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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이터 수첩 May 18. 2020

[인터뷰] 노순택 #1

2008. 독일 슈트트가르트 <비상국가>

인터뷰      

이 인터뷰는 2008년 3월부터 5월까지 독일 슈투트가르트 쿤스트페어라인(Württembergischer Kunstverein)에서 열린 노순택 개인전 <비상국가>에 기반하고 있다인터뷰는 2008년 5월에 진행되었으며독일의 예술전문출판사 핫제 칸츠(Hatje Cantz)에서 출간된 사진집 <비상국가State of Emergency>에 영어와 독일어로 전문이 번역되어 실렸다



당신의 작업에 대해 얘기하려면 먼저 개인사적인 이야기부터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사진의 내용즉 무엇에 대해 말하는가 하는 점일 텐데한국사회의 정치적 현실을 주로 다루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이력에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고 적혀있는데아무래도 그 영향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까요더불어 정치학도에서 사진가로의 전환지점이 궁금합니다특별한 계기가 있었던가요?       

내: 제 대학시절은 한국정치사에서 군사독재정권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시기였습니다.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이 더 어둡다는 말처럼, 후반기 군사정권은 공포정치로 자신의 생명을 이어나가려고 안간힘을 썼지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게 기억나는데, 군사정권에게 범죄는 곧 그들의 정책에 반대하거나, 사회안전망에서 소외된 이들이 벌이는 생존범죄였습니다. 구조적이고 부패한 범죄는 은폐하거나 오히려 옹호하면서 저항적 수단의 불법이나, 사회의 방치된 그늘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생계형 범죄에 대해서는 마치 군사작전을 벌이듯 ‘전쟁’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변의 친구들이 구속되거나 다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숱한 학생들과 노동운동가, 시민운동가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특히 1991년 5월정국은 내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질문들을 던져주었습니다. 그해 5월은, 명지대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강경대 학생이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목숨을 잃고, 이를 규탄하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다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제 몸에 불을 붙였던 죽음의 5월이었습니다. 헌데도 정권과 제도언론은 이를 반성하고 진실을 규명하기는커녕, 이들이 북한 김정일의 지시를 받고 극렬행위를 하고 있다는 식의 왜곡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운동권 안에 자살조가 꾸려져 있으며, 유서를 대신 써주고 죽음을 부추긴다는 등의 모략도 있었습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렸던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심지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노동운동가의 장례식장 벽을 뚫고 백골단이 난입해 시신을 탈취해 가는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었던 고 박창수 씨의 죽음이 그 사건입니다.  

선거철마다 유권자에게 위기감을 불어넣기 위해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 발표되는 것은 한국 현대정치사의 ‘이상한 전통’으로 굳어가고 있었습니다. 정권에 비판적인 책을 팔거나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련의 사건들을 접하면서 마음속에 의문이 커져만 갔습니다. 우리사회에서 대체 무슨 일이, 왜 벌어지고 있는가. 사실은 무엇이며 거짓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책에서나마 보다 진보적인 정치모델에 대해 배우지 못하는가.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실천은 왜 금지되어야 하는가. 내가 본 것을 타인들도 보았는가, 내가 들은 것을 타인들도 들었는가.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한 고민은 그런 의문을 품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작된 것입니다.     

비상국가
비상국가

당시 한국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자 합니다그 당시 당신의 세대가 품었던 가장 중요한 갈등의 국면은 무엇이었습니까새로운 정치모델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것인가요     

당시 학생들에게 한국전쟁 이후의 현대사는 금지되거나 불온한 영역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에 관한 호기심이나 탐구가 금지된 것입니다. 당시 상당수의 금서가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군사정권이 처한 위기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대학교수들이 공동연구논문으로 ‘한국사회의 이해’라는 책을 펴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는 웃지못할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당시 상황은 공포정치의 ‘현실’과 민주정치를 향한 ‘열망’이 심각한 갈등을 벌인 상황이자, ‘알고 싶은 것에 대한 억압’, ‘말하고 싶은 것에 대한 억압’을 거부하는 원초적 저항의 상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금지가 위반을 부르듯, 그 모든 억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읽었고, 또한 말하려 발버둥쳤지요. 

