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 얼굴 볼 수 있을 정도로만 바빴으면 좋겠어요

by 나탈리


일은 한꺼번에 들어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남편의 업도 일-많음과 일-적당함의 편차가 크다. 그럼에도 우리의 일-많음 시기가 겹친 적은 없었다. 내가 바쁘면 남편이 주말에 쉬고, 남편이 바쁠 땐 내가 맡고 있던 프로젝트들이 끝나 한가한 탓에 둘이서 주말을 즐겨본 지가 언제인지 모를 정도다. 요샌 그래도 이때가 더 나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의 바쁨 주기가 일치한 탓이다. 둘 중 한 명이 바쁘지 않으면, 얼굴이라도 볼 텐데. 새벽 퇴근 후 집에 돌아와도 차가운 어둠뿐일 때가 많지만, 이 날은 모처럼 남편이 나보다 더 일찍 들어왔다. 그 덕에 잠들어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슬그머니 그 등에 기대어 본다. 내게 묻어온 찬 바람이 녹아내린다.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종종 CD 님들께서 남편의 안부를 물어본다. 그가 새로운 프로젝트로 바쁘다고 말하면, 다들 바쁜 게 좋지.라고 말한다. 맞다. 바쁜 건 좋다. 하지만 혼자 사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바쁜 건 아니지 않나. “그렇죠, 바쁜 거 좋죠.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얼굴 볼 수 있을 정도로만 바빴으면 좋겠어요.”라 말한다. 주문처럼 말하고 다닌 덕일까. 이번 주말은 오랜만에 남편과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눈 뜨면 남편이 있고, 눈 감을 때도 남편이 있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남편이 팬케이크를 만들어줬다. 과정을 촬영하고 편집해서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다. 음악을 고르고, 편집점을 찾고, 완성된 걸 남편에게 보여주기만 했는데도 웃음이 났다. 오후엔 남편의 개인 촬영을 도와주고 밀린 집안일을 했다. 오랜만에 여유로운 주말. 창을 열어놓으니 희미한 빗소리와, 차가 빗물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제이크 질렌할 주연의 영화 <데몰리션(Demolition>이 보고 싶어졌다. 비 오는 날 생각나는 영화 중 하나로, 첫 회사에서 한 AE 님이 내부 리뷰할 때 영화의 일부분을 발췌해 왔었다. 그분의 아이디어가 흥미로워서 퇴근하고 영화를 봤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분이 발췌한 씬은 주인공 데이비스 미첼(제이크 질렌할)이 헤드폰을 쓰고 지하철에서 춤추는 장면으로, 이 시퀀스를 먼저 본 탓에 나는 영화가 자유에 관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영화는 자유보다는 상실에 관한 내용이다. 데이비스는 여느 때처럼 아내 줄리아(헤더 린드)와 차 안에서 이야기를 하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아내를 잃었다는 말을 들은 데이비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내고, 자판기로 향한다. 자판기는 고장이 나 있었는지, 물건이 나오다 만다. 데이비스는 자판기 회사에 항의 편지를 쓰고,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출근한다. 아내의 죽음 이후 데이비스는 공항에서 두 시간 동안 사람들을 관찰한다. "사람의 마음은 기계처럼 고칠 수 있다"는 장인의 말에 집안의 모든 물건을 분해하기 시작한다. 데이비스는 자판기 회사에 항의 편지를 세 통 더 보내고, 새벽 2시쯤 자판기 회사의 고객센터 담당자인 카렌 모레노(나오미 왓츠)에게 전화를 받는다. 데이비스는 카렌과 통화하며 아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한다.


줄거리만 보면 새로운 로맨스가 탄생할 것 같다. 아니다. 아픔을 겪고 있는 등장인물들이 연대하고, 결국은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나아간다. 이 점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여운을 더한다. 데이비스는 차 사고를 낸 남자를 만나고, 사죄하는 그에게 오히려 "괜찮다"라고 말한다. 카렌의 아들이 만나자고 한 장소에서 데이비스는 건물들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보고, 부둣가에서 아이들과 함께 달린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건 상처를 거즈로 덮는 것과 같다. 나의 아픔은 누군가가 대신 치유해줄 수 없다. 아픔을 온전히 마주 봐야 하는 것도, 빠져나와야 하는 것도 나 자신의 일이다.


영화를 여러 번 보면, 처한 상황에 따라 보이는 부분이 다르다. 지난번에 <데몰리션>을 봤을 땐 마지막 부분에서 탄성이 나왔는데, 이번에는 도입부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냉장고에서 물이 샌 지 2주 째야"

"그랬나?"


줄리아와 데이비스의 대화가 어젯밤, 그리고 날이 밝아진 오늘까지 잊히지 않는다. 일에 치여 일상을 잊은 데이비스는 사랑을 보낸 뒤, 참회하듯 물건을 분해한다. 아침저녁 남편 얼굴도 못 볼 정도로 바쁜 지금, 이렇게 살다가 남편의 소중함까지 잊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든다.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침대 옆이 비어있었다. 남편의 촬영이 새벽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를 깨우지 않고 나간 그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덜컥 무서워졌다. 잊지 않기 위해 쓴다. 그의 옆은 당연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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