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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Feb 16. 2021

처음으로 눈 내리는 날 야외 촬영을 하다

촬영장은 재미있어

처음은 기억이 시작되는 곳이다. 처음으로 무언갈 경험하면, 유사한 일 또는 감정이 쌓인다. 광고를 하며 기억의 태초가 되는 ‘처음’을 만난 적이 있다. 재작년 봄, 혼자 조사를 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CD 님들의 피드백을 받으며 제안서를 만들었다. PT가 잘 되어서 연간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제안서가 좋다는 클라이언트의 피드백에 뛸 듯이 기뻤다. CD 님들께서 완성해주셨만, 많은 부분 나의 노력이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 덕분에 아이디어 내는 것이 더 좋아졌다. 생각이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었던 점이 크다. 결과물이 나오는 과정은 늘 힘들지만, 막상 온에어가 되고 나면 그렇게 뿌듯하고 재미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잘하고 싶다. 몇 달 뒤의 내가 봐도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온 신경을 다해 고민한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작년 겨울, 클라이언트가 프로젝트 리뉴얼 제안을 요청했다. 수차례 피드백이 오가다 해를 넘어 리뉴얼 아이템이 결정됐다. 이번 또한 감사하게도 나의 생각이 녹아든 아이디어가 팔렸지만, 기쁨도 잠시. 같은 프로젝트지만 매번 캐릭터에 변주를 주어야 해서 눈앞이 막막했다. 하지만 뭐.. 옆에 PD님도 있고, CD님도 있고, 배우 분도 잘하시니까 마음을 놓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2021년의 첫 촬영을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7시부터 촬영에 들어갔다. 장소를 옮겨야 해서 밖으로 나오니 눈발이 약하게 흩날렸다. 오늘 눈이 온다고 했나? 날씨도 보지 않고 나온 터라 금방 그치겠거니 했다.


생각과는 달리 눈이 점점 더 많이, 매섭게 내렸다. 얼굴을 사선으로 치고 가는 눈발에 눈썹과 속눈썹까지 다 젖었다. 모자 위로 눈이 3센티 정도 쌓이고, 미끄러운 언덕을 오가는데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캐릭터의 콘셉트와도 잘 어울렸고, 무엇보다 배우 분이 극을 정말 잘 이끌어가 주셔서 오히려 더 신나게 촬영에 임했다.


점심을 먹고 나니 눈이 그치기 시작했다. 촬영 막바지에는 하늘이 맑아져 기분이 좋았다. 얼마 만에 본 파란 하늘인지. 하늘 사진을 찍을 때면, 허리를 최대한 뒤로 젖힌다. 그러면 그 하늘 위에 떠 있는 느낌이 든다. 물 위를 유영하듯, 구름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고 그걸 보다 보면 어쩐지 위안을 얻곤 한다. 오늘은 하늘이 내게 고생했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프로젝트 때문에 힘들기도 힘들었지만, 덕분에 기억의 시초가 되는 처음들을 만들 수 있었다. 처음으로 덱 만드는 재미를 느꼈고, 처음으로 모르는 분야를 꾸준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디렉팅 주는 방법을 고민하고, 처음으로 눈 내리는 날의 야외 촬영을 경험했다. 이 처음들이 없었다면, 이 프로젝트의 처음이 기쁘지 않았다면, 오늘 눈 내리는 촬영장이 즐겁지 않았을 거다.


몸은 진짜 힘들었는데, 퇴근하고 나니 무작정 걷고 싶었다. 남편의 스튜디오에서 같이 저녁을 먹고 집에 걸어갔다. 볼을 스치는 바람에 봄기운이 묻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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