그러나 이러한 열망들이 툭하면 친북행위로 매도당하고, 심지어 간첩행위로 몰려 투옥되는 일마저 잦았습니다. ‘상식의 복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더 나은 사회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에 대한 논의보다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모두에게 팽배해 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는 ‘군사정권의 종식’이 당면한 과제였지요. 허나 저항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마치 히틀러의 시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강화된 증오와 공포가 정치권력의 유지기반이 되는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처신의 규율을 알아서 습득하고 기꺼이 동반자가 되기도 하니까요. 특히 제도언론과 지식인들이 보여준 기회주의와 식민성은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암울했던 군사정권기를 뒤로하고 지금의 한국사회는 일정 정도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극심해지는 양극화와 식을 줄 모르는 ‘북한’에 대한 광적인 대결의식, 미국에 대한 지나친 정치 경제 군사적 식민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울러 민주주의를 향한 사회변혁의 주춧돌이었던 세대가 현실정치에 뛰어들면서 보여준 이합집산과 자기기만, 변절, 독선의 모습은 진보세력이나 보수세력이나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식의 정치불신마저 불러 일으켰으니 답답한 일이지요.

레드 하우스 III
레드하우스 III

누구든 코리아를 이야기할 때 그것이 어떤 코리아를 의미하는 것인지 잠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현실 속의 한반도에는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는 북한과 남한이라는 두 개의 한국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비록 최근에는 일반인들도 북한에 관광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여전히 커다란 거리감이 존재합니다그런데 당신의 사진을 보면 남한사회 안에 존재하는 북한의 영향력이 잘 드러나 보입니다예를 들면 <레드하우스>의 3장 말려들다 전복된 자기모순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관점 같은 것입니다다른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들과는 분명하게 차별화되는 이 같은 독특한 관점을 가지게 되었던 계기가 있나요     

당연한 얘기지만, 저는 북한을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당연한 얘기지만, 저는 남한을 이상적인 사회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사회는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문제투성이 사회이지요. 언제나 스스로를 이상화시키고, 상대방을 악마로 설정한다는 점에서도 두 사회는 참으로 닮았습니다. ‘적’의 위협을 통한, 내부의 단결을 도모해 왔다는 점에서도 두 사회의 작동방식은 일치합니다.      

저는 이 두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들을 우회적이거나 때로는 직접적으로 표출해 왔습니다. 특히 남한사회는 제가 태어나고 자라온 곳이므로 보다 미시적이고 섬세한 감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 동안 남한사회에서는 ‘정부에 대한 비판 = 친북, 좌파’라는 등식이 오랫동안 지배해 왔습니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북한사회에 대한 비판 = 반통일주의, 친미주의, 극우’라는 아이러니한 등식도 존재했지요. 허나 남한사회에 대한 반성적 비판이 북한을 찬양하는 거나 다를 바 없다는 식의 억지는 사적, 제도적 폭력으로 맹위를 떨쳐왔다는 점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한사회는 북한을 실체적 적국으로 맞서왔을 뿐만 아니라, 가상의 적으로까지 확장하여 사회 모든 분야에 안보논리를 이식해 왔습니다. 저 역시 어릴 적부터 북한을 악마로 묘사하는 그림을 그리거나 표어를 짓는 교육을 받아왔고, 고등학생 시절부터 학교에서 총검술을 익혔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군대에 징집되어 북한을 향해 총을 겨누어야만 했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사회에 복귀한 뒤에도, 예비군과 민방위에 소속되어 1년에 한 두 차례 군사훈련과 반공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남한사회의 평범한 남자라면 누구나 이행해야만 하는 법적 의무사항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육문제, 인권문제, 노동문제, 의료문제, 지방분권 문제, 국제교역문제 등 다양한 접근법이 필요한 사회갈등까지도 남한 사회는 ‘친북’과 ‘반북’의 잣대를 들이대어 왔습니다. 북한이라는 존재는 남한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를 넘어, 이제 남한사회에서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절대적이고 상징적인 존재가 된 것이지요.     

저는 우리가 왜 북한을 괴물로 묘사해야만 하는지, 북한은 실제로 괴물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괴물에 대항한다는 핑계로, 우리가 스스로를 괴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지 궁금했습니다. 모든 선은 반북이요, 고로 모든 악은 친북이어야만 하는 논리의 작동방식이 궁금했습니다. 저는 지난해 출간한 책 제목을 영어로 Red House라고 지었지만, 한국어로는 붉은 틀(Red Frame)이라고 지었습니다. 남한에서는 북한을 붉은 틀에 갇힌 사회라고 비난하지만, 정작 붉은 틀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건 우리자신이 아닌가 되물어 보고 싶었던 겁니다. 책 중간에 ‘망원경을 들기 전에 먼저 거울을 보라’, ‘현미경을 들기 전에 먼저 거울을 보라’거나, ‘나는 너의 거울이며, 너 또한 나의 거울임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글을 써 넣은 건 그 때문입니다. 


