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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이터 수첩 Apr 17. 2020

[노세환]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보기

2013. 자하미술관, 자장면 집 백자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보기

- 자장면, 자장면 집, 그리고 자장면 집 백자에 대한 단상.

신보슬 (토탈미술관)     


0. 

초등학교 때까지였던 것 같다. 학교에서 상을 받았다든지 뭔가 착한 일을 하면 엄마는 포상처럼 자장면 집에 데려가 자장면을 사주곤 했다. 내게 자장면 집은 그런 곳이었다. 축하할 일이 있거나 칭찬받을 일을 했을 때 의식처럼 ‘찾아가는 곳’. 빨간 플라스틱 구슬을 엮어 만든 약간은 싼티나는 가리개를 열고 들어가면 동네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주인아저씨가 반갑게 맞이해주던 내 어릴 적 추억의 한 켠을 공유하는 그런 곳.

대학원 다닐 때였던가.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G.O.D의 <어머님께>라는 노래가 빅 히트를 쳤다. 전체 가사를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나는 종종 이 첫 구절을 흥얼거리며 다니곤 했다. 그 즈음,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자장면은 ‘찾아가서 먹는’ 그런 곳이 아니라, 배달음식의 기수로서 ‘시켜먹는 음식’, 대한민국 어디라도 주문하면 받아먹을 수 있는 그런 음식으로 그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큐레이터가 되면서 자장면은 조금 다른 의미로 나의 일상에 들어왔다. 전시 설치기간이면 한번은 먹게 되는 자장면. 자장면을 먹지 않으면 왠지 전시 설치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설치기간 전시장 바닥에 신문을 깔고 먹는 자장면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유명 중국집의 자장면보다,  전복과 온갖 해물을 넣은 럭셔리 ‘차이니즈 레스토랑’의 자장면보다 나는 전시 설치기간에 바닥에 깔고 먹는 자장면이 제일 맛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자장면도 자장면 집도 그 의미가 많이 변했다. 동네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자장면 집 아저씨도 없어졌고, 자장면은 철가방, 배달이라는 키워드로 통용되었다.      


1. 

자장면은 이렇게 내가 철들기 훨씬 전부터 나와 가까웠지만, 나는 한 번도 자장면이 담긴 그릇에는 시선을 주지 않았었다. 그저 그 안에 담긴 음식에만 집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세환 작가의 작업실에서 만난 하얀 그릇은 묘한 호기심을 자아냈다. 어딘가 눈에 익은 형태였지만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그 그릇들을 출처를 한 번에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았다. 다만, 그것들이 장인의 손길을 거친 백자가 아닌 공산품일 것이라 짐작할 뿐이었다. 공산품이라 하더라도 그릇들은 꽤 정갈한 디자인의 그릇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선과 안정감 있는 형태. 그릇으로서 가져야 할 기능적인 요구를 충분히 충족시키는 굿 디자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릇 감상을 깬 것은 작가의 한마디였다. “그 그릇 자장면 집 그릇이예요”  작가의 짓궂은 장난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 

