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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Jun 25. 2021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지만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제안한 프로젝트 하나가 성사됐다! 형태를 잡느라 고생했는데, 클라이언트의 중간보고라인에서 한 번에 승인됐다고 한다. 다른 광고주와 영상의 토널리티, 장소, 모델, 의상 등 촬영 전 세부 사항을 조율하는 Pre-Prodctuion Meeting 중이어서 기쁜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할렐루야, 마스크!- PPM이 끝나고,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깨춤 한 번 추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지난 3주간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한 구조를 설계했다. 여기엔 덱의 콘셉트도 들어간다. 덱이란 예예익선, 즉 예쁘면 예쁠수록 나에게 유리하다. CD님께서 이번엔 덱을 잘 만들어오라고 하셔서 덱 레이아웃을 고민하는 데만 하루를 썼다. 레퍼런스도 찾아보고, 선배님들이 만든 덱도 살펴보고. 그 와중에 클라이언트에게 온 자료와 내가 조사한 소비자 자료 등을 조합해 콘셉트를 생각했다. 이거다! 싶으면 바로 덱을 만든다. 이번엔 네온 톤 위주로 덱을 만들었다.


그다음 구조를 제안했다. 자하 하디드의 작품 같은 혁신적인 구조, 무난한 구조 등등 형태를 잡느라 고생했다. 틀을 몇 번이고 부수는 과정에서 탈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스프린터 형이라 지구력이 약한데, 이를 키우기 위해 노력 중이다- 언덕 하나를 넘으니, 또 다른 언덕이 나온다. 이제 우리가 만든 구조에 어떤 오브제를 채워 넣을지 고민하는 단계다. 예정보다 규모가 커져서 사용 가능한 오브제의 수준이 높아졌다. 다시 재미가 샘솟는다. 물론 야근도 다시 시작이다.


약 2.5일간 우리가 잡은 테마에 관한 근거 자료와 모델, 그리고 세부 아이디어다. 이렇게 쓰니 몇 시간 안 걸릴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료 조사에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 이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잡은 테마에 관한 근거가 있어야 아이디어가 탄탄한 이유에서다. ‘그냥 내 생각인데’는 통하지 않는다. 조사한 자료가 많아야 뻗어나갈 가지가 많다. 보통 자료조사만 이틀 이상이 걸리는데, 스케줄은 언제나 우리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


자료를 찾고, 타깃이 좋아하는 모델을 선정하고-물론 여기에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제야 아이디어를 생각한다. 처음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메모장에 보관한다.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만큼 누군가가 그 아이디어를 더 멋지게 포장하여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 일을 하다 보면 “남들과는 다른”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달라는 주문을 왕왕 받는다. 어떻게 하면 색다른 아이디어를 내느냐. 그건 자료와 시간, 개인의 경험에 달려있다. 정답은 없다. 내 생각이 돋보일 수 있도록 끈덕지게 고민한다. 팀 회의 때 아이디어 덱을 보여줄 때도 어투에 신경 쓴다. 같은 아이디어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여기에 덱도 예쁘게 만들어 가야 유리하다. 보기 좋게, 본인이 생각한 콘셉트에 맞게 만들어가는 게 아이디어 채택에 은근 도움이 된다.


어디에서도   없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기란 쉽지만, 그렇게 아이디어를  경우 우리 제품/서비스와의 연관성이 떨어지거나, 타깃의 관심사와 맞지 않는다. 게다가 비용이 많이 든다.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그렇게 아이디어를 없애다 보면 다시 0이다. 한숨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온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이름 걸고 하는 일인데 조금 더 해봐야지 뭐. 그렇게 보내면 밤 11시가 훌쩍 넘는다. 무리하면 안 되니 이쯤에서 퇴근하기로 한다. 안 되는 걸 억지로 붙잡고 있어 봐야 몸만 힘들다. 이렇게 내 체력과 생각을 갈아 넣은 덱을 광고주에게 보냈다. 몇 차례의 컨퍼런스 콜을 했고, 무지막지한 스케줄에 맞춰가며 수정했다.


중간보고 라인의 컨펌을 받았지만, 할 일이 안 읽은 메일처럼 산더미다. 모델과 자료를 다시 찾아야 하고, 아이디어도 새로 내거나 보완해야 한다. 솔직히, 이땐 지쳐서 대충했다. 아직 그럴 연차가 아닌데. 몸이 힘드니 정신이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어제 피드백에서 아이디어가 역행한 것 같다는 피드백을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금만 더 날카롭게 볼 걸. 조금만 더 힘을 내볼걸.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다음 날부터 정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밝은 아침. 필라테스 수업을 듣고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출근했다. 네이밍 옵션을 생각하고, 새로 아이디어를 짜느라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오늘도 저녁을 먹었지만, 길이 보이는 것 같아 기쁘다. 잠깐 해를 봤지만, 다시 새벽이다.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 무산되거나 지연된 프로젝트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동트는  펜트하우스에서 보는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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