeness> 그리고 <Colorless> 이렇게 네 개의 시리즈는 공백매체로서의 사진에 관해 사실에의 기록, 아카이브, 그리고 픽쳐라는 개념들을 근간으로 한 작가의 생각들이 압축적으로 그려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Betweenless>와 <Framing from within>은 거의 유사한 과정으로 진행되지만, 상반된 결과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먼저 <Betweenless>의 경우, (<Blow up>시리즈에서처럼) 작가가 수집한 35mm 슬라이드 필름에서 인물만을 ‘확대’한 작업이다. 물론 확대된 인물들은 사진의 주인공이 아니라 작가가 설정한 어떤 규칙에 의해 선택된 인물이다. 인물이 원래의 사진에서 잘려나가는 순간, 사진 속에서 인물이 가지고 있던 맥락들은 삭제되며, 확대되는 과정에서 거칠고 흐릿한 윤곽선이나 색상만 남는다. 사진 속 인물이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는 정보나 그 어떤 인덱스도 없지만, 흥미롭게도 관람객은 마치 몽타주를 통해 범인을 유추하는 것처럼, 관람객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교육과 경험을 바탕으로 인물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만일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특징이 기록과 증명이라면, 이 시리즈는 실패한 사진이 되고, 그로인해 사진의 지위마저도 훼손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작가의 개입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의 아카이브가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말대로 기존의 아카이브를 훼손시킴으로써 자신만의 ‘픽쳐(Picture)’아카이브를 새로이 구축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Framing from within>은 (역시 <Blow up> 시리즈에서처럼) 사진을 보는 다른 방식에서 출발한다. 일반적으로 관객이 사진을 볼 때는 사진 속 주인공과 그리고 배경, 혹은 전체 구도 등을 살펴보게 된다. 하지만, 백승우는 자신이 찍은 사진 속에 의도치 않게 우연히 들어가 있는 인물들을 주목했다. 물론, 그렇게 주목된 인물들은 누군지 알 수 없고, 특정부분만 다시 ‘프레이밍’됨으로써, 원래 사진이 가지고 있던 맥락도 사라진다. 그렇게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들어간 인물을 중심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36개의 사진은 자체의 사진아카이브를 만들었다.
동일한 이미지가 서로 다른 사이즈로 반복되어 설치된 <Wholeness>에서도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한 ‘픽쳐가 된 사진’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아카이브 역시 기록이나 기억에 관련된 것이라면, 작품 속 이미지는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카이브의 기능을 상실했다. 실제로 작가는 미국의 한 퍼블릭 아카이브에서 이 사진을 가져왔다고 하지만, 일단 아카이브에서 이탈되어 작가의 작품화 되어버리면서, 사진은 아카이브 안에서 가지고 있었던 맥락은 사라지고 그저 이미지로 존재한다. 더 이상 (우리가 기대하는) 사진의 역할도, 아카이브의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처럼 이미지 그 자체가 되는 지점에서 사진은 ‘픽쳐’가 된다.
마지막 작업인 <Colorless>는 세 면이 순자척으로 회전하는 광고판 형식의 설치작품으로 각 면에는 그레이스케일차트, 반사율 18%의 중간회색, 끝으로 ‘Everything is purged (모든 것은 제거되었다)’라는 텍스트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명도에 따라 화이트에서 블랙까지 밝기의 차이를 단계별로 나눈 그레이스케일 차트와 피사체가 평균적으로 광선을 18% 반사한다는 가정에서 노출값을 구하기 위해 사용되는 중간회색은 사진이라는 것이 시각적 평균에 기반하고 있는 매체이며, 표준화가 가능한 매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마지막 ‘Everything is purged’라는 텍스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사진에서 기존의 기능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사진은 ‘픽쳐’로서 재조정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생각을 넌지시 이야기한다.
