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 월간미술
(진주)구슬의 말, 같지만 같을 수 없는 이야기
먹먹했다.
캔버스에 내려앉은 (인조)진주들을 보는데, 그냥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빡빡했던 하루 일정에 지쳤다거나 빗방울 살포시 떨어지고, 하늘이 내려앉은 탓만은 아니었다. 전시장에서 화사한 조명을 받고 반짝였던 진주의 느낌이 아니었다. 진주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그건 아마도, 처음으로 그/녀의 작품을 읽지 않고 마음으로 보려고 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문자, 텍스트, 기호, 읽는 이미지, 기호, 노동, 미니멀리즘
그동안 고산금의 작품을 읽어 온 키워드들이다. 그래서였을까. 너무도 당연히 그/녀의 작품은 본다기 보다 읽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제목을 통해 작가가 읽었던 책들을 유추하고, 어느 장면이었는지 상상하면서, 텍스트가 사라진 자리에 자리한 진주들을 통해서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를 ‘읽어내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늘 그런 수고가 헛스러움을 깨달았을 때, 그/녀의 작품에서 발길을 돌렸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고산금의 작업을 텍스트와 별개로 설명하기 어렵다. 활자중독이라 스스로를 칭할 만큼 엄청난 양의 텍스트를 읽어낸다. 그리고 그 중 그/녀에게 여운과 생각을 남기는 부분들을 꼼꼼히 계산하여 진주나 스테인리스 구슬로 한 땀 한 땀 채워가는 수작업을 반복한다. 텍스트가 진주로 치환되고, 비어있는 캔버스가 진주로 채워지면서 이야기는 사라진다. 결과적으로 텍스트들이 만들어내었던 레이아웃만 남게 되고, 관객은 작가에게 의미 있던 그 구절이 어디였는지 도통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분명 어떤 이야기가 있었던 자리에서 관객의 시선은 반짝이는 진주와 하얀 캔버스 위에서 미끄러지고 미끄러진다. 읽어야 하는데, 보고 있고, 보아야 하는데 읽게 된다. 진주의 개수와 글자 수를 맞춰봐야 하는지, 작가가 선택한 구절이 어디였는지 짐작해야 하는지, 진주를 봐야 하는지, 빈 공간을 봐야 하는지, 아니면, 진주와 공간이 만들어내는 미니멀리즘적 구성을 봐야 하는지. 당황스러운 것은 관객의 몫이다.
그것도 잠시. 당황스러움에 슬쩍 시선을 돌릴라 치면, 불빛과 각도에 따라 미묘하게 달리 보이는 진주빛의 반사에 다시 사로잡혀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하게 된다. (작가도 이야기하듯, 그/녀의 작업은 전시장에서보다 거실이나 일반 공간에서 다양한 공기와 햇살을 만날 때 더 매력적일 때가 있다) 그렇게 텍스트-진주-이미지-그리고 다시 텍스트-이미지 사이를 넘나들며 머리와 마음의 밀고 당기기가 시작된다. 저도 모르게 작품 앞에 서 있게 되는 것은 어쩌면 어렵거나 현란한 이론적 수식어가 없어도 사람들은 이미 마음으로 그/녀의 작업을 바라보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 소설, 에세이, 노래가사, 신문기사, 법전
농담처럼 작가에게 물었다. ‘작가님은 작품 소재에 대한 걱정은 없으시겠어요?’ 작가는 그렇다고 답했다. 고산금은 끊임없이 읽어댄다. 시, 소설, 에세이는 물론이고, 신문기사나 하물며 법전까지 텍스트로 된 모든 것을 흡입하듯 읽어댄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진주로 토해낸다. 활자가 작가의 눈으로 흡입되고, 그것을 알알이 진주구슬이 되어 입으로 나오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진주가 된 텍스트는 말이 없다. 하지만, 어떤 텍스트였는지에 딸라 달라지는 진주의 모습은 그/녀의 작품이 시종일관 ‘진주’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진주가 아닌 매번 다른 진주이게 만든다.
특히 2012년에 제작한 <형사법 (1702-1721 page)>은 그동안 보았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다가왔다. 늘 그렇듯, 그/녀의 작품에 대한 감상은 텍스트를 읽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어떤 연유라고 했던가. 어쨌든 작가가 법전을 펼쳐들고 읽고 있다.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법전을 읽고, 그것을 다시 한 땀 한 땀 진주구슬로 메꿔간다. 관객에겐 보여지지 않는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게 되지 않을까. 곱씹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주 한 알 한 알을 붙여가며 작가는 어떤 생각을 할까. 캔버스를 메울 정도의 반복이라면 아무 생각 없어지는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작업에 이르는 과정이 그저 한번 읽고 마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그 텍스트는 ‘형법’이란다. 그 법(텍스트) 조항이 법정에서 얼마나 많이 읽혀졌을지, 그것을 근거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값을 치렀을지, 또 어떤 억울함이 생겼을지 알지 모를 일이다. 캔버스 위 진주가 눈물처럼 느껴졌다면 지나친 감정이입이었을까.