more photos. Red House 붉은 틀 III

http://suntag.net/archives/dt_gallery/%eb%b6%89%ec%9d%80-%ed%8b%80-red-house-iii



정치학에서 포토저널리즘을 거쳐 엑티비즘과 예술의 영역까지 다양한 경험을 해오셨는데그래서인지 당신의 작품들에는 정치적 액티비즘과 회화적(혹은 시각적재현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 지점들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그렇다면 실제로 무엇에 대해 의심을 하고 계신 것인지요사진작가로 살아가면서이미지가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셨던 건가요?     

사회를 향한 발언의 방식으로 예술매체를 택한 많은 분들이 그렇겠지만, 저 역시 단순하고 순진한 희망으로 사진과 글에 대한 고민을 키워왔습니다. 실재하고 있으나, 알려지지 못한 사회적 폭력과 죽음을 그대로 방치하는 건 그에 대한 동조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권력이 자행하는 폭력이 너무 더럽고 환멸스러웠기에, 그 폭력이 어서 종결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자면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직시해야만 했고, 그걸 타인에게 중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목격으로서의 이미지, 증거로서의 이미지, 기억의 보완장치로서의 이미지가 제겐 매력적이었습니다. 사실 시각적 재현매체로써 사진 또한 심각한 폭력적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반성적 고민을 나중에야 하게 됐습니다만, 어쨌든 초기에는 사회적 폭력에 관한 저항으로서의 이미지에 당위와 희망을 품었던 게 사실입니다.      

미상국가

: ‘초기에’ 사회적 폭력에 관한 저항으로서의 이미지에 당위와 희망을 품었었다고 말씀하신다면이제 더 이상 그런 기대는 않는다는 것인가요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사실 당신의 작업이 꽤 많이 변화된듯하여 그렇습니다초기 작업들은 물론 사회 저항의 현장을 찍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현장고발의 측면들이 굉장히 직설적으로 드러났지만최근 작업들은 좀 더 부드러워졌다고나 할까요여기에서 부드러워졌다는 표현이 정확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만예를 들어 <얄읏한 공시리즈 같은 것은 사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비해서 이미지는 심지어 서정적이기까지 합니다그리고 좌파 시위대를 찍은 사진이나 우파 시위대를 찍은 사진들북한에서 본 북한남한에서 본 북한 등의 사진들을 보다 보면뭔가 뚜렷한 입장이 보인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 입장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듯합니다뭐랄까 끊임없이 문제를 던지고 뒤로 물러나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이미지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이 어느 정도 변화했다고 봐도 좋을까요?     

네, 맞아요. 지금은 ‘확신한다는 것’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가졌던 어떤 확신을 떠올리면 좀 부끄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맹목으로서의 확신 말이지요.

저는 확신하는 이들의 모습을 많이 보아왔고, 어떤 이들의 확신은 참 아름답다고도 느꼈습니다. 헌데, 점점 확신이 무서워지더군요. 어떤 이들은 자신이 믿어온 확신이 ‘틀린 사실’에 기반했다는 점이 명백해졌는데도 자신의 확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확신이 맹목이 될 때, 사람의 모습은 참 처량해 지는구나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건 바로 괴물의 모습이지요. 누구나 “나는 ‘극단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만,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걸 수용하지 못한다면 그게 바로 맹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가진 확신을 타인에게 이식시키고야 말겠다는 그 의지가 바로 폭력의 시발점인 셈이지요.

반면에 숱한 ‘회의주의자들’, ‘의심하는 자’들은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회색주의자’라는 낙인은 누구에게나 모욕이 되었던 것이죠. 허나 저는 의심의 자유, 의심의 보장, 의심의 확산이야말로 우리가 더 나쁜 상황으로 빠지지 않는 하나의 준칙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르크스에게 혁명이 ‘폭주하는 기관차’였다면, 벤야민에게 혁명은 ‘긴급제동기’였다는 얘기를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은 제게 발상의 전환과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은 확신과 의심의 관계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벌이는 괴물의 경쟁, 괴물의 질주 상황에 필요한 건 누군가의 승리가 아니라, 제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요.