그의 사진이 ‘사진이 아닌 픽쳐’로 인식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영민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백승우 사진의 피사체들은 표면상에 묘사데 실제 피사체들이라기보다는, 이미 ‘픽쳐(picture)’가 되어버린 것들로 우리가 즉각적으로 인지하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그의 사진적 이미지들은 단순히 원래 ‘있어왔던 것’을 포착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인덱스적인 사진의 본질을 충족시키는 대신에, 이미 익숙한 픽쳐로 인식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문영민, <Out of pictures, Out of Archive>)
픽쳐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두 가지 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백승우의 사진은 기존의 사진이미지들과 다르다. 둘 째, (때문에) 백승우의 사진을 읽기(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과 다른 인식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사진이미지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인덱스와의 연계에 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기에, 인식의 방식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고자 한다. 문영민의 말을 다시 정리하자면, 픽쳐화 된 사진이란 기존의 사진과 인식의 방식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Framing from within>을 예로 들어보자. 백승우는 이 작업에서 의례 사진에 따라붙게 되는 많은 장치들을 의도적으로 파기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야 볼 수 있을 만큼 작은 사진들을 멀찌감치 높이 설치했다. 기존의 사진감상법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계속해서 사진의 출처를 사진 속 이미지를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의미를 읽으려고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언뜻 개미처럼 작게 찍힌 인물들 사이의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 것도 같고, 시리즈 속 사진들을 관통하는 이미지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관객의 추측일 뿐. 확인할 길이 없다. 게다가 의도적으로 작품과 관객과의 거리가 가능하지 않도록 이미 계산된 설치방식으로 인하여, 관객은 픽셀처럼 보이는 작은 36개의 프레임 된 사진 이미지들의 표피에서 계속해서 미끄러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관객은 사진 속에서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물론 이는 <Framing from within> 뿐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던 전작들 전반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심지어 비교적 명확한 이미지와 대형사진이라 할 수 있는 <Betweenless>, <Utopia>나 <Re-Establishing Shot>>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관객은 사진을 보지만, 사진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사진은 재구성된 이미지로만 의미가 있을 뿐, 사진에 맥락을 씌우거나 찾아내야 할 정보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때문에 관람자는 오히려 좀 더 자유롭게 사진의 표면에서 색감과 구도를 감상할 수 있다. ‘픽쳐화 된 사진’의 자율성, 독자성은 여기에서 생겨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의도를, 작품이 전하는 의미를 파악하고 싶다면, 역설적이게도 관객은 작품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한다. 그 의미는 개개의 사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작품을 제작한 방식, 태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 중에는 완벽하게 만들어진 이미지 보다는 오히려 불완전해 보이고, 독해가 불가능한 이미지들이 많다. 사진이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그 어떤 아카데믹한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그의 사진은 어렵다는 관객의 불만을 감수해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백승우의 사진이 어렵다는 불만은 기존의 사진감상법으로는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 <Blow up>에서부터 <Colorless>이르기 까지 그는 교묘하게 사진과 사진을 둘러싼 장치들 사이를 오가며 작업한다.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분명 사진 그 자체이지만, 사진을 둘러싼 장치들을 보지 못하면, 작품을 즐기기 어렵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백승우는 그 어느 작가보다도 분명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한 번도 흔들림이 없었다. ‘물속에서 물총 쏘기’의 헛헛함에 대한 삐딱한 시선. 그 많은 작업들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찍을 수 있는 ‘사진찍기’라는 것이 동시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도 아티스트라는 직업인에게. 그가 내린 결론은 결국, 사진으로 사진을 의심하는 방법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다시 사진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백승우에게 사진은 ‘찍는 것’에 보다는 ‘그리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그것은 그의 사진이 ‘픽쳐화 된’것이기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여기에서 아카이브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것은 기존에 언급되었던 것처럼, 그가 아카이브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Blow up>, <Utopia>는 물론 <Memento>와 <Wholeness>에 이르기까지 그는 무수히 많은 사진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작업을 해 왔기 때문에, 아카이브는 그의 작업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로 보일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 살펴본 작업들 중에 ‘아카이브’ 자체가 주제였던 적은 없다. 때문에, 그의 작업을 논하면서 아카이브에 방점을 찍는 것은 전체 시리즈의 그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흐리게 할 여지가 있다. 오히려 백승우에게 아카이브는 화가에게 물감과 같은 것이다. 아카이브에서 가져온 그 무수한 사진들은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물감을 고르듯, 개별사진으로 작가에 의해 선택되었을 뿐이다. 아카이브 자체가 주제라고 하기 어렵다. 때문에 (다소 반복되는 느낌을 받더라도) 그가 선택한 사진의 일부를 잘라내고, 확대하고, 리사이즈하는 과정들에 주목하고, 그렇게 ‘그려진’ 그의 사진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아카이브는 그가 ‘픽쳐화 된’ 사진을 그리기에 아주 중요한 재료이자, 그의 사진을 다양한 층위에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토대로서만 이해하는 편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에게 사진은 분명 ‘공백매체’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진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본질적인 부분에 맞춰 잘 찍은 사진이 아니라,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 부분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을 바탕으로 한 또 다른 사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흡사 공백매체의 공백을 다양한 방식으로 채워가는 과정과 닮아 있다. 그렇게 그려진 그의 사진은 그가 말했듯이 이제 사진을 찍는 것이 ‘투명한 물속에서 검은 먹물을 쏘는 것’같은 행위가 되어 관객에게 사진 보기의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고, 또 다른 인식의 유희가 가능한 토대를 제안하는 것이 될 것이다.
*본 글은 <올해의 작가 2016> 전시도록에 수록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