그런가 하면 ‘신문 시리즈’는 법전 시리즈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일반적으로 신문에는 다양한 크기의 글자들이 나오고, 기사가 있는가 하면 사진이나 광고도 있다. 하지만 고산금의 신문에는 기사의 경중에 상관없이 동일한 진주구슬로 대체된 활자들이 있다. 작품 제목을 보기전에는 그 날 무엇이 헤드라인이었는지, 어떤 사건을 다루었는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어떤 신문이었는지도 알 길이 없다. 제목을 통해 ‘아, 그런 날이었구나’ 생각하더라도, 그 사건에 대해 세세히 기억하지 못한다. 희미하게 뭉뚱그려짐. 그런 점에서 ‘신문 시리즈’는 기억에 대한 초상화인지도 모르겠다.
작업실을 들렀을 때 나란히 한 쪽 벽에 세워져 있던 <빅토르 위고의 ‘올리버 트위스트’>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의 진주구슬이 그렇게 다르게 보일 때, 짐짓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진주가 눈물로 보였을 때, ‘21세기 자본론’의 진주가 자본의 상징처럼 탐욕스럽게 보였던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매번 이렇다. 언제나 캔버스에 진주구슬이거나 철판에 스테인레스 구슬인데, 볼 때 마다 달라진다. 읽을 수 있는 텍스트라고는 작품 제목뿐인데, 작품 제목에 따라 작품을 보는 방법과 깊이와 방식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은 철저히 텍스트 의존적이면서도 텍스트에서 독립적이다.
블랙 스테인리스 위 스테인리스 구슬
하얀 나무 패널에 하얀 인조진주 구슬은 고산금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버렸지만, 블랙스테인리스 위에 위 스테인리스 스틸 구슬 역시 빼 놓을 수 없다. 작가의 의도적이고 치밀한 기획이었던 아니던, 블랙 스테인리스 위에 놓인 스테인리스 구슬은 재료의 대비감만큼이나 관객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다르다. 하얀 나무 패널 위에 인조구슬 작품이 하염없이 작가 자신에게로 침잠하는 느낌이라면, 블랙 스테인리스 작품들은 외부 이미지들을 스스로에게 반사시키면서 밖으로 뻗쳐나간다. 마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끊임없이 저항하고 거부하고 있듯이. 구슬과 철판, 그리고 거기에 왜곡되고 일그러져 반사되는 관객 스스로. 인조진주 작품에서는 보이지 않는 또 한 층의 레이어가 덧대어 진다. 왠지 모르게 화려하고 우아해 보이는 그 ‘블랙’ 조차, 처연하다.
같지만, 같을 수 없는 작품, 같으면서 다른 이야기
누군가에게 고산금의 작업은 늘 같은 반복으로 보일 수 있다. 실제로 그런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같은 반복은 거의 없었다. 아니, 작품의 본성상 같을 수가 없는 작업이다. 관객에게도 작가에게도.
같은 텍스트라 한 들, 읽는 시점의 자신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것이 다를 수 밖에 없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상황에 딸라 다르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제목에서 언급된 책들을 읽었더라도, 끊임없이 안으로 숨어들어가고 밖으로 반사시키는 구슬들은 작가가 작품으로 만들어낸 부분을 짐작할 길이 없으며, 작가의 그 마음을 알기 어렵다. 심지어 모르는 책이나 텍스트가 언급되었을 때, 읽기를 포기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작품을 마주할 수 밖에 없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런 상황, 즉 작품으로부터 작가가 숨어 있기 때문에, 관객이 들어설 여지가 생긴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바로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는 (진주)구슬들의 이야기 때문에 여전히 그/녀의 작업 앞에 발길이 멈춘다.
고산금은 말했다. 생활인으로서 꾸준히 작업하는 작가로 남고 싶다고. 그/녀의 바램은 이루어질 것 같다. 아직 할 이야기가 많고, 아직 전할 마음이 깊기 때문이다. 덧붙여 이제 작가를 조금 더 알게 된 한 사람으로 노래가 되었든, 시가 되었든, 도 미묘하게 달라진 그녀의 모습을 곧 구슬을 통해 오래오래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