공장에서 만들어졌고, 자장면 집에서 사용하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그릇을 보는 마음과 시선을 복잡해졌다. 게다가 노세환의 사진 속에서 그릇들은 백자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정갈함과 기품을 자랑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말 한마디에, 나의 시선과 생각들은 작가의 의도대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작가가 작가노트에서도 쓰고 있듯이, 백자는 부드러운 곡선이 기형을 이루고, 유약은 투명하고 얇게 입혀져 백색을 발하며, 그릇의 모양은 풍만하여 양감이 있고, 은은하게 광택을 낸다... 사람들은 백자의 수려함과 단아함에 감동한다. 하지만 (과연) 모든 사람들이 백자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자체로 느낄 수 있을까. 조선시대 연적의 풍만한 몸체와 물 주둥이 끝에서 바닥까지 떨어지는 간결하면서도 지조 있는 선을 과연 모두가 느낄 수 있을까. 사람들은 쉽게 감탄한다. 작가는 묻는다. 그것이 박물관 안에 멋지게 디스플레이되어 있고, 전문가들이 훌륭하다고 하니 그저 덩달아서 감탄하는 것은 아닐런지. 우리의 미감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권력이나 강요에 굴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긴, 작품이 놓여 있는 권위는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강요하지 않았던가. 나 역시 그런 강요된 강박의 시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물론 현대미술로 들어오면 이야기는 훨씬 복잡해진다. 미술사에 대한 이해와 맥락 없이 캔버스 위에 흩뿌려진 물감들에서 감동을 받는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 될 것인가, 설명이나 사전 공부 없이 이해하거나 감동할 수 없다고 해서, 작품이 실제적인 가치를 가지지 않고 관계자들의 담합에 의한 ‘사기’라고 할 수 있을까. 모두가 공감하지 않는다고 하여, 작품의 가치나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작품이 놓이는 장소와 위치에 따라서 작품의 고유가치가 달라진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 않을까. 우리의 감동은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꼬리를 무는 질문에, ‘백자’가 된 자장면 집 그릇들을 보는 시선은 담담할 수 없었다.     


3.

노세환의 ‘백자’들은 사진 속의 우아한 모습 못지않게 그가 들려준 그릇에 얽힌 이야기 역시 흥미롭다. 그릇이 있으니 그릇을 만드는 공장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그 당연한 이야기를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자장면 그릇이라고 폄하(?)하는 바람에 그 그릇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가 있을 것이라는 것 역시 새로운 사실이었다. 자동차 디자인만큼의 섬세함을 요하지는 않겠지만, 디자이너는 자장면 그릇이라는 평범하고 단순한 그릇에 자신의 개성을 담아내었다고 생각하니 놀라울 뿐이었다. 단무지를 담고, 식초와 간장을 담는 기능으로만 바라보았던 ‘그릇’에 묻힌 프로세스와 그릇을 거친 사람들의 수고를 생각해보면, 노세환의 ‘백자’를 ‘백자’로 보아서는 안 될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의 화려한 할로겐 조명 아래 놓인 그 멋져 보이는 백자들도 당시에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손끝에서 함께 숨쉬던 것들이 아닐는지. 작품은 이렇게 감춰지거나 보지 못했던 세상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4. 

문득, 노세환의 ‘백자’ 앞에 선 관객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자장면이라는 음식과 어린 시절 추억하나쯤은 있을 법한 자장면 집과 닿아 있는 그의 사진은 관객들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설 수 있게 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런 것이 예술이라면 나도 하겠다며 자신만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노세환은 그 ‘나도 하겠다’라는 말 속에 숨겨진 ‘별 거 아니네’라는 그 생각들을 관객들에게 먼저 보여줌으로써 익숙한 것에 대한 시선을 바꾸어 놓는다는 점에서 노세환의 ‘백자’는 좀 특별한 것 같다. 눈앞에 버젓이 고귀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그 그릇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다가, 정작 그 그릇이 오늘 점심시간에 만나게 될 자장면 그릇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속았다라는 느낌을 받는 간사한 자신의 시선을 느끼는 관객이 있다면, 노세환의 작업은 성공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렵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현대예술이 조금은 만만한 듯 보이지만, 점심식사로 배달 온 자장면 그릇을 보는 눈길이 달라졌다면, 자장면 그릇을 앞에 두고 박물관에 진열된 백자가 떠올랐다거나, 박물관의 백자를 보고 자장면 그릇에 대한 노세환의 질문이 떠올랐다면, 그의 ‘자장면 집 백자’는 현대예술의 중요한 지점 관객에게 질문하기를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작가나 작품은 정답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강요할 수도 없다. 어떻게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보게 하여 관객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보도록 할 것인가. 그냥 흘려 보냈던 이미지를 숙고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현대예술의 과제라면, 적어도 노세환의 ‘백자’는 그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5.

오늘, 점심으로 시킨 자장면 보다 자장면 그릇이 더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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