저는 제 작업이 내가 품은 확신을 드러내거나, 해답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대신 저의 혼란을 드러내거나, 작업과정을 살짝 엿보이거나, 관객 자신일 법한 장면을 제시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지요. 뭔가 의심의 계기가 된다면 그걸로도 대화나 인식확장의 계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브레히트가 고민했던 ‘거리두기, 소격효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비상국가

당신의 작업에는 뚜렷한 몇 가지 특징들이 보입니다예를 들어이미지와 텍스트와의 관계흑백사진그리고 광학장치의 등장과 같은 것들입니다우선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에서부터 여쭤볼까 합니다당신의 경우 다른 사진가들의 작업과는 달리 텍스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아 보입니다특히 이전 작업들은 특히 개별 사진마다 특유의 시니컬함이 돋보이는 짤막한 텍스트를 손수 써 넣기도 했고, <얄읏한 공>은 좀 다른 형식이었지만 일지를 쓰듯 수상한 볼 의 정체를 밝혀가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었습니다당신의 사진작업에서 텍스트가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사진을 접하기 전에 먼저 글을 접했습니다. 글 쓰는 일이 생계유지 수단이었던 것이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입장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처음엔, 제 작업을 단순하게 바라보거나, 엉뚱하게 해석하는 게 걱정되어 텍스트를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제가 원했던 건 어떤 사회적 장면이 보여주는 매우 모순적이고, 블랙코미디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그걸 잡아채지 못할까봐 조바심이 나서 냉소적인 문투의 텍스트를 결합시켰던 것입니다. 그것이 첫 개인전 ‘분단의 향기'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약간 어리석은 조바심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군요.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은 이후로도 계속되는 데, 대신 방식을 좀 더 다양화했습니다. <얄읏한 공>에서는 개별 이미지에 아무런 텍스트가 결합하지 않는 대신, 원고지 100매 분량의 작업노트가 함께 했습니다. 이미지로는 수상쩍은 공의 매우 다양한 모습과 변신,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흥미롭지만 뭔지 알 수 없는 장면들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텍스트는 이 공이 대체 무엇이며 이 공 주변에서 삶을 꾸려온 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추적하는 과정을 원고지 100매 분량의 글로 적어나갔습니다.

<붉은 틀>의 경우엔 일종의 아포리즘을 제가 직접 만들어 내거나, 명언을 변용하는 방식을 취했죠. 

무엇이 가장 좋은 방식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미지와 텍스트의 다양한 결합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비상국가_025_2006_대추리

그럼 이번에는 왜 흑백사진을 선호하시는지 묻겠습니다당신의 사진들은 대부분 흑백인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전략적으로 흑백사진을 선호하시는 것은 아닌지요예를 들어서 흑백사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신화적인 아우라 같은 것을 이용하고자 한 것은 아닌지요제가 신화적인 아우라라고 하는 것은 흑백사진이 주는 신뢰감 같은 것을 말합니다확실히 흑백사진이 칼라사진보다 훨씬 진실을 담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니까요그리고 요즘에는 이 같은 흑백사진의 아우라혹은 추억이라는 것이 작가의 예술적 전략에 관계가 있다고 보여 집니다어떤 면에서 이러한 전략은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의 회화적 재현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한데요특히 만들어진 이미지가 흑백사진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대상의 시각적 영향력 같은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흑백사진 작업을 주로 하시는 것이 혹시 이러한 지점들을 복합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것인가요     

시각예술의 역사에서 사진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매우 짧습니다만, 사진의 역사에서 흑백사진의 역사는 결코 적은 비중이 아닙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신화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나 흑백사진은, ‘예술적’이라는 의아한 신화를 가짐과 동시에 ‘진부함’이라는 비아냥에도 직면해 있습니다.      

제 경우 ‘익숙함’이라는 데서 이야기를 풀어야 할 듯합니다. 인간의 시각적 경험이 흑백에 익숙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제가 사진을 시작하면서부터 기술적으로 손에 익은 것이 흑백사진이었다는 얘기입니다. 흑백사진이 컬러사진보다 훨씬 다루기 용이한 것이 사실입니다. 저의 경우, 제가 빛을 제어하기 어려운 시간과 공간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아서 컬러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컬러사진은 이미지 속에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이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작가가 선택해야 할 문제이고, 그 전략이 유효적절했는가는 또 다른 점검이 필요하겠지요.      

아시겠지만, 제가 흑백을 고집하는 건 아닙니다. 사실 많은 작업을 컬러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노순택 작가 홈페이지 http://sunta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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