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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Jun 21. 2021

나도 잘 갈 수 있기 위하여


‘일 잘하는 중간관리자는 실력 있는 통역가와 비슷한 것 같다. 잘한다고 생각되는 팀장들을 관찰하거나 바깥에서 여러 분야의 임원들을 만나보면 대개 소통 능력이 출중했다. 원하는 것이 상이할 때 이를 조율하고 서로에게 익숙할 만한 언어로 풀어서 설명하고, 자기 입장에서만 주장하지 않고 다른 팀과 다른 팀원의 일과 입장을 알고 상황을 공감하며 설득했다.’ -정문정, <더 좋은 곳으로 가자> p.129


한 달 전, 대학 동기 H가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회사 근처 맛집 인증샷을 올렸다. 반가운 마음에 답장을 보냈다. H야 성수동 놀러 왔어? 여기 진짜 맛집인데~ 반갑다! 언니~ 나 이쪽으로 이직했어. 이런 우연이! 당장 날을 잡아 만나기로 했다. 요즘 자주 가는 하와이안 포케 집에서 점심을 먹고, 성수동 원탑 카페 로우키에 들렸다. 서로의 근황을 공유하다 책 이야기로 넘어왔다. H에게 테드 창의 소설과 안리타 작가의 <이, 별의 사각지대>를 추천했고, H는 스크롤이 끝없이 이어지는 리스트를 보냈다. -너무 황송했다- 그중에서도 H는 고민에 대한 답이 될 거라며 정문정 작가의 <더 좋은 곳으로 가자>를 강력히 추천했다. 그 날 교보문고 바로드림 서비스를 이용해 책을 받았지만, 2주 뒤인 오늘부터 읽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정문정 작가의 책을 펼쳤다. 서문부터 밑줄을 쳤다. 점점 책에 빠져들려고 하는데, 지하철 차창 너머로 동부간선도로가 보인다. 오늘은 소통이 원활하군. 책을 가방에 넣고, 다음 역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점심까지는 무탈하게 보냈다. H가 읽어야 할 도서 중 내가 소장한 책이 있어, 서로 책 교환을 할 겸 오늘 또 만났다. H와 두 번의 사다리 타기 게임을 한 끝에 소바를 먹고, 당연하게 로우키에 들렸다. H에게 네가 추천해준 정문정 작가의 책을 읽고 있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다른 이야기를 하다 타이밍을 놓쳤다. 사이좋게 책 두 권을 교환하고 다시 회사로 향했다.


앞선 글에서도 말했지만, 현재 나는 한 가방 브랜드의 인스타그램 캠페인 전략을 만들고 있다. 브랜드 스터디를 한 뒤, 필요한 자료와 벤치마크 사례를 찾아야 했다. CD님께서 혼자 하지 말고 새로 들어온 주니어 아트들과 함께하라고 하셨다. 만년 막내일 줄 알았는데, 이제는 디렉션을 주는 위치가 됐다. 혼자 할 때와 별 다를 바는 없다. 단지 자료 조사 및 레퍼런스를 찾는 대신 전략을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압박감이 든다. 그 친구들이 여러 번 일하지 않으려면 디렉션을 잘 주어야 하는 이유에서다. 우선 내가 정리한 덱을 설명한다. 아무 반응이 없다. 초조해진다. 이해가 안 되나? 나만 알게 썼나? 뭐가 문제일까. 다급하게 궁금한 것 있나요? 라고 물으면 없다고 한다.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요청사항을 말하고 덱을 공유했다. 다행히 질문하고, 더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


디렉션을 받는 입장에서 주는 입장으로 바뀌니 신경이 곤두선다. 어떻게 하면 쉽게 이해할지, 원하는 방향을 너무 세세하게 짚은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퇴근 길, 다시 정문정 작가의 <더 좋은 곳으로 가자>를 펼쳤다. 좋은 문장들이 많아 책 귀퉁이를 많이 접었다. 그러다 내 가슴에 턱, 박힌 문장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내가 위에 인용한 문장이다. 아직 중간관리자급의 연차는 아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디렉션을 주는 것이기에 이 문장을 보고 회사에서의 일을 복기했다. 주니어 아트들에게 디렉션을 명료하게 주었는지. 오늘 PD님께 보낸 유튜브 자막 보완 사항을 그가 익숙할 만한 언어로 설명했는지.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웹에서 본 모기업의 비서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 거기서 그 때 먹었던 게 뭐지?’라고 물으면 가게 이름과 메뉴를 정확하게 대답한다는 내용이었다. 자식들도 알아듣기 힘든 말을 통역하기에 절대로 잘리지 않는다나 뭐라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느낌적인 느낌’의 인간이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서운해할 확률이 높다. 본인은 “이런 느낌”을 원했는데, 상대가 제대로 하지 않아서다. 언젠가 CD님께서 CD는 소통을 잘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방점을 ‘잘’에 찍고 있었는데,‘소통’에 있었다. 소통하지 않으면 잘할 수 없다.


교통 방송을 들으면 소통과 관련된 문장이 자주 나온다. 강변 북로의 소통이 원활하다든지, 경부 고속도로 일부 구간이 막혀 차량 소통에 차질을 빚는다든지. 그동안 무심코 넘겼던 문장이 다시 들린다. 도로도 인간관계도 일도, 나만 잘 간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나도 잘 갈 수 있게 하는 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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